[칼럼] 느리고 불편할 때 비로소 보이는 것들 - '레드 데드 리뎀션2'

칼럼 | 강승진 기자 | 댓글: 29개 |



오픈 월드 게임을 하는 건 내겐 일종의 고난이다. 오픈 월드를 싫어하냐고 묻는다면, 그건 아니다. 인생 게임으로 주저하지 않고 배트맨 아캄 시리즈를 꼽을 정도다. 힘든 이유는 뭐랄까. 원체 뭔가를 정리하지 않으면 안 되는 습성이라는 게 있달까.

당장 길 건너에 중요한 스토리와 이벤트가 어른거린다. 그런데도 대로변을 돌아 근처에 있는 무언가는 꼭 끝을 내야 한다. 물음표니 느낌표니 퀘스트 마크니 하는 것들 말이다. 맵은 항상 깨끗이 지워져야 하고 중요한 이야기는 뒷전이 된다. 그러다 엔딩도 채 보지 못하고 접은 게임이 부지기수. 단팥빵의 맛있는 팥소만 남기고 주변 빵만 먼저 먹었는데 그새 배가 부른 거다. 결국, 남겨둔 팥소도 버리고 말지.

그래서인지 위쳐3는 첫 엔딩을 보는데 150시간 가까이 걸렸다. 100시간 가까이 한 어쌔신 크리드 오디세이는 주변에 물어보니 절반 정도 한거라더라.



▲ 저 퀘스트 마커가 남아있는 한 난 영원히 고통받을 거다

요즘은 이런 습관이 조금 더 도드라졌다. 좋은 오픈 월드의 기준이 명확해지면서다. 예를 들어 맵이 얼마나 큰지, 또 할 것들이 얼마나 밀집도 높게 구성되었는지. 맵이 넓으면 자칫 이동이 지루해질 테니 자연스레 편의성은 높아졌다. 스파이더맨은 건물 사이를 서핑하듯 건물 사이를 헤쳐나간다. 한때 암살자였던 스파르타의 전사는 가로막는 벽은 뭐든 타고 뛰고 오른다. 막힐 것 없는 주인공을 뒤에서 조종하는 나에게 남은 건 하나다. 빽빽하게 줄지은 물음표를 향해 곧장 전진하는 일. 그리고 도미노 쓰러트리듯 쪼르륵 뛰어다니며 클리어하는 일이다.

그 좋다는 오픈 월드의 핵심은 이거다. 많고, 빠르고, 편하다. 이런 기준으로 따지면 비디오 게임의 역사를 바꿨다는 '레드 데드 리뎀션2'는 고작해야 50점짜리 게임이다.




디테일에 대한 락스타의 집착은 거의 광분 직전에 다다랐다. 19세기 서부 개척시대 미국을 게임에 담아내려는 의지가 차고 넘쳤을지도 모른다. 정말 단순한 것 하나만 예를 들어보자. 체중에 따라 주인공은 입는 피해나 날렵함이 달라진다. 더운지 추운지, 옷이 깨끗한지 더러운지, 평소에 얼마나 성실히 살았는지 평가는 달라진다. 어쩔땐 물건 값도 깎아주고 때로는 내 범죄를 알아채기도 한다. 고민 없이 즐길려고 게임을 했다 만만치 않은 선택과 고민에 지칠지 모른다.

툭하면 걸려 넘어지는 승마도 땀 흘리게 하는 일이다. 조작은 또 얼마나 익숙해지기 어려운지. 조금이라도 잘못 움직여 지나가던 행인이라도 건드리는 날엔 수배자 A가 되어 보안관들을 피해 구석에 얼굴을 처박고 있어야 한다. 그렇다고 말을 버리는 선택지는 게임을 포기하라는 것만큼 무서운 말이다. 빠른 이동, 그게 거의 없는 수준이다. 또 마을과 마을은 얼마나 먼지. 진짜 정말 멀다. 말은 가는 도중에 X 버튼을 타이밍에 맞춰 눌러줘야 겨우 만족할 속도로 뛰어나가니 손도 바쁘다.

이동은 귀찮은데 주요 이벤트 마커는 마을보다 더 멀다. 원체 수가 얼마 되질 않는다. X 버튼을 따박따박 눌러줘야 할 생각을 하니 벌써 머리가 지끈거린다. 하지만 게임은 해야 하니 어쩔 수 없이 지도를 연다. 몇 개 찍힌 노란 이벤트 표시 중 그나마 가까워 보이는 곳 하나를 눌러 하염없이 달린다.




어쩌면 누군가 분명 느낄 고통. 하지만 알다시피 '레드 데드 리뎀션2'는 50점짜리 게임이 아니다. 아니, 오히려 메타크리틱 기준 올해 최고 점수를 노리는 게임이다. 락스타의 느림과 불편함을 해석하는 방법은 확실히 달랐다.

그간 산과 강은 다음 물음표를 향해 나아가는 데 그저 방해 요소일 뿐이었다. 하지만 말을 타고 천천히 둘러보았을 때 자신이 광활한 19세기 미국 어딘가에 있음을 실감한다. 둠칫거리는 힙합음악을 뿌려대는 라디오는 없다. 대신 주변은 터덕터덕 발걸음을 옮기는 말소리와 토끼, 새, 사슴 같은 동물들로 가득 차 있다.

간혹 들리는 사람들의 목소리도 세계를 채우고 있다. 언젠가는 숲속에서 우연히 살려달라는 소리를 듣고 뛰어갔더니 누군가 뱀에 물렸다. 입으로 독을 빼주고 무심히 돌아섰다. 그러곤 먼 훗날 마을에 들어서니 그때 일을 기억하냐며 무료로 총 하나를 사주겠단다. 그저 흘러갈 줄 알았던 작은 이벤트 하나하나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야기를 만든다.

랜덤 인카운터 이벤트나 사냥할 거리가 풍부한 게임이 없던 건 아니다. 락스타는 거기에 디테일을 얹었다. 그리고 꼭 처리해야 할 것 같은 게임 속 미션으로 만들지 않았다. 그저 플레이어가 즐길지 말지 알아서 선택하도록 툭 던져놓았을 뿐이다.




'레드 데드 리뎀션2'는 '젤다의 전설: 브레스 오브 더 와일드'와 닮았다. 이 작품은 공주를 구하는 영웅 이야기라는 JRPG의 왕도 스토리를 따른다. 하지만 마땅히 정해진 루트랄 게 없다. 프롤로그 수준에 진행만 하면 곧장 보스를 만나 클리어도 가능하다. 제작진은 그 과정쯤에 있을 다양한 가능성만을 만들어두었다. 결과를 얻기까지의 순서도, 방식도 그 가능성 안에서 유저가 직접 선택한다.

깊이 있는 미니게임과 콘텐츠, 그리고 차근차근하면서 곧장 전개되는 스토리는 짐짓 젤다의 전설과는 전혀 달라 보인다. 하지만 핵심은 비슷하다. '레드 데드 리뎀션2'가 만들어 둔 세계 속에서 다음 이야기까지 진행되는 과정이 오롯이 플레이어 손에 달렸다.

고집인지 장인정신인지는 모르겠다. 확실한 건 락스타는 남들 보폭에 맞춰 뛰어나가기보다는 긴 호흡으로 한 발 한 발 내디뎠을 때 적합한 게임 형태를 그렸다. 낡았다고, 불편하다고 하는 락스타식 오픈 월드를 한층 벼려낸 모양새다. 그래서 유저는 더더욱 체감한다. 내가 황량한 서부 시대에 떨어진 무법자 아서 모건이라는 것을. 그게 자신의 취향에 맞든, 맞지 않든 말이다.

그렇게 나는 지금도 고단한 마커 정리 대신 말을 타고 평야를 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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