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수첩] 폴란드에서 게임은 '진짜' 문화다

칼럼 | 강승진 기자 | 댓글: 14개 |



'게임은 문화다'. 우리 게임 업계는 하나의 목소리로 게임을 질병이 아니라며 내건 슬로건이다. 모두가 게임이 뭐가 이롭고, 왜 문화인지 서로 모여 토론하고 설득한다. 그런데 여기 떠들썩하게 굴지 않고서도 국가가 문화로 인정한 게임이 있다.

지난 18일, 폴란드의 마테우시 모라비에츠키 총리는 게임사 11 비트 스튜디오(11 bit studio)를 직접 방문했다. 개발자들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주고받은 마테우시 총리는 잠시 후 기자들 앞에 서서 폴란드 학생 추천 목록에 게임 디스 워 오브 마인을 추가한다고 발표했다. 소설, 조각품, 음악 등 다양한 문화 예술품이 등재된 폴란드 학생 추천 목록 최초의 비디오 게임이다.

추천 목록에 오르면 뭐가 달라질까. 폴란드 전역의 교사는 목록에 오른 디스 워 오브 마인을 실제 교육 커리큘럼에 사용할 수 있다. 당연히 총리실은 물론 교육부의 지원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다. 즉, 정부와 교육관할부가 소설, 음악, 미술품 등 학생이 직접 체험해봐야 할 작품의 지위를 게임에도 인정한 셈이다.

폴란드의 게임사 11 비트 스튜디오가 2014년 선보인 디스 워 오브 마인은 추악한 세상과 참혹한 현실을 그린 게임이다. 그도 그럴게 정치인들의 선동과 종교적 분쟁, 수없이 자행된 학살과 성폭력 등 20세기 가장 추악한 전쟁으로 불리는 보스니아 전쟁이 게임의 바탕이 됐다.

게임 속 정부군은 반군을 쥐잡듯 도시 포고렌에 몰아넣은 상태다. 마치 사라예보 포위전처럼 도시를 두고 대치한 정부군과 반군은 서로 자신들의 목소리를 내고 있다. 게임은 이들 사이에서 조명받지 못하고 죽어가는 민간인들의 이야기를 다룬다.

깨끗한 물 한 모금, 발 뻗고 한 몸 뉘일 잠자리조차 없는 폐건물에서 사람들은 하루하루 목숨을 연명한다. 이들은 플레이어의 조작에 따라 잔해를 파헤쳐 생필품을 조달하거나 빗물을 여과하고 간이침대를 만들어 잠시 눈을 붙인다. 그리고 때론 또 다른 생존자의 거처에 몰래 들어가 물건들을 훔쳐오기도 한다.

이 과정에서 주인공들은 약탈자들에 습격을 당하고 때론 잠입한 가옥의 거주자를 살해하기도 한다. 이 모든 건 게임 속 인물들이 극한의 상황에서 자신의 생존을 위해 행해진다. 하지만 이들은 인간성을 잃지 않았고 윤리적인 후회에 고통스러워한다. 그리고 남을 살리기 위해 죽을 것인지, 아니면 나를 위해 남을 죽일 것인지 고민한다.



▲ 개발자와 이야기를 나누는 폴란드의 마테우시 모라비에츠키 총리

이 땅 전체가 총성과 비명으로 덮였던 날이 채 100년이 지나지 않았다. 하나의 울타리 안에 있을 터였던 땅이 반으로 쪼개진 국가에 살고 있고 국가의 부름에 군대도 다녀왔다. 그런데도 전쟁이라는 단어는 아득아득하게 느껴진다. 다른 시대를 사는 우리에게 전쟁은 시험을 위해 머리에 쑤셔 넣어야 할 정보지 가슴에 담아 넣을 감정이 아니다.

그런데 화면 속 가상의 전쟁에 옆구리 한쪽이 아릿한 건 왜일까. 여기에는 교과서나 영화에는 없는 상호작용, 즉 경험이 담겨있다. 게임의 모든 판단과 결정은 플레이어를 통해서 나온다. 그래서 참혹한 세계는 전쟁의 아픔과 절망을 플레이어의 가슴 가득 밀어 넣고, 플레이어는 그걸 자신의 이야기처럼 그대로 받아들이게 된다.

예술과 문화의 지위를 얻은 디스 워 오브 마인은 플레이어에게 실제 역사가 어땠느니 몇 명이, 어떻게 희생당했는지 직접 설명하지 않는다. 대신 무력의 충돌과 생존을 위해 싸우는 민간인의 도덕적 갈등을 그려두고 두 손으로 이를 경험하게 했다. 그리고 이는 전혀 다른 전쟁을 겪은 우리에게도 충분히 와닿을 내용이다.

11 비트 스튜디오의 최고 경영자 그제고시 미에호프스키는 이걸 게임이 가진 토론할 가치가 있는 감정적이고 윤리적인 경험이라고 설명한다.

때로 게임의 문화는 게임 질병화 논란에 반대하는 이분법적 슬로건으로 내걸린다. 때로는 게임이 교육에 쓰이거나 문학적, 예술적 가치를 담아냈을 때야 문화로서의 의의를 가진다며 그 가능성을 억누르기도 한다.

하지만 게임은 억지로 누군가를 감화하려고 만들지 않아도 된다. 순수하게 재미를 위해서 만들어지고 때로는 성숙한 감정적 경험을 전달한다. 이렇게 만들어진 게임은 재미있는 내용으로 사람들을 끌어모아 커뮤니티를 형성하기도 하고 진지한 이야기로 유저들의 담론을 이끌어낸다. 비디오 게임 문화는 여기서 자연스럽게 탄생한다.

디스 워 오브 마인이 그랬듯 우리도 게임을 학교 교재로 사용하는 날이 오길 바란다. 그때는 게임이 무엇인지에 관한 논의 대신 모두가 게임이 주는 경험과 세계에 대해 이야기할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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