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걷잡을 수 없는 '스노우볼' - 한국 게임산업이 중국에 '흡수'된다면

칼럼 | 길용찬 기자 | 댓글: 162개 |




중국 스마트폰 시장 격변이 전세계에서 화제다. 오래도록 점유율 1위에 군림할 것 같았던 삼성전자는 지난 여름 왕좌에서 물러나야 했다. 샤오미와 레노버 등 중국 강호들의 약진에 자리를 내주면서 4위 자리까지 떨어진 것. 멈출 줄 모르고 뻗어나가던 삼성이 중국에게 한 걸음 밀려나는 모습은 많은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중국의 급성장'은 이미 낡은 단어가 되었다. 중국은 이미 거인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들의 최전선 중 하나가 바로 게임산업이다. IT인력 활용의 집약체이기도 하거니와, 최신 기술들이 각축을 벌이는 미래 중심사업이다. 동시에 한국의 콘텐츠를 짊어지고 있는 가장 큰 축이다. 그래서 서둘러 자각할 필요가 있었다. 칼 끝이 목덜미에 닿기 시작했다는 것을.

중국을 의식한 지는 꽤 되었다. 하지만 이렇다 할 대처는 없었다. 커지더라도 위협적인 존재라는 생각이 들진 않았다. 한국 게임사들이 진출할 시장이었고, 실제로 중국 진출이 대성공을 거두면서 수많은 수익을 올리기도 했다. 중국이 커질수록 황금 역시 커진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두 국가가 섞여가면서 벌어질 미래는 그렇게 순탄치만은 않아 보인다.

한국 게임산업은 중국에 따라잡힌 것이 아니다. 이미 추월당해 있었다. 그렇게 슬픈 일도 아니다. 물리적으로 막을 수 없는 일이었으니까.

대신, 자각하고 대처해야 할 테마가 새로 생겼다. 앞으로 펼쳐질 시나리오는 '흡수'다.




▲ 차이나조이 2014 텐센트 부스


■ 처음부터 밀렸고, 따라잡을 수 없는 - 자본, 노동력

'스노우볼'은 국내에서 가장 사랑받는 게임 '리그오브레전드(LoL)'로 인해 정착된 표현이다. 눈덩이를 굴린다는 우리말 표현과 활용법도 똑같다. 근처 눈을 흡수해 덩치가 늘고, 커져가는 속도는 갈수록 빨라진다. 조그맣게 굴리기 시작한 눈덩이가 사람만큼이나 커지는 것은 순식간이다.

중국은 압도적인 내수 시장과, 더욱 압도적인 인력을 가졌다. 그 자원을 바탕으로 자본을 쌓았고, 해외까지 스노우볼을 굴리기 시작했다. 대표적 주자는 LoL을 인수하기도 한 텐센트다.

1998년 설립한 텐센트는 메신저와 온라인게임으로 사업을 시작했고, 포털과 모바일 등 인터넷 전반으로 사업 영역을 넓혔다. 텐센트의 2012년 매출액은 439억 위안(약 7조 900억 원), 순이익은 123억 위안(약 2조 2,00억 원)이었다. 8조 원에 달하는 텐센트 매출 중 절반인 4조 원이 게임이었다. 그리고 결국 2013년, 텐센트의 매출은 10조 원을 돌파했다.

10년 전 맨발로 한국 기업을 찾아다니며 중국 진출 러브콜을 보내던 텐센트는, 이제 쇼파에 앉아 커피를 마시며 투자 오디션을 개최해도 될 만큼 거대해졌다.




▲ 텐센트의 최근 분기별 매출, 1년 만에 30억 위안이 늘었다 (도표 출처: 한국콘텐츠진흥원)


이전에도 중국 자본이 한국 게임에 투자하는 일은 흔했고, 환영할 만한 일이었다. 문제는 액수의 단위가 매 해 무서워진다는 것. 올해 3월, CJ게임즈와 체결한 5,300억 원 투자 계약은 텐센트의 현재 스케일을 말하는 상징과도 같았다. 라이엇게임즈와 에픽게임스의 지분을 인수하면서 최대 주주에 올랐고, '몬스터헌터 온라인'을 합작하고 '콜오브듀티 온라인'을 단독 배급하게 되면서 차후 라인업도 막강하게 갖췄다.

멀리 갈 것 없이 한국 최대 모바일 플랫폼인 카카오에도 720억을 투자했고, 카카오와 다음의 합병이 이루어진 결과 다음카카오의 2대 주주는 텐센트가 되었다. 한국시장을 공략하는 데 이보다 좋은 교두보가 있을까. 그밖에 파티게임즈에도 200억을 투자하는 등 한국의 유력 게임사들에게 가장 큰 손으로 이미 자리잡았다.

텐센트 하나만으로도 매머드급 폭풍을 일으키고 있지만, 심지어 텐센트가 전부도 아니다.

중국 최대의 전자상거래 업체 알리바바는 올해 초 모바일게임 플랫폼 사업 진출 계획을 다졌고, 4월에 공식 한국 법인을 세우면서 본격적으로 시동을 걸기 시작했다. 뉴욕 증시 상장만으로 무려 23조 원을 거머쥔 알리바바는 한국의 유력 모바일게임 업체들을 상대로 투자 혹은 인수를 모색하고 있다.

그밖에 추콩, 쿤룬, 샨다게임즈 등 거대 공룡들은 이미 국내에 빠르게 자리를 잡아가는 상황. 중국 자체의 자본도 강력하지만, 그 뒤에는 정부 단위의 화끈한 지원도 있었다. 2000년대 중반부터 '녹색 게임문화 정책'을 발표하면서 전폭적인 지원을 퍼부었고, 올해 발표한 바로는 상하이자유무역지구에 콘솔 게임시장이 개방되면서 본격적인 승부에 들어갈 전망이다.




▲ 차이나조이 2014, 텐센트 부스에 입장하려는 엄청난 인파


마치 기름칠한 것처럼 게임산업으로 재원이 술술 흘러들어갔다. 매년 30%가 넘는 성장률을 기록했고, 2007년 온라인게임 성장률은 무려 70%에 달한다. 같은 시기 중국 GDP 성장률이 7.8% 수준인 것을 고려할 때 엄청난 급성장이었다. 온라인게임 매출은 2010년, 이미 44억 달러를 돌파한 상황이었다.

중국 온라인게임의 2012년 시장규모는 약 10조 원으로, 이 시점부터 한국 게임산업 규모를 추월하기 시작했다. 또한 중국의 유력 연구기관들은, 2015년에 이르러 총 시장규모가 948억 위안(16조 2천억 원) 수준으로 확대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물론 돈만으로 훌륭한 작품을 만들어낼 수는 없다. 하지만 자본 하나로 굴리기 시작한 눈덩이는 점점 커진다. "사랑? 이제 돈으로 사겠어!"라고 말하듯, 지금 중국은 무엇이든 사기 위한 플랜을 짜고 있다. 경쟁 국가를 반드시 이겨서 짓누를 필요가 없다. 흡수하면 그만이다. '지분'이라는 이름으로.





▲ 중국의 개발력 자체도 이제 무시할 수준이 아니다


■ 앞선다고 생각했지만, 앞서지 않는 요소 - 기술력, 경험, 그리고 창의력

게임산업의 규모로 중국이 앞서게 되는 것은 당연하다. 아무리 노력하더라도 아이유가 팔씨름으로 효도르를 이길 수는 없는 법. 대신 창작물로 이겨왔고, 이길 수 있다고 모두가 자신했다. 중국의 자체 개발력과 게임 노하우는 우리를 따라오지 못한다고.

과연 앞으로도 그럴까.

중국 게임에 찍힌 낙인이 있었다. '카피캣'과 '해적판'. 사실 그랬다. 해외 인기작을 본딴 게임이 쏟아졌다. 심지어 아예 똑같이 만들어 자국 내에서 정식 라이센스를 받는 경우도 있었다. 이런 현상은 현재진행형이다. 그동안의 자국 개발은 웹게임 위주였고, 온라인게임 개발력은 분명 모자랐다. 조금 얕잡아보는 것도 이상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 기준을 우리에게 가져온다면.

질문을 던져보자. 최근 몇 년 동안 '신선하다'고 할 만한 국산 게임이 몇이나 있었을까. 모바일게임이 대세로 떠오른 이후, 국산 신작 중 다수는 카피캣 논란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적은 비용으로 많은 게임을 만들어내면서 도용과 표절 이슈도 급증하기 시작했다.

기술력과 경험은 돈으로 살 수 있다. 사람에게서 나오기 때문이다. 창의력의 경우에는 조금 다르다. 백 가지 준수한 아이디어보다 최고의 아이디어 하나가 훨씬 낫기 때문. 게임사들이 새로운 도전을 꺼리는 사이, 창의력이라는 가장 중요한 무기가 사라져 있었다.

흔히 붙는 '중국 게임치고 괜찮다'는 수식어가 이제는 그냥 '괜찮다'까지 짧아졌다. 퍼펙트월드가 개발해 한국에 진출한 '소오강호'만 해도, 물론 평가는 갈리지만, 우리가 비웃고 무시하던 그 중국 게임의 수준은 아니었다. 적어도 근래 나온 중규모 MMORPG와 같은 기준에 놓고 비교 대조할 정도가 되었다.

텐센트와 액티비전 상하이가 합작한 '콜오브듀티 온라인'을 올해 차이나조이에서 만났다. 알파 버전인데도 생각 이상이었다. 연식이 좀 된 명작 '모던워페어2'를 기반으로 만들었지만 그동안의 중국 게임과는 차원이 다른 퀄리티를 체험할 수 있었다. 최소한 현재 서비스되는 한국 온라인FPS들에게 글로벌 시장에서 밀릴 이유는 보이지 않았다.

차이나조이2014 '콜오브듀티 온라인' 플레이 촬영 영상


현재 국내 게임산업은 중화권과 동남아 등지에서 눈부신 수출액을 달성했지만, 다른 지역으로 확장되는 과정에서 어려움을 겪고 있다. 세계 최고의 게임들이 경쟁하는 무대에서 두각을 보이지 못하고, 스팀이나 콘솔 등 글로벌 플랫폼에서도 불모지 취급받고 있는 상황이다. 한국 시장은 '굳이 새로움을 생각하지 않아도 되는 환경'에 안주하고 있었다.

양은 이미 압도적인 상황에서, '질도 그렇게 나쁘지 않다'고 공인되는 어느 한 순간이 온다. 그때는 알아차려도 늦다. 돌이킬 수 없을 것이다.





▲ 중국 게임시장의 현재 상승세와 미래 전망은 무시무시한 수준 (도표 출처: 한국콘텐츠진흥원)


■ 부메랑처럼 돌아올 '스노우볼' - 중국 자본이 국내 게임을 잠식할 경우

시나리오를 짜보자. 중국 자본에 흡수된 국내 게임계는 과연 디스토피아일까.

중국의 투자를 부정적으로만 바라볼 수는 없다. 그것은 자본의 법칙을 생각하기 이전에, 인간적인 도리에서 너무나 미안한 일이다. 국내 투자자들의 규모가 눈에 띄게 줄었다. 남은 투자금마저도 이름값 있는 소수에게 돌아가거나, 리스크 없이 대박을 노릴 수 있는 게임을 양산하는 데에 쓰일 뿐.

중국의 수많은 거금은 이 시점에 들어왔다. 엎어졌던 프로젝트가 다시 시작됐고, 개발자들은 간신히 분유값을 충당하기도 했다. 수많은 신진, 혹은 영세 업체에게는 생계가 달린 금액이다. 사막 한가운데에서 죽어가고 있는데 누군가가 물병을 건네준다면, 그 사람이 어디 소속이고 무엇을 바라고 하는 정보 따위가 중요할까. 일단 마셔야 목숨줄을 붙일 수 있다. 다른 모든 것은 나중에 생각할 일이다.

그렇다고 중국에 인수된 기업들이 국내 개발자들을 홀대하는 것도 아니다. 대부분의 경우 기존과 차이 없는 대우를 하고 있고, 오히려 몇몇은 한국의 중견 게임사들보다 높은 연봉과 복지 수준을 자랑하기도 했다. 인수 이후 조건이 좋아졌다는 개발자의 말도 들었다.




▲ 매년 차이나조이가 개최되는 상하이 신국제엑스포센터


물론 "우리가 어딜 봐서 그렇다는 거냐"고 항변할 직원들도 있을 거다. 맞다. 하늘 아래 게임사는 별처럼 많고, 그 속에서도 팀마다 분위기와 환경이 전부 다르므로 섣불리 일반화하면 안 된다. 다만 한 가지 확실한 점은 있다. 한국 게임사들은 절대 중화권보다 우월한 근무 환경이 아니라는 것.

결국은 일선 개발자들에게 무엇 하나 나빠질 것이 없다. 자금 회전이 말라가던 지금 상황에서는, 중국 자본에게 고개숙여 감사를 표해도 지나치지 않다. 가장 큰 딜레마다.

자본의 유입이야말로 전형적인 스노우볼이다. 처음 조금씩 지분을 만들어가다가 눈 깜빡하는 사이 엄청난 규모가 굴러들어온다. 10억 단위가 100억이 되기 시작하면, 몇백 억과 조 단위로 늘어나는 것은 순식간이다. 정신차려 보면 국내 유수의 개발사들을 이미 중국이 소유하고 있는 것이다.

고급 인력과 기술은 차츰 중국으로 흘러들어갈 것이다. 고등 교육을 받고 기술을 전수받는 중국 내 인재가 점점 많아질 가능성이 높다. 중국이 자본과 인력이라는 거대한 눈밭 속에서 덩어리를 만든 끝에, 마침내 기술력과 창의력까지 얻어 전세계에 진출하게 되는 시나리오다.

스노우볼의 마지막은 어떤 모습일까. 거기까지 예측은 불가능하다. 그때 국내 게임의 목숨줄은 중국의 선택에 달렸으므로. 오히려 르네상스가 열릴 수도 있고 하청업체 정도의 위치에서 만족해야 할 수도 있다. 어느 결과가 나타나든, 게임의 과실을 따먹는 것은 한국이 아닐 가능성이 높다.





▲ 국내 독립 스튜디오에서 개발해 TGS 인디스트림 어워드 '베스트 아트상'을 받은 '룸즈: 불가능한 퍼즐'. 이런 밑거름이 많이 필요하다


■ 밀리지만, 개선해야 하는 근본적 요소 - 인식, 그리고 환경

게임과 비슷하게 '노동집약적' 문화 콘텐츠로 분류되는 산업으로 영화가 있다. 영화의 예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한국 영화는 어떻게 세계에서 각광받을 수 있었을까. 여러 분석들이 있지만, 보호정책과 문화적 접근이 적절하게 어루어져 성장한 사례라고 보는 것이 타당해 보인다. 국적을 떠나 '재미있고 질 좋은' 영화를 제공할 수 있게 되었고, 거기에 소비자들은 보답한 것이다.

가장 중요한 요소는 내수 시장의 소비력이다. 한국 영화산업은 기꺼이 돈을 내고 극장을 찾는 국민적 문화가 완벽하게 정착됐다. 2013년 국내 최초로 전체 영화 관객이 2억 1천만 명을 넘어섰고, 한국영화만 한정해도 약 1억 3천만 명을 기록하는 쾌거를 이뤘다. 역대 흥행 1위를 갱신한 '명량'의 관객 수는 28일까지 1759만 명. 국내 인구를 5천만 명으로 봤을 때 2.8명당 한 명이 상영관을 찾은 셈이다. 자국영화 시장 점유율 60%라는 적정선을 지키면서 새로운 작품과 인재가 커나갈 수 있기도 했다.

영화계도 마찬가지로 최근 중국영화의 자본과 노동력이라는 공룡에 먹히지 않을까 하는 우려가 곳곳에서 나오고 있다. 소규모 영화사와 영화인들의 처우 문제 역시 아직 숙제다. 하지만 위와 같은 원동력이 건재하면서 내수를 바탕으로 최소한의 선을 유지할 전망이다.

게임계는 이 소비력에서 밀린다. 리스크 대비 돌아오는 수익이 적다. 새로운 도전이 줄어들었고, 게임으로 수익을 얻을 폭이 좁아졌다. '돈 되는 게임 종류'가 한정되니 값싼 카피캣이 늘어나기 시작했고, 투자자의 입김은 강해졌다. 창작의 기본이 되어야 할 '인디게임' 시장은 말라버린 지원 속에 힘겹게 소규모로 유지되고 있다. 어느 문제가 먼저였는지는 모르겠지만, 악순환에 접어든 것은 확실하다.



▲ 중국은 최근 게임 굿즈 판매량을 통해서도 시장 구매력을 증명하고 있다.


중국 정부는 판호 정책을 통해 자국의 게임산업을 적극적으로 보호하고 있었다. 해외 게임을 중국에서 서비스할 수 있는 '판호'를 얻으려면 반드시 중국 게임사와 협력해야 하는 것. 그래서 한국 등 해외 게임이 중국에서 선풍적 인기를 끌 때도 그 수익을 온전히 바깥에 내주지 않았다. 그 안전망 속에서 막 시작한 기업들이 광합성하듯 따뜻하게 자라났고, 그동안 제도적 지원이 미비했던 한국은 이제 우리 보호를 걱정해야 할 시기가 왔다.

물론 중국처럼 글로벌 시대에 역행하는 철저한 보호정책을 쓰자는 말은 아니다. 하지만 어느 정도의 제도적 정비는 반드시 필요하다. 단순히 지원 특혜를 늘리는 것에서 그칠 것이 아니라, 지원된 예산이 게임인들에게 적절히 분배되고 사회적 인식 개선에도 사용될 방법을 찾을 수는 없을까.

질적 향상을 위해서는 최종적으로 PC와 콘솔 등 플랫폼 다양화 역시 중요하다. 그것이 이루어지려면 필수 조건이 두 가지 있다. 첫째는 '게임을 완성해 출시했을 때, 팔린다는 믿음', 다른 하나는 '게임을 구입하면 더 질이 좋은 게임을 제공할 것이라는 믿음'. 두 믿음은 서로 순환된다.

지금은 전형적인 악순환이다. 이것이 선순환으로 돌아서야 한다. 여타 산업과는 달리 자본과 기술만으로 모든 것이 결정되는 시장이 아니다. 게임이 '문화예술 콘텐츠'이기에 가능한 희망이다.





▲ 게임개발자연대 설문조사에 그려진 한국 개발자의 일상


■ 해답은 언제나 가깝고, 뻔하다 - 그렇기 때문에 어렵다.

게임개발자연대가 2013년 8월 발표한 게임산업 종사자 설문 결과에 따르면, 응답자 34.7%가 급여 체불 경험이 있었고 그중 52.8%만이 체불된 임금을 돌려받았다. 그리고 하루 평균 3시간 이하의 야근을 하는 사람이 전체의 84%에 달했다. 게임회사에 근무한다는 이유만으로 주변에서 부정적인 반응을 접했다는 응답만 56.3%였다.

이제 막 업계에 들어온 20대 개발자를 가정해보자. 최저 연봉을 간신히 맞춘 수준에서 어쩔 수 없는 야근이 반복된다. 연애라도 하려면 시간이나 돈이 좀 있어야 할 텐데, 둘 다 모자라다. 신작 하나마다 사운을 걸어야 하는 분위기에서 내가 만들고 싶은 게임은 절대 나올 가능성이 없다. 어디에 취업했느냐는 주변 어른들의 물음에 게임회사라고 답할 때마다 어색한 반응이 돌아오곤 한다. 매달 연금까지 꼬박꼬박 납부해야 하는데, 앞으로를 살펴보면 이걸 언제쯤 얼마나 타먹을 수 있을지 한숨만 나온다.

말이 길었다. 가야 할 길을 한 마디로 정리하자면 결국 '시스템'의 재편이다. 지금의 인식과 시장 분위기, 그리고 근무 여건이 이어져서는 고급 인재가 성장할 수 없다. 경쟁력 약화는 물론이다.

개임의 사회적 인식 개선, 개발자 근무 환경 개선, 다양한 장르와 아이디어 개발, 내수 시장의 선순환... 합쳐놓으면 참 뻔한 말들이다. 하지만, 뻔해서 더 힘들다. 이 문제들을 어떻게 해결할지 이 자리에서 답하기는 힘들겠다. 비단 게임계뿐 아니라 사회의 근본적인 청사진을 건드리고 있기 때문이다.



▲ 국내 콘텐츠 산업 수출을 짊어지다시피 했지만, 게임을 향한 인식은 아직 차갑다.


우선순위 정도는 파악할 수 있겠다. 국내 게임사가 먼저 나서기는 힘들다. 지금 시장에서는 잘못된 선택 한 번으로 기업이 휘청거리는 상황이 생기기도 한다. 유저들에게 먼저 행동을 촉구하는 것도 말이 되지 않는다. 적극적 구매욕을 느끼는 상품이 제공되지 않는데, 소비자에게 억지로 활동하고 돈을 쓰라는 건 또 다른 폭력이다.

답은 하나만 남는다. 정부가 먼저 나서서 자체 경쟁력을 가질 수 있게 제도를 마련하는 것뿐. 중국 자본에 흡수될 때 가장 타격을 입는 쪽이 정부이기도 하다. 그 첫 번째 열쇠부터 만들어지지 않았다. 최근 국정감사와 정책토론회 등 일련의 기록을 돌아보면, 정부와 국회는 게임을 어떻게 보느냐에 앞서 현시대 게임이 가진 기본 개념부터 파악하지 못했다.

당연하게도 게임산업진흥법 등 토대가 되는 법안 역시 아직 부실하다. 최근 새정치민주연합 박주선 의원이 제기한 스팀 등급분류 문제는 정치권 역시 게임콘텐츠의 최신 트렌드를 이해하지 못한다는 현실에서 출발한다. 세계 게임계의 플랫폼과 시스템은 빠르게 변화하지만, 국내 게임법은 그 실정에 뒤처져 있다. 국내 게임이 재미와 내실을 갖추고 세계 다양한 플랫폼에서 경쟁하려면 그런 지원이 절실하다. 자금과 함께 제도 지원이 함께 이루어져야 하는 일이다. 게임과는 약간 엇나간 주제지만, 문화 교육 활성화와 저출산 문제 해결도 미래 창의적 인력 유입을 위해 반드시 필요하다.

게임사들도 정치계에 적극 참여할 필요가 있다. 많은 이들이 정치가 더럽다고 생각하지만, 사실 인간이 먹고 사는 문제와 산업의 흥망은 언제나 정치가 중심에 있다. 게임 규제가 목을 죄여올 때도, 게임중독법 논란으로 시끄러운 와중에도 대형 게임사들은 공식 석상에서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법의 부당함을 분석하고 알리는 작업은 대부분 소수 개발자 및 지식인과 유저들에 의해 이루어졌다.

사회에 진실된 목소리를 내고, 게임계 모든 분야의 사람들이 모여 연구하는 시간을 가졌으면 한다. 시스템은 몇 사람의 힘으로 바뀌지 않는다. LoL에서 상대의 스노우볼을 저지하기 위해서는 시야 확보에 투자를 아끼면 안 된다. 이제는 우리만의 스노우볼을 새로 만들 때가 된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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