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수첩] 발더스 게이트3는 '비정상(非正常)'적인 게임인가?

칼럼 | 정재훈 기자 | 댓글: 42개 |




발더스 게이트3를 구매했다.

언제 될지 기약도 없는 한국어화를 기다리며 푹 묵혀두려 했는데, 내 인내심은 스스로 생각했던 것 보다 형편없었다. 넉넉치 못한 유부남의 지갑사정 때문에 가격표를 보고 살짝 망설이긴 했지만, 다음 달 명절 보너스를 생각하곤 애써 웃으며 결제 버튼을 눌렀다. 참을 수가 없었다.

그 정도로 반응이 뜨거웠다. 물론 결정적인 구매 이유는 따로 있었지만, 돌아가는 상황만 보면 안 살 수 없는 게임 같았다. 턴제 CRPG임에도 80만이 넘는 스팀 동접과 90점 후반대를 기록하는 평론가 점수. 게다가 이번엔 유저 평점도 못지 않게 높다. 턴제 게임은 취향이 아니지만, 이건 좀 다른 경우가 아닌가 싶었다.

그리고 구매 후 이틀이 지난 지금까지, 결제 버튼을 누르던 그 시간으로 돌아가고픈 마음은 추호도 없다. 발더스 게이트3의 게임 경험은 완벽했다. 언변과 화술로, 기지와 속임수로, 때로는 직접 칼을 맞대며 우정과 로맨스를 쌓아가는 경험은 근 몇 년 간 구매한 어떤 게임 경험보다도 값졌고, 훌륭했다.

조금 더 보태면 '이래도 되나?' 싶었다. '난 그저 7만 원 조금 덜 되는 돈만 냈을 뿐인데, 그 흔한 게임 내 결제도, 얼티밋 에디션 업그레이드도, 시즌 패스도 구매하지 않았는데 이렇게 게임이 재미있어도 되는 건가?' 가끔 가격표가 잘못 올라가 인터넷 쇼핑몰에 대란을 일으키는 전자제품을 운 좋게 구매한 심정이 들었다. 따지고 보면, 게임 값 내고 제대로 된 게임을 하는 지극히 정상(正常)적인 상태인데, 지금까지 게임을 사면서 왜 이런 감각을 느껴본 적이 드물었을까.

이와 같은 위화감이 나만의 것은 아니었던 것 같다. 많은 개발자들, 심지어 이름만 대면 아는 대형 개발사의 일원들이 SNS를 통해 의견을 쏟아냈다. 대부분 "라리안(개발사)를 욕하려는 건 아니지만 정상적으로 만든 게임은 아니다"라는 논조로 시작되는 글들은, 발더스 게이트3가 이례적인 환경 속에서 탄생한 게임이며, 이를 기준으로 게임을 평가해서는 안된다고 주장하고 있었다.

솔직히 말하면, 이 반응들이 내가 게임을 사게 된 이유기도 하다. '도대체 얼마나 잘 만들었길래 저렇게까지 말할까?' 의도가 무엇이었든 그 글들은 발더스 게이트3의 바이럴이 되어버렸고, '나'라는 예비 구매자는 그들의 글을 '발더스 게이트3는 비정상적인 게임이니 논외로 두어야 한다'보다는 '게임 겁나 잘 만들었네 우리는 저렇게 못하는데'와 같은 질시의 흔적들로 받아들였다.

딱히 그들의 논리가 옳은 것 같지도 않다. 그들 말대로 나는 게임 개발이 얼마나 힘든지 현업 종사자만큼 알지 못한다. 그러나 상품의 질이 곧 수요를 결정한다는 자본주의의 기본은 안다. '손님은 왕이다'는 자본주의의 대표적인 캐치프레이즈는 가끔 뒤집힐 때가 있다. 돈까스 한 번 먹자고 밤을 새고, 왕복 몇 시간 거리를 달려가 물건을 구해 오는 건 드문 일이 아니다.

하지만, 그건 상품의 질이 월등함에도 공급량이 수요에 처절히 미치지 못할 때나 벌어지는 현상일 뿐, 공급의 문제가 전혀 없는 게임 산업에서 벌어질 일은 아니다. 오직 중요한 건 상품의 질, 즉 게임이 얼마나 재미있냐다. 게임업계에서 게이머들의 위에 서는 개발사가 되는 조건이 이렇게 간단하다. 게임만 재미있으면, 게이머들은 개발사를 왕을 넘어 '신'처럼 여긴다.

그렇기에, 나는 저 개발자들이 그저 '한때 신으로 여겨졌으나, 재미있는 게임을 만들지 못해 영락한 주제에 아직도 게이머 머리 위에 서있다 착각하는 이들'로 보인다. 오죽 게이머들을 내려다 보고 있으면, 평가 기준까지 알아서 정해준단 말인가. 국물 안 먹고 면만 먹는다고 손님을 쫓아내는 라면집 이야기를 만화로 본 것 같은데 별로 달라 보이지 않는다.

물론, 너무나 복잡하게 꼬여버린 게임 비즈니스에서, 발더스 게이트3와 같은 게임이 좀처럼 나오기 힘들다는 건 이해하고 있다. 그들 말대로, 라리안이 자금과 인력, 시간이 충분했고, 압박을 넣을 퍼블리셔도 없이 훌륭한 IP로 게임을 만들 수 있었던, '이상적인 케이스'라는 건 일부 맞는 말이다.

하지만, 무엇이 '정상'인지는 다시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이상적인 게임'이 좀처럼 나오기 힘들 정도로 사공이 많아지고, 게이머들이 원하는 것을 찾아 나설 방향타마저 고장난 지금의 게임 비즈니스인지, 혹은 이 와중에도 좋은 조건들이 겹쳐 좋은 게임을 만들 수 있었던 라리안인지 말이다.

말장난 같지만, 생각보다 중요한 화두다. '정상'은 곧 많은 시작들의 목표가 되며, 하나의 기업, 나아가 산업이 나아갈 방향이 된다. 지금의 산업을 '정상'으로 여기면, 게임 산업은 제자리 걸음만 반복할 뿐이다. '정상 상태'에 대한 산업의 공감대가 무엇이냐에 따라 산업이 나아갈 길도 달라진다는 뜻이다.

반박하고 싶으면 방법은 간단하다. 더 재밌는 게임을 만들면 된다. 진심으로 응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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