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칼럼] 전투력 측정기와 게임의 재미 인지

칼럼 | zerasion 기자 | 댓글: 11개 |



인벤에서는 zerasion님이 작성한 '전투력 측정기와 게임의 재미 인지' 칼럼을 소개해 드립니다. zerasion님은 현재 파워블로거로 활동하며, 다양한 리뷰와 칼럼 등을 기고하고 계십니다.

또한, zerasion님은 현직 게임업계 기획자로서 다양한 장르의 게임과 플랫폼에 관심을 갖고 있습니다. 드래곤볼에 등장하는 전투력 측정기를 게임의 재미 인지 능력과 비교한 재미있는 칼럼을 지금부터 소개합니다.


* 본문은 zerasion님의 개인적인 의견이며, 본지의 성향과 다를 수 있다는 점을 미리 알려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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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막 서른이 된 내가 초등학생(당시 국민학생)이던 시절, 학교 앞 문방구에서는 유명 컨텐츠를 이용한 카드 게임이 유행처럼 번지고 있었다.

'스트리트 파이터2'가 한창 인기몰이를 하던 시절이라 스트리트 파이터 캐릭터 카드가 여기 저기에서 판매되고 있었는데, 이 때 가장 인상깊었던 시스템이 바로 아래 그림과 같은 "전투력 측정" 시스템 이었다.



▲ 스트리트 파이터 카드의 전투력 측정 시스템 (사진출처 - zerasion 홈페이지)


카드 뒷면에는 노란 바탕에 의미를 알 수 없는 검은색 부호가 그려져 있고, 뒷면이 앞으로 오게 해서 전투력 측정기에 카드를 집어 넣으면 디지털폰트로 전투력 수치가 나타나게 되는 방식이다.

사실 카드를 자주 접하다보면 디지털 폰트로 88이 새겨진 측정기에서 검은 부분을 가려 숫자를 표현하는 방식이란 걸 쉽게 알아차리게 된다. 엘리베이터나 지하철 개찰구의 디스플레이에서 흔히 봐오던 방식이기 때문이다. (물론 당시의 지하철 개찰구에는 전자식 디스플레이가 없었지만..)

위 사진과 같은 스트리트 파이터 방식의 카드가 이후로 몇 종의 카피캣을 양산하긴 했지만, 다른 쪽에서는 드래곤볼을 소재로 한 카드에서 원작 설정과 느낌에 충실한 "스카우터"를 이용한 전투력 및 암호문 전달 방식이 사용되기도 했었다.

이 스카우터는 붉은 색의 플라스틱 재질로 만들어졌는데, 스카우터를 통해 카드의 글자나 전투력 부분을 보면 같은 계열색의 문자가 가려지고 일부만 보이게 디자인되어 있었다.

앞서 설명한 스트리트 파이터 카드의 경우와 비교해볼 때, 같은 전투력을 측정하는 데에도 전혀 다른 매커니즘이 사용되기도 했었다는 말이다.



▲ 드래곤볼 카드 게임의 스카우터 (사진출처 - zerasion 홈페이지


뜬금없는 발상 전개지만, 문득 이 전투력 측정 시스템이 플레이어가 게임을 바라보는 시선, 일종의 리뷰 점수 산정 방법과도 비슷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를테면, 아래 벤다이어그램처럼 말이다.




▲ 재미 인지 벤다이어그램 (이미지출처 -zerasion 홈페이지)


위 그림의 알파벳 영역은 각각 다음 내용을 의미한다.

A. 플레이어가 기대하는 게임의 재미

B. 개발자가 의도한 게임의 재미

C. 실제로 플레이어가 인지한 게임의 재미


게이머들에겐 어떤 게임을 접할 때 플레이 해보기 전, 그 게임에게 기대하는 재미 요소가 있기 마련이다. 플레이 해보기 전에는 알 수 없지만 막연하게 기대되는 어떠한 재미의 경험. 하지만 그런 기대 요소는 게이머 각자의 경험과 취향에 따라 천차만별로 나뉘게 된다.

개발자들의 의도 역시 마찬가지다. 플레이어들이 이 게임을 어떻게 느낄지 알 수 없기 때문에, 어디까지나 추측이나 자신들의 경험을 토대로 플레이어들에게 어떠한 재미를 경험을 선사해주기 위한 다양한 의도를 게임에 녹여넣는다.

그렇게 불확실한 게이머의 기대와 개발자의 의도가 만났을 때, 정확히 부합하는 결과물이 나올 가능성은 생각보다 높지 않다고 생각한다.

이를 앞서 예로 들었던 카드 게임의 전투력 측정 시스템과 맞물려 생각해보면 각각을 다음과 같이 짝 지어볼 수 있을 것이다.

A. 플레이어가 기대하는 게임의 재미 = 전투력 측정기
B. 개발자가 의도한 게임의 재미 =카드에 그려진 암호 코드
C. 실제로 플레이어가 인지한 게임의 재미 =측정기에 넣었을 때 표시되는 전투력 수치

그러니까, 스트리트 파이터 카드를 측정기에 넣었을 때 기대치보다 낮은 전투력이 나오는 정도가 아니라 애초에 드래곤볼의 스카우터로 스트리트 파이터 카드의 전투력을 측정하면서 "도무지 이게 뭘 의도하는건지 모르겠다!"고 반응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예시의 상황처럼 명확하게 구분되는 결과라면, 스카우터로 스트리트 파이터 카드를 측정하려고 한 사용자가 잘못했다고 말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게임의 재미라는 건 위의 예처럼 명확하게 구분지을 수도 설명할 수도 없는 개개인의 감정적인 판단의 영역이기에, 맞고 틀리고라는 기준을 세워 판단할 수는 없다.

재미의 많고 적음을 논하기에 앞서, 일단 재미라는 것 자체가 인지되는지 아닌지에 대한 판가름이 먼저 되야하지 않을까? 기대와 의도를 정확하게 일치시키려면(불가능에 가깝긴 하지만) 크게 두 가지 방법을 생각해볼 수 있을 것 같다.

1. 벤다이어그램의 A를 B쪽으로 옮긴다: 플레이어의 기대치를 개발자의 의도에 맞게 이끈다.
2. 벤다이어그램의 B를 A쪽으로 옮긴다: 개발자의 의도를 플레이어의 기대치에 맞춘다.

1 번의 경우는 "이 게임은 이러이러한 재미를 유도하고 있으며 이러이러한 것이 특징입니다!"라고 말하는 대~부분의 게임 마케팅에서 사용되는 방식이다. 효과가 없진 않지만 만성 면역에 가까운 느낌이랄까? 실효성이 썩 좋지는 않은 느낌이다. 그리고 이끄는 범주가 "혹여나 발생할 오해를 방지하는 수준"이라면 상관 없겠지만, "게이머의 기본 성향을 바꿔야 하는 수준"이라면 당연히 가능할 리 없을 것이다.

비교적 효과적으로 이를 해결할 수 있는 부분은 "장르"라는 일종의 "암묵적 약속"을 활용하는 것인데, 장르의 이름을 플레이어들이 예측할 수 있는 것들로 지어두면, 플레이어의 기대치를 적정 수준으로 가이드하는 효과를 볼 수 있다.

장르를 활용하는 방식이 갖는 몇 가지 단점이 있다면, "애초에 장르만 보고 접근하지 않는 게이머층"이 생긴다는 점이고, 또 하나는 "기존 장르로 설명할 수 없는 재미 요소를 부각하려면 오히려 난해한 조합어만 만들어질 뿐"이라는 점이다. 잘못된 장르명 선택으로 애초에 오해를 사는 케이스는 따로 언급하지 않기로 하겠다. (...)

게임을 포함한 여타 다른 문화 컨텐츠 분야에서 사용되는 "B급"이라는 용어가, 아마 이 부분을 가장 함축적으로 나타내주는 말이 아닐까 생각한다.

2 번의 경우가 일반적으로 상용 게임을 개발하는 개발자들이 많이 시도하는 방식일 것이다. 이를 위해 개발자들은 플레이어의 기대치, 즉 니즈와 트렌드를 파악하고 있어야 하며 성공할 경우 효과도 좋은 편이다. 다만 이 경우는 너무 많은 개발자(또는 개발사)들이 유행에 치우쳐 레드 오션이 형성되고, 앞서 흥행한 성공작을 벤치마킹이라는 이름으로 카피하게 되는 시장의 양적 포화와 질적 저하를 동시에 가져온다는 치명적인 단점을 가지고 있기도 하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업계 각측에서는 사회학이나 인류학, 그리고 심리학의 영역으로까지 연구 범위를 확대해서, 사람들이 보편적으로 갖고 있는 기저 심리를 자극할 수 있는 "게임이 갖는 근본적인 재미와 인간의 욕구 사이의 연결고리"를 찾으려는 시도가 이루어지고 있다.

GDF라는 개발자 포럼에서도 최근 들어 "자이가닉 효과"나 "아포페니아"와 같은 심리적인 영역에 대한 연구 사례가 공유되고 있기도 하다.

"자이가닉 효과"에 대한 포스트: [링크] 자이가닉 효과와 퀘스트 로그
"아포페니아"에 대한 포스트: 울티마 온라인의 리소스 시스템

우리는 '어느 한 쪽이 나머지 한 쪽에게 일방적으로 맞추는 것'을, 흔히 "끌려간다"라고 표현한다.

플레이어의 기대치를 개발자의 의도에 맞게 이끄는 것은 결국 플레이어가 끌려가는 것과 같은 말이고, 개발자의 의도를 플레이어의 기대치에 맞춘다는 것도 결국은 개발자가 끌려간다는 것과 같은 말이 될 수 있다.

위에서 말한 "재미를 동기화하는 것(Syncing Interest)"은 결국 플레이어와 개발자 간의 "조율"을 가장 아름다운 그림으로 가정하고 있었다.

플레이어가 자신의 취향에 맞는 게임을 선택하는 건, 소비자로서의 당연한 권리다. 하지만 예를 들어 고전 명작 RPG인 드래곤퀘스트 시리즈를 플레이하면서, 헤일로의 영화같은 연출이나 슈팅의 쾌감이 없다고 재미없는 게임으로 평가하는 것은, 색다른 재미라는 경험의 가능성을 스스로 포기하는 게 아닐까?

게임개발자가 자신이 만들고 싶은 게임을 제작하는 건, 마찬가지로 생산자로서의 당연한 권리다. 물론 소수 매니아 시장을 타깃으로 삼고 유명세나 부의 획득과 상관없이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는 것을 목표로 가질 수 있고, 개인적으로도 그런 인디 지향적인 마인드를 보유하고 있어 이해도 되는 바이다. 하지만 핵심 메시지나 매커니즘이 아닌 다른 부분만이라도 일반적이라고 불리는 다수의 게이머 취향에 맞게 각색해 얻을 수 있는, 더 많은 게이머들에게 즐거움을 선물할 수 있는 기회를 스스로 포기하고 있는 건 아닐까?

게임개발자가 된지 이제 겨우 만 6년이 되었는데, 짧은 시간 동안 업계에 몸 담고 있으면서 느낀 점이 있다면 바로 "재미가 없는 게임은 없다"는 점일 것이다. 평가라는 것은 "내가 바라보는 관점에 대상이 얼마나 부합하는지를 측정하는 것"이며 그 평가의 기준이라는 것 역시 지극히 개인적이다. 데들리던전의 껍질인간님이 평가하는 리뷰들에서도 단적으로 알 수 있다시피, 'ㅇㅇ는 ㅇㅇ해야한다'라는 건 개인의 기준이며 실제 제작자의 의도나 다른 게이머들의 의견과 차이를 가질 수 있다.

실제로 100%가 재미있다고 말하는 게임, 혹은 반대로 100%가 재미없다고 말하는 게임은 전무하다. 다수가 재미있어하는 흥행작품도 누군가는 재미없어할 수 있고, 반대로 다수가 재미없어하는 흥행실패작도 누군가는 재미있어 할 수 있다.


게이머는 재미있는 게임을 하고 싶어 한다.

게임개발자는 사람들이 자신들의 게임을 재미있게 하길 원한다.


게임이 재미 없다는 것은, 개발자들이 어떤 외압에 의해 정말로 전혀 1g의 영혼도 없이 개발한 "재미가 첨가되지 않은 (사실상의) 기능성 소프트웨어"가 아닌 이상,

1. 개발자가 재미 의도를 제대로 전달하지 못했거나
2. 플레이어가 재미를 발견하지 못했거나


의 두 가지 경우로 압축해볼 수 있을 것이다.


게임개발자가 플레이어에게 의도를 잘 전달했다면, 그 게임은 재미의 크기를 판단하기 이전에 일단은 충분히 잘 만들어진 게임일 것이다. 이처럼 게임을 잘만들고 싶은 것, 그리고 다음으로 플레이어들이 빅재미까지는 아니더라도 최소한 깨알재미 정도는 찾아가길 바라는 것은 모든 게임개발자들의 희망사항일 것이다.

하지만 게임개발자가 정말 좋은 재미 요소를, 좋은 기술로 포장해 의도를 충분히 전달할 수 있는 게임을 개발했다 하더라도, 그 게임을 즐기는 플레이어가 이를 알아주지 않는다면 결국은 재미없는 게임으로 기억될 수밖에 없다.

팔짱을 낀 채 완강한 표정으로 "자, 내 입맛에 맞는 게임을 내놓아 보시지!"라고 요구하는 게이머를 만족시키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닐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재미있는 게임이 없다며 한탄하는 건, 게이머로서 즐거워야할 소중한 시간들을 아깝게 허비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여기저기 수소문하면서 재미있는 게임을 찾아서 플레이하는 건 상당히 재미있는 일이다. 비슷한 이치로 어떤 게임을 플레이하면서, 그 게임을 개발한 개발자가 의도한 재미가 어떤 것인지, 혹은 어디에 있는지를 찾아가면서 플레이하는 것도 충분히 재미있는 일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어쩌면 어느 게임개발자 A의 흔한 변명처럼 들릴 지도 모르겠지만, 사실 개인적으로는 개발자가 되기 훨씬 이전인 게이머이던 시절부터 여간해서는 재미없다는 평가를 잘 내리지 않는 게이머였던 탓이 크다고 생각한다. 이런 성향은 비단 게임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닌, 만화나 도서 또는 영화 같은 다른 컨텐츠 분야에도 똑같이 적용되기도 했다.

그렇다면 이런 비교는 어떨까.

술을 즐겨 하시던 아버지께서 해주신 말씀 중에 이런 말씀이 있다.


"술이 세다는 건 슬픈 일이란다. 술이 약한 사람은 한 두잔에도 느낄 수 있는 기분 좋은 취함을, 몇 병씩이나 마시고 나서야 겨우 느낄 수 있다는 건 어찌보면 고단한 일일 수도 있지."


이 글을 보실 게임개발자 분들 중, "우리 게임 짱재밌는데 유저들이 몰라줌.ㅇㅇ"라고 생각하는 분들께 여쭙고 싶다.

"여러분의 게임은, 충분히 의도가 잘 전달되고 있나요?"


그리고 이 글을 보실 분들 중, 스스로 게임 불감증이라고 생각하는 게이머 분들께도 묻고 싶다.


"여러분도 혹시 '게임이 센 사람'은 아니신가요?"


재미있는 게임이 많아지기 위해서는 게임개발자와 게이머가 적대적 대립 관계가 아닌, 우호적 협력 관계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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