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사라지는 스탯투자, 깊이를 낳는 자유도가 그립다

칼럼 | 이동원 기자 | 댓글: 54개 |
몇 해 전 어느 날. 인벤의 모 기자는 친구들과의 거나한 우정의 술자리를 마치고 딸꾹거리며 집으로 귀환했습니다. 그리고 언제나 그렇듯 컴퓨터를 켜고 디아블로2를 실행시켰습니다. 몇 날이고 공을 들여 키운 정겨운 93레벨짜리 바바리안을 흐뭇하게 바라보며 카우방을 몇 번 순회한 그는 곧 레벨업의 순간을 맞이하게 되는데…


아이쿠 이런. 손이 미끄러졌나. 눈을 비비고 모니터를 다시 바라본 그의 눈에 들어온 것은 매정하게 올라가있는 마나 스탯. 그렇습니다. 레벨업을 하면 주어지는 5개의 스탯포인트를 실수로 마나에 찍어버린 것입니다. 물론 체력 올인 바바리안이었습니다.


괴성을 지르며 머리를 쥐어뜯은 그가 결국 스탯 잘못 찍은 바바리안 캐릭터를 삭제하고 말았는지, 아니면 술이 웬수다 하고 한동안 술동무를 만나지 않았는지는 그리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의 아픈 과거를 듣고 있던 기자의 가슴에도 그와 똑같은 실수를 저지른 자만이 흘릴 수 있는 동병상련의 뜨거운 눈물이 떨어지고 있었으니까요.





▲ 스탯상조. 2렙 때의 고민, 99렙까지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보장해드리립니다



아마 다들 이런 경험 한 번씩은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스탯을 투자하는 게임에서 느끼게 되는 고민과 고뇌의 순간들, 그리고 실수로 하나의 포인트를 잘못 찍었을 때 하늘이 무너져 내리는 듯한 후회막심의 경험 말입니다.


그런데 문득 생각해보면 최근 온라인 게임들에서는 이런 일이 별로 없었던 것 같습니다. 요즘 게임들은 레벨업을 하면 자동으로 스탯이 올라가거나 또는 아예 능력치 개념이 존재하지 않은 게임들이 주류를 이루고 있습니다. 스탯 포인트 하나에 울고 웃던 시절은 끝나가는 걸까요.


실제로 작년 한 해 클로즈베타나 오픈베타를 통해 공개되었던 국산 온라인 RPG를 조사해본 결과, 유저가 스탯을 직접 결정할 수 있는 시스템을 가진 게임은 전체 34개 게임 중 8개에 불과했습니다. 반대로 스탯이 자동으로 올라가거나 고정되어 있어 스탯 자유도가 없는 게임은 73%나 되었습니다.





▲ 2009년 클로즈 또는 오픈 베타를 진행한 온라인 RPG의 스탯 투자방식 조사결과



최근 게임들에서 스탯 투자를 찾아보기 힘들어 진 이유는 무엇일까요.


가장 먼저 스탯투자를 하는 것에 적든 많든 부담을 느끼는 유저가 많다는 이유를 생각해볼 수 있겠습니다. 2레벨이 되자마자 주어지는 스탯포인트를 어디에 투자해야 하는지는 해당 게임을 처음 접하는 유저들에게 선택이 잘못되었을 경우 어떤 결과가 뒤따라올 것인 것 미리 예측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특히 다른 유저들과의 경쟁이 심한 국산 온라인 게임에서 스탯 포인트를 잘못 투자한다는 것은 큰 실수처럼 느껴지고, 끝없는 레벨업이 예측되는 게임에서 스탯 하나 때문에 처음부터 캐릭터를 다시 키우기 위해 시간을 들인다는 것 또한 부담스러운 일입니다. 차라리 신경쓰지 않아도 되는 자동스탯 방식을 선호하는 유저들은 이런 이유로 존재합니다.





▲ 캐릭터 육성에 '고민'을 할 필요가 별로 없는 게임들이 많아졌다. 이미지는 테라의 캐릭터창



게임사가 스탯 자유도를 제한해 얻는 효과도 있습니다.


스탯투자가 자유로운 경우에는 똑같은 50레벨 전사 캐릭터라고 해도 육성방식에 따라, 힘에 많이 투자했거나 민첩에 많이 투자했거나 하는 식으로 캐릭터의 다양성이 폭넓게 존재합니다. 그리고 개발사는 이런 경우들을 모두 고려해서 게임의 컨텐츠를 만들고 밸런스를 맞춰내야 합니다.


이 때 50레벨에 착용하게 되는 아이템의 성능과 옵션은 어떻게 할 것인지, 50레벨에 주로 사냥하는 몬스터의 속성이나 체력, 공격력은 어떻게 설정할 것인지, 서로 다른 직업 사이의 밸런스는 어떻게 할 것인지까지는 상당히 어려운 일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워낙 다양한 캐릭터가 존재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50레벨 전사 캐릭터가 기본적으로 가지게 되는 힘, 민첩, 체력 등의 수치를 정확히 예측할 수 있다면 ‘신도 못맞춘다는’ 밸런스 작업이 그나마 한결 단순해집니다. 50레벨 전사가 가진 스탯이 정해져있기 때문에 그 레벨대에 획득하는 아이템의 능력치나 옵션, 몬스터의 공격력이나 체력 등의 수치를 정해진 스탯 기반으로 관리할 수 있는 것입니다.


물론 단순히 ‘편하기 위해서’라는 뜻은 아닙니다. 보다 정밀하게 게임의 컨텐츠를 디자인하고, 이런 컨텐츠를 통해 얻을 수 있는 게임의 재미를 보다 많은 유저들이 비슷한 수준에서 폭넓게 즐길 수 있도록 하겠다는 목표에서 스탯의 자유도를 포기한 게임들도 있습니다.





▲ 이를테면 와우. 스탯 투자가 없어도 재밌다



하지만 이런 변화가 마냥 좋은 것만은 아닙니다. 스탯의 자유도를 포기하면서 함께 사라지는 재미요소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선은 스탯과 관련된 커뮤니티입니다. 스탯을 투자해야 하는 게임에서는 스탯에 대한 유저들의 이야기가 상당히 활발하게 일어납니다. 어떤 스탯을 찍어야 하는지 결정하는 것이 부담되는 일인만큼 다른 유저들과의 정보교류를 통해 해답을 얻을 필요가 생기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어진 5포인트를 2-2-1로 투자하느냐 1-2-2로 투자하느냐 아니면 힘4 체1로 투자하느냐. 홀수 레벨 때와 짝수 레벨 때 어떻게 구분해서 투자하느냐 하는 식의 채팅들을 흔히 볼 수 있었습니다.


다양한 의견과 논리, 그리고 이에 대한 반박과 새로운 방식에 대한 이야기들. 게임사가 제공하는 컨텐츠를 그저 일방적으로 소비하고 마는 것이 아니라, 유저들 사이에서 오고 갈 수 있는 이야기 거리들이 중요한 재미요소인 ‘온라인’ 게임에서 스탯 투자 방식은 이처럼 커뮤니티 활성화에 기여하는 역할을 톡톡히 합니다.





▲ 선택의 기로. 고민. 그리고 상담과 결정의 과정을 거친 캐릭터이기 때문에 더욱 애착이 간다



또 하나는 캐릭터 육성의 다양성이 사라지는 부분입니다.


내가 키운 50레벨 전사와 남이 키운 50레벨 전사가 별반 다를 것이 없는 것이 요즘 온라인 게임들입니다. 이는 곧 남들과 다른, 남들보다 더 나은 캐릭터를 갖고 싶다는 온라인 게이머의 원천적인 욕구에 반하는 현상입니다.


물론 캐릭터의 몰개성화는 스탯 때문만은 아닙니다. 레벨에 따라 정형화된 아이템, 누구나 비슷하게 찍을 수밖에 없는 스킬 등이 함께 어우러지면서 다양성이 사라지게 됩니다. 그래서 스탯 만의 문제는 아니라고 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스탯을 자유롭게 찍을 수 있었던 게임에서는 상대적 좀 더 다양한 캐릭터들을 볼 수 있었던 것이 사실입니다.


예를 들어 디아블로에서는 스탯을 어떻게 찍을 것이냐 하는 것은 굉장히 중요한 문제여서, 아이템의 옵션과 스탯 요구치를 미리 생각해서 1포인트까지 정확하게 투자하면서 캐릭터를 키워냈습니다. 그리고 스탯과 어우러진 다양한 아이템 세팅으로 같은 소서리스라도 마나를 잔뜩 투자한 캐릭터도 가능하고 민첩을 올려 물리공격을 회피하는 세팅의 소서리스도 가능했습니다.


라그나로크에서도 기사 직업을 육성할 때도 어떤 스탯을 주력으로 투자하느냐에 따라 아이템 세팅이나 주요사냥터가 달라지는 모습을 볼 수 있었습니다. 양검어질기사, 럭기사, 광크리기사, 마검기사 등 라그나로크를 해보지 않은 유저가 듣기에는 마치 서로 다른 직업처럼 보이는 단어들이 실은 스탯을 민첩에 찍느냐 행운에 찍느냐 같은 식의 서로 다른 육성방식의 호칭인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캐릭터 육성과 관련된 커뮤니티, 깊이 있는 연구의 가능성이라는 재미요소가 한정된 컨텐츠를 더욱 오래동안 즐길 수 있도록 만들어 준다는 것입니다. 최근 온라인 게임들의 스탯 투자 방식의 삭제는 그런 면에서, 자연적으로 발생되는 컨텐츠의 선순환을 스스로 포기하고 있는 듯한 기분마저 듭니다.





▲ 하나의 기사 직업이 이렇게 다양하게 분화되고, 또 연구될 수 있다



물론 스탯이 자동으로 올라가거나 없는 게임이 재미없거나 게임성이 부족하다는 뜻은 아닙니다. 스탯 없이도 아이템이나 스킬 등 여러 가지 다른 시스템들과 환경적 요소들이 뒷받침되면서 다양한 커뮤니티와 깊이 있는 캐릭터 육성의 재미를 주는 게임들도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올드게이머의 입장에서, 그저 시키는대로 퀘스트나 하면서 레벨대 마다 주어지는 아이템을 차고 정해진 사냥터에서 사냥만 하다보면 어느덧 레벨제한에 도달할 수 있는 게임들을 보면, 이제는 시간의 흐름에 따라 점차 보기 힘들어지는 ‘자유로운 스탯세팅’에 대한 향수가 깊어지는 것은 어찌할 도리가 없는 것 같습니다.


육성의 재미를 높이고 좀 더 깊이 있는 연구가 가능한, 캐릭터 육성의 자유도를 유저의 손에 돌려주는 게임이 좀 더 많아질 수는 없을까요.





▲ 물론 모든 게임이 파이널판타지의 스피어반 시스템처럼 복잡한 성장방식을 가질 필요는 없겠지만... 거대한 윷판에 어느 지점을 거쳐가느냐에 따라 스탯이나 스킬을 배울 수 있는 파이널판타지 10의 독특한 성장시스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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