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장주 칼럼] 게임장애가 만들어 낼 새로운 문제들, 감당할 수 있을까?

칼럼 | 이두현 기자 | 댓글: 8개 |



인벤은 WHO의 '게임 장애(Gaming Disorder)' 공식 질병 목록 등재 시도에 대한 이장주 박사님의 기고문을 소개합니다. 해당 기고문은 등재 시도가 얼마나 부당한지 총 4회에 걸쳐 근거를 제시할 예정입니다.

이장주 박사님은 현재 이락 디지털문화연구소 소장으로 사회문화심리 분야를 연구하고 있습니다. '디지털시대, 기술을 넘어선 사람의 행복'을 테마로 게임과 e스포츠를 비롯해 디지털 문화 전반에 걸쳐 다양한 주제로 심리학 연구를 진행하고 있습니다.


* 외부 필진의 기고 내용은 본지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게임 장애 질병화란 광기의 질주를 멈추라!
[1부] 게임 장애, 과학적 근거가 빈약하다
[2부] 게임장애, 얻는 것보다 잃는 것이 더 크다
[3부] 게임장애가 만들어 낼 새로운 문제들, 감당할 수 있을까?
- 게임 장애, 질병화를 저지하기 위해 무엇을 해야할까? (예정)




▲"구름 사진 속에 뭐가 보이는가?"

맹목적인 믿음을 가진 종교인들은 어디서나 자신의 신(神)을 찾으려 한다. 그래서 구름 속에서부터 곰팡이까지 어디에나 자신의 신이 임재(臨齋)하심을 확인하며 산다. 같은 하늘 아래 살고 있지만 종교가 다르거나 없는 사람은 그냥 평범한 구름이거나 기껏해야 토끼구름, 나비구름 정도를 볼 수 있을 뿐이다. 이런 차이는 구름이 그렇게 생겨서가 아니다. 그 구름을 보는 사람의 마음속에 어떤 가치와 믿음이 있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이런 현상을 지각심리학에서는 ‘능동적 지각(active perception)’이라고 부른다. 쉽게 말하자면, 있는 대로 보는 것이 아니라 보고 싶은 대로 본다는 의미다. 이런 맥락에서 ‘게임장애’는 이제까지 없던 현상들을 보여주고, 만드는 놀라운 일을 벌일 것이다. 과연 그 일이 우리에게 어떤 결과를 가져올까?



이름 붙이기(naming)의 효과
게임장애, 단순히 억울한 호칭이 아니다

우리는 식당에서 ‘저기요’나 ‘아줌마(흔히 들을 수도 있는 ’소리‘를 옮긴 거다. 다른 의미 진짜 없다.)’ 대신 ‘이모’를 찾는다. 왜 그럴까? 이모라고 부르는 순간, 그 사람은 그냥 여러 손님 중 하나가 아니라, 마치 조카나 친척 같은 특별한 존재의 지각이 활성화된다. 이렇게 사람에 붙이는 이름은 실행성(practice), 다르게 표현하자면 이름 따라 간다는 것이다. 멀리 갈 것도 없이 내 글이 대체로 긴 이유는 이름 탓이다. ‘이장(長)주’가 아니라 ‘이단(短)주’였다면 엄청 짧았을지도.

캐나다 출신 심리학자 댄지거(Danziger)는 저서 '마음에 이름 붙이기(Naming the Mind)'라는 책에서 이름 붙이기의 종류를 구분했다. 우선 ‘해’나 ‘달’ 같은 자연류(natural kinds) 이름 붙이기는 어떻게 이름을 짓는가와 무관하게 존재하는 실체적 대상을 말한다. 반면, 인간류(human kinds) 이름 붙이기는 어떻게 이름을 붙이느냐에 따라 속성이 변한다. 앞서 ‘이모’는 인간류의 이름 붙이기에 해당하는 사례다. 댄지거가 이 책에서 심리학적 용어는 ‘인간류’ 이름 붙이기임에도 불구하고 마치 ‘자연류’인 듯 쉽게 착각을 한다고 지적한다.

그럼 ‘게임장애’는 자연류의 명칭일까? 인간류의 명칭일까? 당연 인간류다. 게임장애라는 이름이 정식으로 호적(?)에 오르냐 마느냐에 대한 논쟁은 자연류나 인간류냐의 인식 차이에서 상당 부분 갈라진다. 의학계뿐 아니라 많은 게이머들도 ‘자연류’라고 착각을 한다. 마치 ‘바이러스’라고 하나, ‘병균’이라고 부르나, 그도 아님 ‘마마’이라고 부르느냐가 뭐 대수냐는 듯 말이다. 아니다. 절대로 그렇지 않다.

세계보건기구(WHO)의 ‘게임장애’ 질병 목록화는 객관적 현상을 지칭하는 기호가 아니다. 게임장애는 그렇게 불리울 사람의 현재와 미래를 결정하는 아주 중요한 이슈다. 당연 의학의 문제를 벗어나는 더 큰 범위의 인간 존엄과 인권 그리고 미래전략까지 고려해야 할 중요한 이슈다. 그런데 게임장애는 단순히 억울한 호칭을 넘어서 예상을 뛰어넘는 엄청난 비극을 불러오는 주문이 될 수 있다.



‘게임장애’가 불러올 새로운 문제
'게임중독 방지'에 중독된 사람들

노시보 효과(Nocebo effect)

‘플라시보 효과'(placebo effect)’는 이제 심리학 용어가 아니라 상식이 되어버렸다. 효과가 없는 약이라도 효과가 있다고 믿으면 진짜 효과를 발휘하는 심리현상 말이다. 그런데 반대의 효과는 조금 낯설다. 그게 노시보 효과(nocebo effect)다. 노시보 효과의 예를 들어보자. 멀쩡한 우유를 마신 사람에게 3시간쯤 지나서 가짜 정보를 준다. “너 혹시 괜찮아? (무척 초조한 표정으로) 아까 마신 우유가 상한 우유래!” 이 말을 들은 사람은 속이 점점 이상해진다. 그리고 머지않아 화장실로 달려가게 된다. 진짜 우유의 물리적 효과가 아니라 우유에 대한 심리적 효과가 실제 신체 효과로 전환되어 나타나는 현상이 전형적인 노시보 효과다.




게임장애라는 명칭이 공식화되면 노시보 현상이 우리 사회에서 엄청나게 나타날 것이다. ‘게임’ 때문이 아니라 ‘게임장애’라는 명칭 때문에 말이다. 그런데 더 나쁜 소식은 노시보 효과는 전염성이 있다는 것이다. 앞서 우유의 노시보 효과를 보인 사람이 환자가 되어 누웠는데, 갑자기 함께 우유를 마신 다른 친구들이 생각났다. 그리고 카톡을 한다. ‘아까 우리가 마신 우유가 상했데. 그래서 나 지금 배탈 나서 아주 죽을 맛이야! 너는 괜찮니?’ 이 메시지를 접한 친구들도 갑자기 배에서 요동을 치기 시작한다. 게임장애도 마찬가지다. 어떤 게임에 게임장애가 나타났다고 소문이 도는 순간 그 게임을 했던 사람들도 유사한 증상을 경험하게 된다. ‘운전을 하는데 길 말고, 산으로 들어가고 싶어져!’, ‘말도 마! 나는 후라이팬을 달고 가지 않으면 막 불안해!’

이런 현상을 보면서 아마도 ‘게임장애’를 찬성하는 입장의 인사들은 무릎을 칠 것이다. 그리고 이런 말을 할 것이다. “이것 봐! 게임장애를 질병 목록화하여 의료보험 혜택을 받지 않았더라면 이 많은 아이들이 어떻게 감당했겠어!” 뿌듯함인지 안도감인지 모를 편안한 표정으로 말이다. ‘지옥으로 가는 길은 선의로 포장되어 있다(The road to hell is paved with good intentions)’라는 서양 속담이 있다. 나는 ‘게임장애’ 질병 목록화가 바로 선의(good intentions)로 포장된 ‘지옥행 고속도로’라 확신한다.


병적 이득(morbid gain)

휠체어. 유명인들이 검찰에 갈 때 애용하는 이동수단이다. 왜 휠체어를 타고 들어갈까? 그냥 멀쩡히 걸어가는 것보다 유리하기 때문이다. 이런 현상은 병적 이득의 단적인 예다. 병적 이득(morbid gain)이란 ‘병으로 인해 얻어지는 심리적, 환경적 이득’이라고 대략 설명할 수 있다.

게임장애는 단순히 의료계에만 혜택이 있는 것이 아니다. 게이머들에게도 숨은 혜택을 주기 때문에 노시보 현상에 더해져 게임장애 폭증 현상이 나타난다. 예를 들어보자. 군대에 가기 싫은 사람은 ‘게임장애’를 이유로 면제나 다른 형태의 복무가 가능해진다. 군대에 2년 갈 것인가? 아니면 PC방을 1년 동안 열심히 다닐 것인가? 이제까지 없던 신기한 병역 면제의 길이 생긴 것이다.



이런 종류의 이득을 ‘이차 병적 이득(Secondary morbid gain)’, 줄여서 ‘이차 이득’이라고 부른다. 쉽게 예측할 수 있는 이차 이득은 경찰서나 법정에서 나타날 것으로 예측된다. 폭력이나 절도 사건에 휘말린 피의자가 게임장애를 이유로 자신의 죄를 경감받고자 하는 시도한다. 이는 자기방어본능이 있는 사람이면 누구나 쉽게 떠올릴 수 있는 방법이다. 폭력사건의 피의자는 ‘내가 누구를 때리는 사람이 아닌데, 얼마 전부터 GTA를 밤낮없이 하다 보니 나도 모르게...’ 눈물 한 방울 또르르 흘리며 고개를 힘없이 떨군다. 또 성추행 피의자는 요즘 유행하는 미연시 게임 타이틀을 한스러운 듯 부른다.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제가 정말 그랬다고요. 아~ 게임과 현실을 혼동하여...’ 이런 예측이 허무맹랑한 소설로 들리는가? 운이 좋으면 무죄를 받을 수도 있는 이 방법을 쓰지 않는 사람이 멍청한 거다. 진실한 사람이 아니다.

그런데 정말 교묘히 숨어있는 이득은 ‘삼차 이득(Tertiary morbid gain)’이다. 최근에 밝혀진 삼차 이득은 장애를 가진 사람의 보호자나 친구가 얻는 이득이다. 예를 들면, 누군가로 인해 힘겹게 사는 사람은 주변의 사람에게 위로나 배려를 얻어내기 쉽다. 보통 누군가에게 신세 한탄을 하는 경우, 위로를 받는 상황은 ‘삼차 이득’의 전형적인 형태다.

삼차이득은 이차 이득과 맞물리며 악순환을 반복하게 된다. ‘게임장애’라는 이유로 공부나 경제적 활동, 집안일과 같은 의무 부과에서 가뿐하게 면제된다. 게임장애 자녀를 둔 부모는 ‘너는 하고많은 날 게임이냐? 내가 못 살아!’, ‘우리 아들 좀 게임 못하게 해주면, 내가 뭐라도 하겠어요. 내 목숨이라도 내놓겠어요’ 이렇게 말을 하지만, 이런 말을 들어주는 사람으로부터 심리적 지지나 존재감이라는 삼차 이득을 얻는다. 대략 이런 종류의 위로와 지지들이다. ‘힘내세요’, ‘그나마 00엄마가 있으니 그 집이 그만치 유지되는 거예요.’

숨은 이득이 있기에, 게임의 병적 현상이 나타나지 않더라도 병적 현상을 찾아내려고 애를 쓴다. ‘너 지금 게임을 하는 생각하고 있지?’ 심지어 병적 현상이 사라지더라도, 이득을 얻기 위해 병적 현상을 자꾸 자극한다. 무의식적으로 말이다. ‘네가 옛날에 게임에 빠져있을 때, 내가…(한탄을 아주 길고 자세하게 한다)’ 게임을 하지 않아서 오히려 듣기 싫은 소리를 더 많이 들어야 한다. 칭찬을 받아도 부족할 판에, 오히려 처벌을 받는 거다. 그래서 다시 옛날로 돌아가고, 비극도 반복된다.

사회적으로도 ‘게임장애’로부터 얻는 삼차이득의 형태가 있다. 흔히 ‘게임중독에 중독된 이’들이 대표적이다. 이들은 대체로 냉정한 사이버 보안관이자, 든든한 청소년 지킴이를 자처한다. 이들의 존재감을 지키기 위해서는 아주 악독한 게임사와 약아빠진 게이머들이 필요하다. 당연히 눈에 불을 켜고 자신의 존재감이 잘 드러나는 현장을 찾아 나선다. 이게 ‘도덕적 공황(moral panic)’이란 개념으로 설명되는 상황이다. 망치를 든 사람은 이 세상이 온통 못으로 보이는 법이다. 그리고 곳곳에서 못 비슷한 것들을 무수히 찾아낸다. 그리곤 주변 사람들과 스스로에게 격려와 위로를 얻는다. 이런 방식으로 공황 상태를 해결해가는 자칭, 타칭 영웅이 탄생한다. 영웅적 활동을 비판하거나 짜증 내는 것은 둘 중 하나로 생각한다. 세상을 망하게 만들려는 ‘악당’이거나, 세상 물정 모르는 ‘풋내기’거나.

이차이득과 삼차이득은 공짜가 아니다. 이들의 이득은 누군가의 손해다. 대표적인 손해로는 누군가를 대신해서 군대 생활을 더 하거나, 범죄에 더 많이 노출되는 그런 종류들이다. 그리고 부당하게 누군가의 감시를 의식하거나, ‘혹시 내가 장애는 아닐까’하는 혹독한 자기검열을 하며 살아야 한다. 자유민주주의 국가에서 이게 가당한 소리인가? 이렇게 심각한 비용을 초래하는 ‘게임장애’의 질병 목록화는 비용을 부담하는 사람들에게 부담할 것인지 말 것인지, 부담한다면 얼마나 부담할 것인지 물어봐야 하는 것은 너무 당연한 절차이자, 최소한의 상식이다. 그럼 대략적인 액수라도 알아야 판단을 할 텐데, 게임장애와 관련된 청구서는 얼마나 나올지 가늠조차 되지 않는 ‘백지수표’다.


불치병

일반적으로 게임중독(과몰입, 장애 뭐라 부르든)은 20대 중반을 넘어서면서 자연적으로 소멸한다. 일생 중 한 시기에 나타났다 사라지는 것은 정상적으로 성장해가는 과정 중 하나라는 뜻이다. 이것을 병으로 만들겠다는 것은 앞으로 태어날 청소년들을 모두 잠재적인 환자로 만들겠다는 아주 위험한 발상이다. 대부분 국민이 정신장애에서 자유롭지 못한 날이 올 수도 있다는 뜻이다. 그렇게 된다면 정부 기구 중 보건복지부 장관이 국무총리를 겸직하여 국가관리를 총괄해야 할지도 모른다. 생각만으로도 끔찍하다.

이게 그냥 엉뚱한 상상이었으면 나도 좋겠는데 그게 그렇지 않다. 예를 들어, 독감이면 바이러스 검사를 하여 완치판정을 내릴 수 있다. 그러나 정신장애는 그렇게 명확하게 확인할 수 있는 것이 없다. 이런 이유로 정신장애는 완치란 개념이 없다. 멀쩡하게 잘 지내다가 무슨 사고를 일으키면 그 옛날 치료받던 게임장애 진료 병력이 쏟아진다. 어디 싸움이라도 일어나면 옛날 했던 액션 게임을 조사하고, 교통사고를 일으키면 레이싱 게임경험 여부를, 사기나 횡령과 같은 범죄는 ‘게임 핵’ 사용을 추적하게 될 것이다. 한번 진단이 내려지면 평생 함께 지고 가야 하는 멍에가 정신장애다. 그냥 두면 사라질 그런 작은 소란을 평생 불치병으로 만들어서 어쩌잔 말인가?

사실 이건 게임장애 뿐 아니라 정신장애가 가지고 있는 결정적 취약점이기도 하다. 그런데 게임장애는 더 지독하다. 치료 목표가 불분명하다. 알콜 중독, 도박 중독이면 술과 도박을 끊는 단주, 단도박이 궁극적인 치료 목표가 된다. 그럼 게임장애는 게임을 딱 끊는 것이 가능한가? 인터넷이 되지 않으면 누군가와 소통조차 어려운 시대에 인터넷 핵심 콘텐츠 게임을 피해서 사는 것은 가능하지도, 바람직하지도 않다. 이렇게 본질적 속성이 다른 게임을 술과 비교하여 질병화가 타당하다는 주장은 몰라도 너무 모르거나, 알고도 그랬다면 사악한 거다.

적당히 하면 된다고? 프로게이머나 게임 개발자를 꿈꾸는 이들에게 적당한 게임 시간은 도대체 얼마일까? 아니 게임개발자를 꿈꾸는 이들은 크리에이터 지망생보다 많아야 할까? 반대일까? 아니면 비슷해야 하나? 근데 이런 것을 정신과 의사 선생님은 칼로 무 베듯 딱 결정해서 정해주실 수 있을까? 이건 의사 선생님의 영역이 아니라 생활지도 선생님, 부모님과 상의해야 하는 영역이다. 좀 더 크면 자기가 스스로 감당해야 할 몫이다. WHO에서 진로도 정해준다면 학생들은 학교 대신 병원으로 가야 할 것이다. 그럼 학생이 아니라 환자란 뜻?

게임장애라는 불치병의 근본 원인을 제공하는 게임산업도 목표가 사라지기는 마찬가지다. 2016년 기준 연 매출 10억 원 이상의 게임은 출시된 게임 중 0.8% 밖에 되지 않는다. 절대 액수로 10억 원이라면 작은 돈이 아니지만, 게임을 개발하고, 운영하는데 큰 비용이 들어가는 구조를 생각하면 10억 원은 결코 돈을 번 성공한 게임이라고 보기 어렵다. 그런데 그 정도에 들려면 100개 중 1개에 들어야 한다. 정말 죽을 만큼 노력을 해서 만들어도 눈높이가 엄청난 국내 게이머들의 취향을 맞추기가 어렵다. 그런데 너무 게임에 빠져서는 안 되도록 조절을 하라는 주문은 ‘아껴서 오래 먹이되, 너무 아끼지는 말라’던 영화 '남한산성'의 인조 대사처럼 무책임하게 들린다. 그건 이룰 수 없는 목표다. 그냥 버티다 죽으라는 말의 다른 표현이다. 대사를 조금 바꾸어 ‘건강하게 오래 살게 하되, 너무 오래 살게 하지는 말라’라고 의료계에 주문하면 의사 선생님들은 충분히 이해하고 실행하실 수 있을까? 자기도 못 하는 것을 타인에게 시켜서는 안 되는 법이다.



▲ 인조 “아껴서 오래 먹이되, 너무 아끼지는 말라”(출처: 영화 남한산성)

영화 '남한산성'에서 무능력한 임금 인조(박해일 분)는 '얼마나 아껴야 하겠습니까'라는 질문에는 “그것까지 내가 정해주랴”고 짜증을 낸다. 이 대사는 게임장애를 목전에 둔 상황에도 유효하다. “(게임을) 재미있게 만들어 오래 즐기도록 하되, 너무 재미있게 만들지는 말라??”


감당하기 위험한 결정, 게임장애

나는 1% 미만의 소수 게이머를 도와주기 위해 ‘게임장애’를 공식화해야 한다는 주장은 사람과 사회에 대한 몰이해에서 비롯되었다고 생각한다. ‘게임장애’는 돌멩이에 붙이는 명칭이 아니다. 살아있는 우리의 가족, 이웃들을 부르는 인간류의 이름 붙이기다. 그렇기에 ‘게임장애’의 공식화는 실행성과 정치성을 동반한 후폭풍을 가져온다. 이런 것을 고려하지 못하고, 당장 부작용을 겪는 게이머만 보면서 이런 주장을 한다면 순진한 거다.

누구나 겪을 수 있는 문제를 불치의 병으로 만들어 어마어마한 규모의 의료보험재정 탕진은 계산해 보았는지 모르겠다. 추정도 불가능한 온-오프라인 상의 사회적 비용은 또 어쩔 셈인가? 무책임한 ‘게임장애’ 추진이라는 비난을 받지 않으려면 당장 멈추어야 한다. 그리고 얻을 수 있는 이익과 발생할 비용을 면밀하게 검토해야 한다. 앞선 근거를 통해 추론컨대 경제성이 0에 가까우리라 나는 확신한다. 그럴 리는 없겠지만, 이런 것들을 예상하면서도 ‘게임장애’를 추진한다면, 그건 무엇으로도 용서가 안 되는 범죄인 거다.

어떤 경우든 게임장애의 공식질병화 여부는 우리 사회와 미래를 회복불가능한 불구로 이끌 수도 있는 위험한 결정임에 분명하다. 게임을 하든 하지 않든, 좋아하든 그렇지 않든 미래를 함께할 모든 이들이 관심을 가져야 할 절박한 이유다. 대통령의 관심을 포함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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