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수첩] 숫자에 가려진 게임노동자

칼럼 | 이두현 기자 | 댓글: 31개 |



사람이 숫자에 가려진다는 걸 알게 된 날은 2010년 3월 26일이다. 이날 동기가 천안함에서 전사했다. 진해 훈련소에서 마지막으로 봤고, 1년이 지나 들린 소식이었다. 이후 각종 미디어에서 46이란 숫자가 떠돌았다. 그때 난 2함대에서 천안함이 다시 떠오르길 기다렸고, 반파된 채 입항하는 모습을 지켜봤다. 미디어에 노출되는 것과 현장의 모습이 다르다는 걸 실감했다. 이슈에서 개인은 숫자로 대체된다. 숫자로 바뀐 개개인의 사정은 드러나기 힘들다.

게임업계에도 숫자로 바뀌는 일들이 있다. 1명이 극단적 선택을 했다. 작은 게임사 5명이 임금체불 문제를 겪고 있다. 80여 명의 개발자들이 프로젝트 드랍으로 인해 전환배치 중이다. 올해 전환배치를 겪거나 대기 중인 노동자가 400여 명에 달한다. 개개인은 뉴스에서 숫자로 바뀐다. 물론, 많은 사람 이야기를 처음부터 끝까지 싣기란 물리적으로 힘들다. 다만, 이슈에 얽힌 숫자가 모두 사람이란 걸 잊어선 안 된다. 게임노동자에 대한 이해는 여기서 시작한다.

22일, 산업 논리에 가려진 게임 개발자 노동 환경을 조명하는 세미나가 진행됐다. 패널로는 미디어 관련 학자 7명과 게임개발자 출신 1명이 참여했다. 일반 패널들은 자신들이 게임관련 전문가는 아니란 것을 전제하고 의견을 냈다. 패널들은 자신들이 모른다는 걸 알기에 주제발표를 위해 많은 준비를 했다. 현직 개발자를 찾아 집중 인터뷰를 해 게임산업의 현실을 드러내려 노력했다. 다만, 2인 심층 인터뷰가 게임산업 9만여 명 노동자를 대신할 수는 없었다. 시작이라는 점에 의의를 둔다.

게임산업은 특수하다. 현재 우리가 말하는 게임산업이란 단어는 역사가 30년이 채 되지 않았다. 그래서인지 1세대 창업자들이 현역이다. 기존 대기업에선 3~4세대 경영이 본격화된다는 것과 비교된다. 그만큼 게임노동자도 특이하다. 일반 공기업처럼 정년까지 연봉이 착실하게 오른다는 인식은 아니다. 그렇다고 과거 제조업 시대처럼 생산한 물건 수 만큼 노동자의 능력을 평가하기도 곤란하다.

그만큼 게임노동자에 대한 사회적 인식은 부족하다. 근래 게임노동자 실태에 대한 조사는 2016년 극단적 선택이 생겨난 이후에 본격화됐다. 다만, 보고서는 2018년 자료와 올해 초 자료 발표 이후 소식이 뜸하다. 비슷한 시기 게임노조가 처음 생겨났고, 52시간제 폐지가 도미노처럼 이어졌다. 게임노동자 환경이 개선된다는 소식이 이어지자, 이미 옛것이 되어버린 보고서와 자료는 묵혀졌다.

오늘 세미나는 게임노동자 이슈가 여전히 진행형이란 걸 알렸다. 여기에 여성 게임 개발자로 살아간다는 것을 들여다보고자 한발 더 나아갔다. e스포츠가 아시안 게임 시범종목으로 채택되고, 게임산업이 우리나라 문화산업 수출 대부분을 차지한다는 소식 뒤에 감춰진 게임노동자, 그중에서도 여성 노동자를 조명하려 했다. 이번에 새롭게 드러난 문제들은 아니었다. 우리 업계가 그대로 묵혀두면 안 될 중요한 문제 불씨를 이어나갔다. 중요한 행동이다.

하이 리스크 하이 리턴. 대표적으로 게임산업을 표현하는 단어다. 출시 전후 6개월가량 노동 강도가 세다는 것은 인정하지만, 성공할 때 그만큼 큰 보상으로 되돌아온다는 말이 게임노동자를 가렸다. 하지만 게임산업은 작품이 성공하기 굉장히 힘들다. 1개 게임이 성공했다면, 99개가 실패했단 이야기다. 99개를 만든 게임사와 게임노동자를 살펴보는 연구는 계속되어야 한다.

그동안 게임노동자를 살펴보지 않은 결과가 현재 산업 양극화라고 세미나에 참여한 패널은 분석했다. 패널 말대로 게임노동자를 살피지 않은 걸 양극화 원인으로 꼽기엔 무리가 있다. 양극화는 여러 이유가 복합적으로 일어난 결과이다. 이유 중에는 셧다운제, 거침없는 중국 게임사, PC에서 모바일 플랫폼으로의 변화 등이 있을 것이다. 다만, 게임산업은 기존 제조업 시대부터 불거진 양극화 문제와 노동자를 살펴야 한다는 교훈을 배울 수도 있었다. 과거 사례에서 배울 게 많았음에도 게임산업은 태동기부터 성장기까지 제대로 살펴지지 않았다. 결과는 현재다.

최근 정부는 '경영상 이유'에 따라 52시간제 완화 대책을 내놓았다. 노동을 제한하는 규제 때문에 중국 게임사와 비교해 경쟁력이 밀린다는 이야기도 업계에서 나왔다. 정부와 미디어가 재무제표와 주가를 책임지는 대책을 제시하기란 어렵다. 다만, 마치 지주와 소작농을 보는 듯하다. 지주가 수확량을 걱정할 때 소작농은 마른 밭에서 땅을 갈고 있다. 지주의 세율을 걱정해주면서 밭을 갈고 있는 소작농은 지나치고 있다.

세미나에서 오늘날 게임노동자를 표현하는 말들이 정리됐다. 모바일 플랫폼 변화로 일주일 단위 업데이트 준비에 따라 갈려 나간다. 과거 '나는 개발자'라는 자부심에서 '나는 3D노가다꾼'이라는 자조 섞인 표현. 잦아진 크런치 모드, 무리한 일정, 갑작스러운 요구, 이벤트의 상시화, 위험의 전가, 부품화, 언제든지 대체될 수 있는 인력, 등등.

국내 게임산업 규모가 절정을 지났다는 증권가 보고서들이 나온다. 3N 재무제표도 정점을 찍은 뒤 하향세다. 중국 게임사의 공격적인 진출로 대표되는 위험들은 커지고 있다 게임산업 밖에서 새로운 먹거리를 찾는다는 이야기도 나온다. 그러나, 오늘 세미나는 이런 위기 속에서도 게임노동자 현황을 잊지 말고 살펴야 한다고 말한다. 이 말이 현시점에서 '갑자기?'처럼 느껴질 수 있다. 큰 문제가 터지기 전 말할 기회가 생겨 다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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