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롤드컵 기행기 #1] 드라마 가득한, 한국 기자 눈에 비친 '롤드컵'

칼럼 | 이명규 기자 | 댓글: 23개 |



롤드컵 일지 #1. 서부개척시대

장장 2주 간의 LoL 월드 챔피언십 그룹 스테이지가 끝이 났다. 무려 3개의 한국 팀이 진출해 8강에도 모조리 오르는 기염을 토했음에도, 샌프란시스코 현장에는 선수단을 제외하면 한국인들은 거의 없었다. 공교롭게도 몇가지 사정들, 그리고 인벤 글로벌의 진출과 맞물려 이번 LoL 월드 챔피언십은 한국에서는 오직 인벤 만이 전체 일정을 소화하며 취재를 하게 됐기 때문이다.

그룹스테이지를 첫날을 보내고 든 생각은 올림픽을 취재하는 스포츠 전문 기자들의 느낌이 이럴까 하는 것이었다. 롤드컵 취재가 확정되었을 때는 리우데자네이루 올림픽이 한창일 시기였고, 때문인지 몰라도 이런저런 올림픽 소식들을 눈여겨 봤던 것 같다. 그 중에서도 기억에 남는 것은 한국어가 유창한 브라질인 특파원이 라디오에 출연해 현지 소식을 전달하던 일이었다. 어느날 택시를 타고 집으로 돌아가던 길에 듣게 된 그 방송은 그 자체로 굉장한 특별함이 느껴졌다. 나 또한 그런 역할을 맡을 수 있다는 것이 나를 흥분케 했다.



8일 간 함께 했던 그룹 스테이지 기자실

그리고 지금, 일년에 오직 한 번, 특별하기 짝이 없는 이 행사를 찾은 감상을 짧게나마 몇 번에 걸쳐 글로 풀어보려고 한다. 읽기 전 감성을 충만하게 하면 좋을 것이다.




대회라는 용광로에 이라는 재료, 이라는 불길


E3, PAX EAST, GDC, 블리즈컨… 나름대로 많은 수의, 다양한 해외 취재를 다녀봤지만, e스포츠 대회는 이번 2016 월드 챔피언십이 처음이었다. 지금까지 겪어 본 해외 행사 중 가장 에너지가 넘치는 건 블리즈컨 정도였던 것 같다. 2015년 블리즈컨 행사 개막식에서 메인 홀에 모여 개막 카운트를 세던 수천, 수만명의 인파가, 그리고 그들 속에서 용암처럼 들끓던 열정이 기억 난다.



핵융합로 수준의 응원 열기가 그룹 스테이지에서도 보였다

그리고 이번 월드 챔피언십에서는 그런 수천 수만개의 화산들이 내뿜는 열기를 매일 느낄 수 있었다. 경기가 하나하나 진행될 때마다 무대에서, 관중석에서, 중계석에서까지 에너지들이 터져 나왔고, 그런 용출이 고갈될 줄도 모르고 계속됐다. 심지어 2주 동안 쉴 틈도 없는 취재 일정으로 지쳐 있을 게 뻔한 기자들도 순수하게 경기를, 대회를 즐기는 모습은 매우 인상적이었다.

기자실에서 우리들은 경기를 보며 자기들끼리 토론하고, 혹은 장난치거나 조롱하거나, 대단한 플레이에는 단체로 박수를 치기도 했다. 특히 이변이 터져나올 때 그런 열광은 더했다. ANX 가 G2 를 3패의 수렁에 빠트렸을 때, 기자실은 축제 분위기였다. 나 또한 자연스럽게 그들에게 동화되었다. 북미팀과의 한국팀, 중국팀과 한국팀의 경기에서는 기자실 절반을 차지한 북미, 중국 기자들을 상대로 혼자서 치열한 응원전을 펼치기도 했다.






거의 매 경기마다 기자들은 환호하고, 비명지르고, 토론했다

나 또한 LoL 북미 오픈베타부터 지금까지, 플레이 해오며 또 LoL e스포츠의 시작을 지켜본 팬 입장으로서 떨리지 않을 수 없었다. 이처럼 모든 경기를 빼놓지 않고 본 월드 챔피언십은 처음이었다.

한국 팀들의 의무적인 팬으로서, 나는 그전에 맛보지 못한 감정을 많이 느꼈다. 시종일관 경기결과를 기다리며 초조해하지 않고 어차피 이길텐데 라고 생각하는 그 기분. 사실 여러 프로 스포츠의 팬이지만, 대체로 내가 좋아하는 팀들은 그다지 항상 잘하는 팀들은 아니었다.

뭐랄까, 선수도 아닌 내가 괜히 대회의 중심에 있는 기분. 다른 이들과 경기를 즐기는 여유 자체가 다르다는걸 스스로 느낄 수 있었다. 이를테면 각 지역의 맹주들과 한국팀이 맞붙을 때마다 기자실에서 다른 이들은 소리를 질러가며 응원하기 일쑤였지만, 나는 혹여 초반에 한국팀이 밀리더라도 때를 기다려 씨익 미소지어 보이기만 하면 됐다.






이분들 때문에 TSM 마저 응원했건만...

모든 한국팀을 응원하는 입장에서 그들의 절대적인 우위를 믿어 의심치 않는 그런 여유를 다른 이들은 모르듯, 마치 소년 만화의 주인공처럼 멋진 이변의 드라마를 기대하는 그들의 입장을 나는 잘 모르지 않을까 싶었다. 그래서 하나씩 하나씩 모든 경기를 주의깊게 보며, 모든 팀의 입장에 감정을 이입해보기 시작했다. 쉽지 않지만 재미있는 과정이었다.

가장 먼저 선택한 감정 이입의 대상은 ANX 였다. 눈에 띄게 상향 평준화된 롤드컵이라는 평가를 증명하듯 2주차에 접어들면서 더 많은 이변이 생겨났다. 2주차 첫날 A조 경기는 그런 특징을 가장 잘 보여준 날이자 축제의 날이었다. 당장 대회장의 모든 이들이 와일드카드에서 블루칩으로 도약한 ANX에 동화된 듯 했다. 2주차 첫날부터 마지막까지, 그들은 더 이상 와일드카드라는 특별 대우의 대상이 아니라 다른 시드권 팀들과 동일한 격을 갖춘 존재로 대접 받았다. 그 주역 중 하나인 리클릿과 직접 이야기를 나누며 인터뷰를 하고, ‘8강에 진출한 것을 진심으로 축하한다’는 말을 건넬 수 있었던 것은 큰 행운이었다.



마지막 날 C9을 응원하는 "Take my energy'는 거의 거국적인 구호였다

마지막 날은 상당히 재미있는 분위기로 흘러갔다. 관객 중 절대 다수를 차지하는, 또 미디어 중에서도 적지 않은 지분을 가지고 있는 북미 팬들이 하나되어 C9 응원으로 단결한 것이다. 이 때 만큼은 마치 SKT T1이나 IMAY 같은 다른 팀들이 물리쳐야 할 악마가 된 듯 했다. 기자실은 어느새 올림픽처럼 자기 나라 팀을 응원하는 소리들로 가득찼다. 기자들 사이에서도 보이는 묘한 신경전은 이런 국가 대항전에서 볼 수 있는 또 하나의 묘미일 것이다.




선수기자, 사람 대 사람의 만남





취재 과정에서 만난 해외 기자들의 반응도 흥미로웠다. 수많은 승자 인터뷰 기회가 있었고, 한국 선수들도 예외는 아니었다. SKT T1의 승자 인터뷰를 앞둔 어느날 저녁 인터뷰 장에서 나는 한국인 기자에게 간단한 한국어 인사와 감사의 말을 배우는 해외 매체 기자를 볼 수 있었다. 한 두 번이 아니라, 많은 기자들이 그런 자세를 갖추고 최대한 인터뷰이와 친밀함을 느끼고, 또 존중을 하기 위해 노력했다. 심지어 중국 기자들 중에서는 능숙하게 한국말이 가능해 간단한 잡담을 곁들여 친숙함을 과시하는 경우도 있었다.



이렇게 포즈만 나와도 기자는 새삼 뿌듯해진다

또한 놀랍게도 중국에서의 LoL 인기가 대단하다는 말을 증명하듯 중국 미디어 관계자들이 어찌나 많았는지, 모든 매체 기자들이 모인 기자실 외에 중국 매체만을 위한 별도의 LPL 라운지가 바로 옆 방에 차려질 정도였다. 인터뷰 시간에도 중국 매체들은 너무나 많아서 한 번에 여러 기자들이 같이 인터뷰를 진행해야 했다. 확연히 줄어든 한국 기자석과 그 반대 급부로 늘어난 유럽, 중국 기자들의 자리는 대회 결과와는 큰 대비를 이뤘다.




현장에서 재미있었던 일들 중 또 하나는 바로 선수 인터뷰였다. 새로운 사람들, 특히나 선망하던 사람들을 만나는건 흥미롭고 신선한 일이었다. 처음 인터뷰에서는 그들을 진짜로 만난다는 생각에 현실감이 다소 없었고, 직접 보고나니 그들의 인간다운 면이, 선수로서의 대단한 커리어 이면에 자리 잡은 그들 또한 젊고 활기찬 또래 친구들이라는 사실이 확 다가왔다.

그날그날 벌어진 경기들 끝에 이루어지는 인터뷰는 개인적이면서도 디테일 했고, 때문에 선수들은 어땠을지 모르지만, 나는 마치 하루 일과를 끝내고 난 사람과 같이 술자리를 가지며 오늘 일은 어땠는지 이야기를 나누는 느낌이었다. 인터뷰가 쌓여갈수록 오히려 그 다음에 이야기 할, 물어볼 것들이 늘어났다. 그들도 우리를 단순한 녹음기나 남남인 기자가 아니라 반가운 손님, 팬으로 맞이해준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리클릿과의 인터뷰, 울프의 인터뷰 사진 포즈 등이 탄생했다.



정언영의 포즈는 그 자신이 직접 제안한 것이었다

마지막 날 밤, 빌 그레이엄 시빅 오디토리움 앞에는 무대 철거를 위해 모인 직원들과 아직까지도 깊이 남은 여운을 즐기는 팬들이 서성이고 있었다. 그들의 염원이던 북미팀 C9의 8강 진출이 이루어진 날이었으니 마치 밀린 숙제를 모두 끝낸듯한 기분이었을 것이다.




드라마가 있어 드라마라 한 것인데 왜 드라마냐 하시면...




이 친구들이 어디까지 갈 수 있을지 정말로 큰 기대가 생겼다

사실 나는 굉장히 많은 프로스포츠를 즐겨 보고, e스포츠 팬일 뿐만 아니라 프로야구와 미식축구, 해외축구의 팬이다. 때문에 이런 스포츠리그에서 생기는 각종 드라마에 익숙하고, 그런 드라마야 말로 프로스포츠로서 e스포츠를 가치있게 만들어준다고 믿고있다.

스포츠리그에서 드라마가 만들어지기 위해서 가장 중요한 것은 다름 아닌 꾸준함이다. 어떤 팀들이 라이벌 관계가 되기 위해선 계속해서 맞붙어 서로가 천적임을 증명해야 하고, 언더독이 혁명을 통해 리그를 뒤집으려면 그런 확고한 역학관계가 이미 자리잡고 있어야 한다. 모든 스포츠리그는 이전의 시즌이 있고, 이후의 시즌이 있을 거란 가정이 있기에 단순한 경기 이상의 재미를 선사한다.







그런 의미에서 월드 챔피언십은 그런 각 리그의 드라마가 모두 모인 총집합이었다. 한국, 중국, 북미, 유럽, 대만, 와일드카드 지역들까지, 각 지역의 진출 팀들은 자기만의 스토리를 가지고 있다. 한국의 삼성 갤럭시, 중국의 IMAY, 북미의 C9 같은 팀들은 모두 진출 과정에서 자기만의 굴곡이 있었다. 그리고 월드 챔피언십에서 그런 굴곡들이 모여서, 이제 거대한 협곡을 이루는 것이다. 그 안엔 전세계 LoL 프로리그의 드라마가 담겨있다.

이번 월드 챔피언십 역시 새로운 드라마를 쓰기 시작했다. 북산의 그림자가 아른거리는 ANX, 북미의 마지막 희망이라는 무거운 짐을 진 C9, 마찬가지로 유럽 최후의 생존자 H2K, 모조리 조 1위로 8강 진출, 그러나 패는 작년보다 많아진 한국의 ROX, SKT, SSG, 조 2위로 2개 팀이 진출한 중국의 RNG와 EDG. 이들 모두 저마다의 스토리가 이어지고 있고, 그것이 시카고에서 끝이 날지, 뉴욕에서 끝이 날지, 아니면 LA까지 이어지게 될지는 모르지만, 각각이 저마다의 선수, 저마다의 팬에게는 최고의 드라마일 것은 틀림이 없다.



다음 이시간까지 안녕!

기자 역시 시카고, 그리고 뉴욕으로 이어질 여정을 앞두고 꽤나 설레는 기분이다. 각각의 도시들이 처음은 아니지만, 여행에서 중요한 것은 어딜 가느냐가 아니라 왜 가느냐라고 했다. 이국 땅에서 벌어지는 월드 챔피언십에 대해 더 많은 이야기를 전달할 수 있길 바라며, 기행기 2부 예고와 함께 어서 짐을 꾸려야겠다. 모두들, SEE Y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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