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대기업 스폰, 게임 개발자를 공장장으로 봐선 안되죠

칼럼 | 오의덕 기자 | 댓글: 79개 |
첫 만남을 떠올려보면 아마 작년 10월이었던 것 같다. 지스타 준비로 업계 전체가 여념이 없던 그때. 나태함을 반성해야 하는 게 먼저지만 하루에도 수없이 쏟아지는 보도자료에 이리저리 치이다 보면 ‘신작’이라는 두 글자에도 둔감해질 때가 있다. 기계적으로 게임을 DB에 등록하고 소개기사를 올리고. 누군가 그 당시 내 모습을 봤더라면 바쁜 척만 하고 허둥대는 스타워즈의 C3PO를 떠올렸을지도 모르겠다.

그로부터 벌써 반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이 게임’이 기억 속에 깊게 남아있는 이유는 ‘진흙 속에서 찾아낸 진주’라는 이미지가 너무 강렬했기 때문일 거다. 플레이 영상이라는 단편적인 간접 경험일 뿐이었지만 그 안에서 펼쳐진 호쾌하면서도 정교한 액션은 천편일률적인 게임들에서 빚어진 그동안의 갈증을 잠시나마 해소시켜 줬다. 내 자리 영상을 힐끗 쳐다보고 감탄사를 연발하며 무슨 게임인지 묻던 동료 기자들의 반응도 아직 뚜렷하다.

그런데 얼마 전 ‘그 게임’을 개발하던 스튜디오가 갑작스레 문을 닫았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의외의 소식이었던 것이 그 스튜디오가 속한 모기업이 국내 굴지의 대기업이기 때문이다. 최근 사업적인 면에서 큰 이슈가 없긴 했지만, 게임사업 진출을 대대적으로 선포한 지 2년도 채 안 되었기에 호기심은 더욱 증폭됐다. 왜 그들은 2년 동안 애써 개발한 게임 소스와 IP를 완전히 폐기한다는 최악의 선택을 하게 됐을까?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언제나 그렇듯 시작은 화창했다. 오래전부터 구상하고 있었던 ‘PVP에 특화된 온라인 액션게임’을 제대로 만들어 볼 기회가 드디어 생겼던 것이다. 주위의 만류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말만 해도 누구나 아는 ‘대기업’이란 이름과 나머지는 다 알아서 할 테니 게임개발에만 전념하면 된다는 달콤한 제안은 개발자로서 쉽게 거절하기 어려웠다.

그렇게, 예전부터 한 팀을 이루던 총 6명의 개발자가 큰 꿈을 품고 대기업 계열사 중의 하나로 게임스튜디오를 차리게 됐다. 하지만 장미빛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회사설립 후 1년이 지난 시점에 스튜디오를 최초에 제안했던 게임사업 총괄 대표이사가 교체된 것.

대기업 그룹 차원에서야 종종 있는 인사이동이지만 해당 개발자 입장에서는 철석같이 믿었던 리더가 하루아침에 사라진 격이었다. 충격이 채 가시지 않은 시점, 급기야는 그룹 차원의 내부 감사가 연이어 시작된다. 참담한 기분이 들었지만 그래도 개발의 꿈은 쉽사리 포기할 수 없었다.

회사 내부 ‘개밥의 도토리’ 같은 처지보다 더욱 힘들었던 것은 개발 초기인데도 무언가라도 성과를 내놔야 한다는 압박이었다. 창작과 재미요소가 적절히 결합해야 하는 ‘게임’이라는 장르에 투입량에 비례하는 결과가 무조건 나와야 한다는 제조업 마인드를 억지로 가져다 붙인 격이다.

게다가 스튜디오 설립 때부터 개발 중인 ‘온라인 PvP 게임’의 컨셉을 말해왔지만, 중요 회의마다 같은 회사 직원에게도 왜 이 게임이 MMORPG가 아닌지, 왜 퀘스트와 던전이 없는지 지겹도록 설명을 해야만 했다. 심지어는 ‘그래도 퀘스트는 만들어라’라는 강압적인 요구까지 있었다. 실제 개발 과정에서 보다 회사 내부를 설득하는데 진이 더 빠지는 상황.

개발 인원 문제에서도 트러블은 항상 존재했다. 업계 평균보다 낮은 연봉테이블로 신규 개발자가 뽑기가 쉽지 않은 처지인데 대기업 특유의 무거운 면접 분위기는 면접을 보러온 개발자를 오히려 도망치게 했다.

회사에서는 개발팀 충원보다는 일시적이면서도 저렴한 ‘외주’를 선호했는데 외주를 주기 위해서는 무조건 최소 3개 이상의 업체를 선정해 제일 비용이 싼 곳을 선택해야 하는 대기업적인 관행이 있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나중에 감사실에서 추궁을 당하는. 인원도 적은데 외주를 제대로 활용하는 것도 사실상 힘들었던 것이다.

가장 큰 문제는 장기적인 시점에서 마일스톤을 세워나가야 하는 스튜디오의 PD도 개발 운영비에 관해서 의사결정은 고사하고 부분별로 얼마인지 금액조차도 확인할 수 없었다는 점이다.


시간은 흘러 국내 최대의 게임쇼인 ‘지스타’가 한발 앞으로 다가왔고 지스타에서 ‘플레이 가능한’ 시연버전을 내놓지 못하면 스튜디오가 전체가 책임을 져야한다는 압박이 뒤따랐다. 게임 개발을 접어야 한다는 의미. 그때가 최초 개발을 시작한 지 1년 6개월이 채 안 됐던 시점. 개발인력도 이제 겨우 10명이 넘었을 때였다.

가장 아이러니했던 것은 회사 내부에서는 단 한 번도 좋은 평가를 받지 못했던 게임이 지스타를 통해 외부에 알려지자 상당한 호응을 이끌어냈다는 점이다. 그것도 짧은 시간 동안 개발팀 전체가 고군분투하며 겨우 지스타에 출품한 미완성 ‘플레이버전’으로 말이다.

지스타 때의 좋은 반응 덕분에 약간의 생명 연장이 있었지만 해가 바뀌면서 ‘성과’를 내라는 압박은 더욱 거세졌다. 올해 3월에는 급기야 도저히 개발비 지원을 못 하겠으니 다른 업체에 스튜디오와 IP를 매각한다는 방침이 내려왔다. 5월까지 매각에 실패하면 개발비 지원을 끊어버리겠다는 조항도 붙어있었다. 그 시점까지 대략 계산해본 전체 개발비는 20억 원 내외. 일상적인 야근이 없었기 때문에 열심히 한 것으로 인정할 수 없다는 회사의 추궁도 따랐다.

기획 초기부터 거의 가족이나 마찬가지인 동료와 함께 열정과 노력을 집약시킨 프로젝트였기에 그런 압박 속에서도 쉽게 포기할 수는 없었다. 개발 중인 게임을 어떻게든 출시해서 업계와 게이머들의 인정을 받고 싶은 개발자 본연의 욕심도 존재했다.

사건을 바라보는 서로의 시각차는 있겠지만 분명히 이 게임에 호감을 느낀 퍼블리셔들이 존재했다는 주장. 하지만 2개월이라는 물리적으로 너무 짧은 시간으로는 어떤 ‘결과’가 나오기를 기대하기가 어려웠다는 설명이다. 간단히 얘기해 '미션 임파서블'이었던 것.

한국에 지사조차 없는, 실체를 확인할 수 없는 먼 나라 퍼블리셔의 제안을 끝으로 결국 스튜디오는 완전히 폐업 처리가 됐고 직장을 잃은 개발자들은 실업급여를 받으며 새로운 기회를 찾기 위해 노력하는 중이다.



충분히 분노와 오열을 터트릴 수 있는 상황이다. 2년이라는 세월을 허비한 것도 모자라 몸과 마음 모두 고생이라는 고생은 다 겪었다. 게다가 스튜디오가 해체된 지금, 일부에게는 개발비만 받고 아무것도 한 게 없다는 ‘먹튀’의 오명까지 받고 있다.

그러나 놀랍게도 누구를 탓하는 목소리는 전혀 듣지 못했다. 오히려 좀 더 옳은 의사결정을 내리지 못한 것에 대한 후회와 악조건 속에서도 그래도 끝까지 스튜디오를 지지해준 회사의 남은 인원들에게 감사의 말을 전할 뿐이었다.

정색하며 남긴 마지막 말은 딱 하나. 게임 업계에 다시는 '수익에만 눈이 먼' 대기업이 들어오지 않았으면 하는 간절한 바람이었다. “더는 선의의 피해자가 없었으면 좋겠어요.“ 사람이 아닌 구조적인 한계와 문제점을 지적했다.

여기에서 굳이 이 슬픈 이야기가 실화인지 판타지인지를 밝히지는 않을 셈이다. 하지만 지금 내 책상 위에는 회사 지원을 받지 못해서 열 명이 조금 넘는 개발자들이 회식비로 자체 제작한 ‘그 게임’의 마우스패드가 쓸쓸히 놓여있다.

최근, L모 그룹의 게임업계 진출 루머가 화제가 된 바 있다. 보는 관점은 저마다 달랐다. 일부에서는 난색과 우려를 표하기도 했지만 새로운 거대 자본이 유입된다는 점에서 긍정적으로 보는 견해도 있었다. 그러나, 게임과 문화 컨텐츠에 제조업의 생산 프로세스만을 들이대는 굳은 사고방식이 여전히 유효하다면 앞으로도 이 비극은, 그리고 그릇된 시스템의 피해자는 반복해서 등장할 것이 분명하다.

게임 업계 전체에 깔린 거대한 구조조정의 그림자까지. 소주잔을 기울일 때마다 고민과 근심이 떠나지 않는 요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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