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수첩] 그 산업은 망하지 않았다

칼럼 | 박광석 기자 | 댓글: 12개 |



코로나 바이러스의 영향이 장기화되자 비대면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언택트(Untact) 시대'가 도래했고, 그 여파로 VR과 AR 기술이 주목받기 시작했다. 금일(13일), 코엑스에서 개최된 '2020 서울 가상증강현실 엑스포'의 메인 테마 역시 아니나 다를까 언택트로 정해졌다.

이 시국에, 언택트를 주제로 하는 VR·AR 기술 관련 행사가 오프라인에서 개최된다는 모순이 다소 마음에 걸리기도 했지만, 사실 반가운 마음이 더 크게 다가왔다. 달력을 빼곡하게 채웠던 게임 관련 행사들이 줄줄이 취소된 지금, VR 기술 박람회에 직접 참가한다는 것은 결코 흔치 않은 기회였기 때문이다.

유수의 세계 게임쇼들이 '온라인 행사로 전환'을 외칠 때 홀로 오프라인 행사를 치른 중국의 차이나조이가 우수한 선례를 보여줬기에, 과연 국내에선 오프라인 행사로 말미암은 전염병 확산을 막기 위해 어떤 방역 절차를 마련했을지도 궁금해졌던 참이었다.

기대에 부푼 마음을 안고 아침 일찍 길을 나서 찾아간 2020 서울 VR·AR 엑스포 행사장은 상상했던 모습과는 사뭇 다른 모습이었다. 긍정적으로도, 그리고 다소 아쉬운 쪽으로도 '내가 알던 그 VR 행사가 맞나?'라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언택트 시대 속 오프라인 행사의 가능성 보여준 철저한 방역 시스템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철저한 방역 대책이었다. 입장권과 예매권을 발행하는 매표소에는 사회적 거리두기를 위한 발자국 스티커가 곳곳에 붙어있고, 잠시 몸을 기댈 수 있는 데스크에는 손 세정제가 빠짐없이 구비되어 있었다.

행사장에 입장할 때에도 여러 방역 절차가 이어졌다. 마스크 착용 확인 후에 열감지 카메라를 활용한 체온 체크가 이어졌고, 입장권 확인 절차까지 마친 후엔 비닐장갑과 VR용 안대가 배부됐다. 입구에서 배부하는 비닐장갑을 착용하지 않으면 행사장 내부에 진입하지 못하는 구조였다. 불편하진 않을까 걱정이 앞서기도 했지만, 의외로 사진을 찍기 위해 휴대폰 액정을 터치하는 것에도 지장이 없었고, 이 모든 것이 더 철저한 방역으로 이어질 것이라 생각하니 기분 좋게 따를 수 있었다.







행사장에 입장한 후에도 방역을 위한 주최 측의 세세한 마음 씀씀이가 곳곳에서 드러났다. 참가 기업들의 신제품 발표와 오픈 세미나가 개최되는 쇼케이스 아레나의 모든 책상엔 비말 확산을 방지하기 위한 칸막이가 설치되었고, 강연장을 가득 메운 참관객용 좌석은 모두 거리 두기에 용이한 1인용 책상으로 꾸며졌다.

사람이 많이 모이는 장소에 방문하는 것은 여전히 위험할 수 있는 일이지만, 참관객들이 편하게 행사를 즐길 수 있도록 노력한 흔적이 고스란히 느껴졌기에 여러모로 안심이 됐다. 마스크 한 장만 믿고 매일 대중교통을 이용하고 있는 지금의 상황과 비교해보자면, 오히려 행사장 내부가 코로나의 위협으로부터 자유로운 장소일 수 있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 쇼케이스 아레나의 모든 좌석은 물론,



▲ 카페테리아 책상에도 독서실을 방불케 하는 가림막이 설치됐다.


'게임은 어디있지?' 점점 입지가 좁아지는 B2C용 VR 게임들




코로나 걱정은 싹 잊게 해주는 철저한 방역에 웃음꽃을 피우기도 잠시, 행사장에 전시된 부스들을 한차례 돌아보다 보니 근심이 깊어졌다. 언택트 시대를 맞이하여 드디어 국내에서도 꽃을 피울 것이라 기대했던 소비자용 VR 게임들의 모습을 좀처럼 찾아볼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번 전시회는 VR과 AR, 그리고 비대면 산업 분야의 100여 개 기업이 참가해 VR·AR 융합 비즈니스 모델은 물론, 언택트 시대에 최적화된 분야별 솔루션을 선보이는 자리로 꾸며졌다. 이전처럼 기업에 납품되는 체험용 어트랙션 게임들로만 가득 채워지는 단조로운 양상은 벗어날 수 있을 것이라 예상했지만, B2C 콘텐츠는커녕, VR 게임 자체를 찾아보기 어려운 지경이 될 것이라고는 상상하지도 못했다.

현장에 참가한 100여 개 기업 중 게임과 관련된 콘텐츠를 전시한 부스는 10개가 채 되지 않았고, 대부분의 부스는 소셜 미디어 엔터테인먼트와 교육, 운송, 건설과 관련된 비대면 디지털 전환 기술을 선보였다. 이러한 기술들이 언택트 시대에 주목해야 하는 핵심 기술인 것은 분명하나, 과학기술정보통신부가 지난 3일에 발표한 'VR·AR 선제적 규제혁신 로드맵'에 게임 관련 개선 항목이 단 한 개도 포함되지 못했던 사실이 떠올라 괜스레 아쉬운 마음이 더해졌다.



▲ 키오스크에서 주문을 하면, 부스 내부의 로봇이 음료를 제조해준다



▲ 요즘 인기인 MBTI 검사 콘텐츠는 물론,



▲ 비햅틱스에서 개발한 촉각 슈트를 직접 체험해볼 수도 있었다.



▲ B2C용 VR 게임이 없어 아쉬울 뿐, 볼거리는 참 많았다

물론 이번 행사에 VR 게임을 전시한 부스가 아예 없었던 것은 또 아니다. B2C용 VR 게임을 전문으로 개발하는 국내 개발사 '비주얼라이트'는 스팀 플랫폼에도 출시된 VR 게임 타이틀 2종의 시연대를 마련했고, 현재 개발 중인 또 하나의 B2C용 신작을 소개하기도 했다.

현장에서 만난 비주얼라이트 정성근 대표는 B2C용 VR 게임의 부흥을 위해 국가 지원 방식의 고도화는 물론, 국내 VR 게임 개발자들의 인식이 개선되어야 할 것이라고 설명했다. 높은 판매량을 기록하고 있는 해외의 VR 게임 선례들을 통해 VR 플랫폼에 특화된 기술들이 공개되어있음에도, 이를 나서서 공부하려는 개발자들이 많지 않다는 것이다. 그는 국내의 B2C용 VR 게임은 대부분 모바일 게임이나 PC 게임을 만들던 기술 수준을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며, 현재의 기조가 뒤바뀌기 위해선 개발자들의 끊임 없는 노력이 뒷받침되어야 할 것이라고 당부했다.



▲ B2C용 VR 게임 개발은 전세계적인 트렌드가 됐지만, 국내에선 아직 먼 이야기처럼 보인다


"내가 알던 그 VR 행사가 맞나? 가슴이 웅장해진다"




언택트 시대가 도래해도 좀처럼 주목받지 못하는 VR 게임의 위치에 아쉬운 마음은 감출 수 없었지만, 전체적인 행사의 모습은 기대한 것 이상이었다. 지금껏 국내에서 개최된 VR 기술 관련 전시회를 여럿 방문해봤지만, 이렇게 많은 이들의 관심이 쏠린 것은 단 한 번도 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학기가 진행 중인 목요일 오후, 코로나 바이러스로 외출이 조심스러운 시국인 것은 물론, 현장 등록을 위해 10,000원을 내야 하는 유료 행사임에도 불구하고 행사장은 참관객들로 북새통을 이루었다.

몇몇 체험형 게임 콘텐츠 부스를 제외하면 '파리 날린다'는 표현이 과언이 아닐 정도로 한산했던 지난 서울 VR·AR 엑스포 행사들이 거짓말처럼 느껴졌다. 비닐장갑에 안대, 마스크까지 착용해야 하는 불편함을 모두 감수하고, VR 콘텐츠를 즐기며 웃는 다양한 연령대의 참관객들을 보며 '언택트 시대 속 VR과 AR'이 갖는 위상을 다시금 실감할 수 있었다.

서울 VR·AR 엑스포를 뒤로하며, 머릿속엔 많은 생각이 교차했다. 철저한 방역 시스템을 마련하여 VR 기술에 관심이 있는 이들을 전시장으로 이끌고, VR 기술에 관심을 두게 된 이들이 저마다 자신의 VR 기기를 한 대씩 보유하게 된다면, 언젠가 우리나라도 B2C용 VR 게임이 개발될 수 있는 여건을 갖추게 되는 것 아닐까 하는 다소 부질없는 바람이었다. 물론 이를 현실로 만들기 위해서는 국가는 물론, VR 게임 개발자들의 끊이지 않는 노력이 함께 수반되어야만 한다.

다소 부질없을지 몰라도, 마냥 달콤한 꿈을 꾸게 해주었던 이번 행사가 한순간의 꿈으로 그치지 않고 VR 콘텐츠를 만드는 개발자 모두에게 '가슴이 웅장해지는' 경험을 선사하는 계기가 되길 기대해본다. 적어도 기자에게 가슴이 웅장해지는 경험을 선사한 것이 분명한 서울 VR·AR 엑스포 행사는 오는 15일까지 코엑스에서 개최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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