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수첩] 만삭부인 사망과 위기의 세틀러

칼럼 | 오의덕 기자 | 댓글: 69개 |
외과의사 만삭부인 사망사건을 아십니까?


지단달 14일, 서울 마포구의 한 오피스텔에서 임신 9개월의 박 모씨가 목 압박에 의한 질식사 상태로 발견됐다. 오피스텔의 욕조에서 숨진 것이 남편 백씨에 의해 발견된 것. 경찰은 시신의 목과 머리에 폭력에 의한 외상이 있고, CCTV와 집안 상태를 볼 때 외부 침입이 전혀 없었다는 증거 등을 확보한 후 남편 백씨를 유력한 용의자로 지목했다.


하지만 남편 백씨는 외과의사라는 전문적 지식을 통해, 만삭의 임산부가 미끄러지면서 목이 눌릴 수도 있는데다 제3자에 의한 타살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며 자신의 결백을 주장했고, 사건이 처음 발생한 이후 수사가 장기화 될 조짐이 보이면서 세간에 “한국판 OJ심슨 사건”으로 화제가 되기도 했다.


2월 초 법원에 신청했던 남편 백씨에 대한 구속 영장을 기각당한 경찰은 “남편 백모씨에 의한 타살”을 입증하기 위해 '목눌림 질식사’로 아내 박모씨가 사망했다는 국립과학수사연구원의 2차 소견서를 확보해 법원에 다시 제출했다. 해서, 법원은 ‘죄를 범했다고 의심할만한 상당한 이유가 있고 증거 인멸이나 도주의 우려가 있다”며 영장을 발부하게 되었고 경찰은 사건이 발생한지 한 달이 훌쩍 지난 지난 24일 남편 백씨를 구속한 것이다.


그러나, 사건은 아직도 미궁 속을 헤매고 있으며 앞으로 치열한 법정공방을 예고하고 있다. 남편 백씨측은 경찰이 정황 증거만으로 남편 백씨를 범인으로 몰아가도 있다고 주장하고 있고, 경찰 측도 피의자의 자백은 물론이고 정황 증거 외에 ‘결정적인 증거’를 아직 확보하지 못한 상황이기 때문이다.



그러던 중, 지난 주말인 26일(토) 각 매체들은 앞을 다투며 경찰 관계자의 발표를 인용, 범인은 남편이며 살해이유는 부부싸움이 유력하다고 일제히 보도한다.


남편 백씨가 전문의 1차 시험을 잘 치르지 못하고도 사건 당일 새벽 3시까지 게임을 하고 있었던 것이 평소에 게임을 하는 것을 만류하던 부인 박씨와 부부싸움을 하도록 만들었으며, 이사 문제와 시험 스트레스가 겹친 상태에서 우발적으로 살해를 저질렀다는 경찰측의 주장이다.


사실, 살해의 동기에는 상당히 복합적인 이유가 뒤섞여있는 경우가 많고, 그 중에서도 가장 유력한 원인을 추적하기가 쉬운 일은 아니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지만, 그렇다고 경찰이 말도 안되는 터무니없다는 주장을 하고 있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하지만, 내가 몹시 불편했던 이유는 그동안 수많은 정황을 살피며 증거를 수집하며, 합리적이고 과학적으로 접근해온 것처럼 보였던 사건이 ‘게임’이라는 단서가 등장하자 마자 , 즉시 잠정적인 결론을 내리며 모든 원인을 ‘게임’과 ‘게임중독’으로 몰아가는 도무지 납득이 가지 않는 일부 매체들의 태도 때문이었다.


사건과 별 상관도 없는, '남편 백씨가 어려서부터 프로게이머가 되길 원했다'는 내용을 싣기도 했고, 특히 몇몇은 기사 제목에 아예 해당 게임의 이름인 ‘세틀러’를 포함시켜 제목만 보면 이번 사망사건의 가장 큰 원인이 ‘게임’으로 결론났다는 식으로 오해할 수 있도록 했다. 기자의 아내가 근심스러운 표정으로 다가와 “게임 때문에 그런 일을 저질렀다며?”라고 물어올 정도니 현 상황의 사회적인 분위기를 짐작할 수 있을 듯 하다.


일부 매체에서는 추가로 세틀러라는 게임을 집중 조명하는 보도를 내기도 했으며, 경찰이 프로파일러를 동원해 게임중독과 이상심리가 범행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분석할 방침이라고 밝히기도 했다.


세틀러는 제목에서 어느 정도 알 수 있듯이 정착지를 건설해서 새로운 문명을 짓고 점점 더 영토를 늘려가는, 최근 유행했던 ‘문명V’과 매우 유사한 전략 시뮬레이션 게임이다. 게임 자체가 자원을 생산하고 유통해서 경제를 발전시켜 도시를 성장시키는 내용이 주를 이루기 때문에 북미에서도 10세 이용가 등급을 받았으며, 국내에 한글화되어 출시됐던 ‘세틀러6: 제국의 부흥’도 12세 이용가 등급을 받았다.


다시 말해, 일반적으로 봤을 때 현실 속의 살해 및 다른 여타 범죄와 연결시키기에는 상당히 무리가 따르는 게임 중에 하나다. 살해 동기로 세틀러를 지목한 보도를 접하고 많은 게이머들이 공감하기보다는 인터넷 상의 블로그 혹은 커뮤니티를 통해 반발하거나 조소를 날리는데는 이런 이유가 있는 것이다.








[ ▲ 시리즈의 최신작, 세틀러7의 스크린샷
"여기서 뭘 더 어떻게 설명을 해야할지 모르겠다." ]




"의사 만삭부인 살해이유, 게임 ‘테트리스’ 때문?", "만삭 의사부인’ 살해 혐의 백모씨... 테트리스 게임 하다 부부싸움 벌여", "부인 살해 혐의 의사가 즐긴 ‘테트리스’는 어떤 게임"? 방금의 어이없는 제목들은 기자가 지어낸 게 아니라 실제로 어제, 오늘 올라간 신문기사의 제목에서 ‘세틀러’를 ‘테트리스’로 바꾼 것 뿐이다. 세틀러가 된다면 테트리스 뿐 아니라 '보석찾기'도 되고, 예전 오락실의 '너구리'도 안될 이유가 없다.




리 사회의 대표적인 중산층인 ‘외과의사’가 경찰로부터 ‘만삭 아내 살해’라는 입에 담기도 힘든 패륜범죄의 혐의를 받고 있다. 남 부러울 것 없는 사람이 "아니, 도대체 왜?"라는 전 국민적인 충격과 호기심은 너무나 당연한 현상이다.


하지만, 그 물음에 대한 대답 자체가 사회 구성원들의 일반적인 사고방식과 반한다고 해서, 그리고, 그 대답을 찾아가는 과정이 우리 사회 구조의 모순과 치부를 드러내게 할 수 있다고 해서, 진실을 찾으려는 노력을 하기 보다는 제일 만만한 것처럼 보이는 게임을 제물로 붙잡아 마녀사냥하듯 몰아가는 것은 게임계에 몸 담고 있는 한 사람으로써 너무나 씁쓸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나는 정말이지 이번 사건의 범인이 만에 하나 '게임'이라고 판명난다고 하더라도 정말 명명백백하게 모든 진실이 규명됐으면 좋겠다. 반사회적인 사건이 터질 때마다 마치 약속이나 한듯이 게임이라는 '희생양'을 찾아내 돌팔매를 날리다가, 결국엔 정확한 원인규명 없이 어물쩍 넘어가는 패턴의 반복.


이러다가 결국 어린이의 영웅 '뽀로로'까지 살인누명을 쓰고 우리 앞에 나타나지는 않을까, 진심으로 두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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