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게임 산업의 다음 발걸음, '멀티 플랫폼'

칼럼 | 정재훈 기자 | 댓글: 19개 |



국내 게임산업의 한 해를 마무리하는 지스타 2019도 막을 내렸다. 벌써 수년째 지스타 시즌마다 부산을 방문하고 있지만, 올해는 퍽 다른 모습이었다. 매년 조금씩 달라지고는 있지만, 올해는 유독 변화가 크게 느껴졌다. 2015년, '레이븐'이 대한민국 게임대상에서 대상을 수상한 이후, 작년에 이르기까지 지스타는 사실상 '모바일게임쇼'에 가까웠다. 간혹 등장하는 PC, 콘솔이나 VR게임 등은 말그대로 곁다리. 거대한 부스에 수백대의 스마트폰이 가지런히 놓여 관객을 기다리는 모습은 요 몇년 간 지스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모습이었다.

'펄어비스'가 아마 신호탄이 된 듯 싶었다. 이번 지스타에서 펄어비스는 무려 4종의 신작을 발표했는데, 모두 게이머들에게 좋은 반응을 불러왔다. 여기서 재미있는 점은, 4종의 게임 중, 순수 모바일 게임은 하나도 없었다는 것이다. PC를 기본으로, 콘솔과 모바일을 포용하는 형태. 모바일은 그 게임들이 지원하는 여러 플랫폼 중 한 자리를 꿰차고 있을 뿐이었다.

변화의 코드는 '멀티플랫폼'이다. 오늘날, 게임에 있어 플랫폼의 구분은 점점 희미해지고 있다. 여전히 단일 플랫폼 전용으로 개발되는 게임들이 많지만, 하나의 게임을 여러 플랫폼에서 구동하고자 하는 움직임은 수 년째 이어져 이제 시장에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비단 펄어비스뿐만 아닌, 많은 게임사들이 자사의 게임을 여러 플랫폼에서 소화해내고자 노력하고 있다. PC 게임을 모바일로 컨버전한다던가, 이미 출시된 모바일 게임의 PC 버전 출시를 알리는 뉴스 등이 이에 대한 방증이다.

생각해봄직한 주제다. 바야흐로, 대한민국 게임 산업은 또다시 격변의 시기에 섰다. JRPG의 카피캣이 넘쳐나던 90년대 초를 지나 RTS 붐을 거친 대한민국 게임산업은 MMORPG 시대를 지나 모바일 게임 부흥기를 지나왔다. 게임산업의 트렌드는 급류와 같다. 급격하게 변하고, 수 년에 한 번쯤은 흐름이 완전히 변한다. 그리고 지금, 다음 시대의 트렌드는 무엇이 될 것인가?





이미 변화는 시작되었다.
과도기적 모습을 보이는 현재의 '대세'게임들


지스타에서 펄어비스가 인상적인 모습을 보여준 것은 사실이지만, 펄어비스가 이 흐름을 앞장서서 이끄는 것은 아니다. 하나의 게임을 여러 플랫폼에서 구동하고자 하는 움직임은 수년 전부터 이미 여러번 이뤄졌다. 성공적인 사례를 몇 가지 꼽자면, 아예 크로스플랫폼을 지원하는 '하스스톤'이나 '언더로드', '포트나이트' 등이 있다. 이번 지스타에 출전한 미호요의 '원신 임팩트'도 PC와 콘솔, 모바일을 모두 지원하는 게임이다. 심지어 전통의 PC게임 개발사였던 넥슨도 '카트라이더: 드리프트'를 멀티플랫폼으로 공개했다. 아직 모바일까지는 발표하지 않았지만, PC와 함께 콘솔 버전을 공개했다.



▲ 처음부터 멀티플랫폼으로 기획된 '원신'

최근 몇 년간 모습을 보인 게임들 또한 모바일 전용 게임에서 멀티플랫폼으로 넘어가는 중간 단계의 과도기적 모습을 보인다. 이른바 '레볼루션' 시리즈의 게임들의 경우, 원본 PC 버전을 최대한 그대로 옮기되 조작 체계만 모바일에 맞도록 조정했다. '리니지M'이나 '검은사막 모바일'의 경우에도 마찬가지. 화면을 확대해서 슬쩍 보면 잘 구분되지 않을 정도로 유사하다. 엄연히 다른 게임이지만, 지향점은 노골적으로 원본 PC 게임이다. 여기서 한 걸음 더 나간 'V4'의 경우엔 모바일 게임으로 시작해 PC 버전 출시를 발표했다.

기존의 모바일 게임 이상의 게임성을 추구하지만, 아직 모바일 게임이라는 껍질을 모두 벗지는 못한 모습이다. 아직까진 어쩔수가 없다. 모바일 기기 자체의 하드웨어 한계도 있고, 영원한 숙제가 될 조작 체계의 문제도 있으니까. 하지만 그럼에도 개발사들은 끊임없이 'PC게임과 같은 경험'을 만들기 위해 고심한다. 지금 당장의 대세는 아니지만, 멀티플랫폼으로의 변화는 머나먼 미래가 이미 진행중인 사안이다.



▲ PC 게임에 근접한 퀄리티에 모바일 게임의 조작을 가미한 형태의 '검은사막 모바일'

여기서 의문이 생긴다. 모바일 게임의 시장성은 이미 수없이 검증되었다. 지금 이 시간에도 대형 모바일 게임의 개발사들은 엄청난 수익을 거두고 있다. 그럼에도 이 수익을 거두는 개발사들이, 속속 새로운 프로젝트를 통해 플랫폼의 다양화에 기반한 변화를 시도하고 있다. 어째서 이런 변화가 일어나는 걸까? 오랜 기간 이어져온 모바일 강점기가 흔들리게 된 까닭이 무엇인가?


게이머도, 개발사도 변했다.
모바일 전용 게임에 대한 피로, 한계에 달한 시장


게이머들은 성숙했다. 내일의 게이머는 오늘의 게이머와 다르다. 모바일 게임 시대를 겪으며 게이머 인구는 폭증했고, 이제 게임은 한국인들에게 너무나 대중적이면서 즐기기 쉬운 취미가 되었다. 모바일 게임이 폭발적으로 성장하던 시기, 개발사는 보다 많은 게이머들이 손쉽게 접할 수 있는 게임에 집중했다.

물론, 모든 게이머들이 모바일 게임을 환영한 것은 아니다. 오랜 시절 게임을 즐겨온 비교적 소수의 코어 게이머들은 모바일 게임 특유의 얕은 깊이에 만족하지 않았다. 하지만 세월이 지나면서 대중은 게임이란 매체에 익숙해졌고, 오늘날 코어 게이머의 숫자는 당시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늘어났다. 모바일 게임 개발의 트렌드가 '접근성'에서 '콘텐츠의 깊이'로 변해오고, 나아가 지금의 과도기적 형태를 보이는 것도 이 때문이다.

하지만 여전히 대세는 모바일 게임이었고, 이는 곧 모바일 게임에 대한 대중의 피로로 이어졌다. 신작을 알리는 소식에서 '또 모바일 게임인가?'라는 댓글을 보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다. 애니팡에서 V4에 이르기까지 모바일 게임은 꾸준히 발전해왔지만, 아직 태생적 한계를 극복하지 못했다. 손바닥만한 기기로 구동할 수 있는 게임에는 한계가 있고, 게임 경험 또한 이에 따라 제한된다. 대중의 요구는 끝없이 변화하고, 심화된다. 오늘날 게이머들은 이제 모바일 게임만으로는 만족할 수가 없다. 오죽하면, 모바일 게임 외에도 게임이 등장해서 이번 지스타가 만족스러웠다는 평가도 꽤 많이 보일 정도다.



▲ 어느순간 PC가 마련된 시연공간은 꽤 낯선 모습이 되었다

덤으로, 시장의 구조도 바뀌었다. 모바일 게임 시장이라 해서 무한한 가능성을 지닌 시장은 아니다. 수년 간 시장의 크기는 확대되었지만, 그만큼 대형 게임사들의 점유율도 늘어났다. 막대한 개발비를 쏟아부은 몇몇 게임이 시장 매출의 절반 이상을 가져가고, 하나 정도 히트작을 가진 중소 게임사들은 이 매출을 유지하기 위해 쫓기듯 신작을 개발하거나 업데이트에 매진해야 하는 상황이 되었다. '대세감'에 큰 영향을 받는 모바일 게임 특성 상, 뜨는 것은 순간이지만, 지는 것도 순간이다. 한 해에도 수없이 많은 게임이 등장하고, 그중 대다수가 얼마 못 가 운영을 종료하는게 지금의 모바일 게임 시장이다. 솔직히 말해 꽤 잔혹한 환경이다.

게이머들은 모바일 이상의 무언가를 원하고, 개발사들은 과점과 살인적 경쟁이 벌어지는 지금의 모바일 시장에서 더 이상 무언가를 기대하기 힘들게 되었다. 기존 시장이 '모바일'이라는 플랫폼을 근거로 이어진 만큼, 반전을 꾀하려면 플랫폼에 변화를 줄 수밖에 없다. 사실상 이 시기에, '탈모바일'을 지향하는 게임들이 등장하는 것은 필연에 가깝다. 생산자와 소비자 모두가 변화를 느끼는 상황이기 때문이다.



▲ V4는 PC 버전 출시로 또다른 시장을 모색하고 있다.


기술의 발전, 모바일 게임의 한계는 사라졌다.
굳이 '모바일'이어야 할 이유가 점점 사라진다.


이런 변화에 속도를 붙이는 외적 변화도 있다. 올 한 해, 게임 산업의 뜨거운 이슈 중 하나는 스트리밍을 통한 클라우드 게이밍의 상용화다. '지포스 나우'와 '구글 스태디아'등, 서버에서 게임을 구동, 연산하고 넷 상에서 조작으로 게임을 플레이하는 슬슬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다. 수년 간 클라우드 게이밍과 서버에 투자해온 MS의 '믹서(MIXER)'의 경우, 베타 테스트 기간임에도 인풋렉이 거의 느껴지지 않을 정도의 완성도를 보여줄 정도다.

여기서, 한가지 중대한 변화가 생긴다. 지금의 모바일 '전용' 게임은 어쩔수 없이 한계에 부딪힌다. 휴대 기기이기에 접근성에서는 무엇도 따라올 수 없지만, 그 휴대 기기라는 점이 문제다. 모바일 게임 중에는 'PC, 콘솔 게임 감성'을 그대로 느끼게 해주겠다는 캐치프레이즈를 쓰는 게임이 많은데, 사실 이 말이 역설적으로 기존 모바일 게임의 한계를 잘 드러낸다. 비슷하게 만들기가 매우 어렵기 때문이다.



▲ 지난 19일 정식 출시된 구글 '스태디아'

하지만, 클라우드 게이밍이 시동을 걸리면서 하드웨어의 성능이란 허들은 사라졌다. 스마트폰에 연결할 휴대용 컨트롤러면 충분, 어디서나 PC, 콘솔 게임을 큰 차이 없이 즐길 수 있다. 물론, 아직 상용화 초기인데다 전제가 되는 5G 무선망도 보급률이 높지 않아 잘 느껴지지 않겠지만, 현재가 아닌 미래를 생각하면 시간 문제일 뿐이다. 스트리밍을 통한 게임플레이가 일상에 파고들면, 기존의 모바일 전용 게임의 메리트는 지금보다 훨씬 떨어지게 된다. 익숙한 게임을 원하거나, 캐주얼 게이머를 지향하는 소비자들 덕에 수요는 유지되겠지만 말이다.



▲ '지포스 나우'도 국내 통신사와 제휴해 서비스를 준비 중이다.

클라우드 게이밍과 별개로, 모바일 기기 자체도 놀라울 정도의 발전을 이뤄냈다. 펄어비스가 이번에 발표한 게임들 중 일부나, 첫 파트에서 나열한 PC, 모바일 겸용 게임들은 지금도 모바일 기기에서 구동이 가능하다. 클라우드 게이밍에 의존하지 않고서도 이제 PC 게임에 근접하는 퀄리티의 게임을 모바일 기기에서 즐길 수 있다.

클라우드 게이밍이 지름길이라면, 모바일 기기의 발전과 모바일 게임 자체의 진화는 정통의 길이다. 아직까진 완전히 같은 경험을 줄 수 없지만 언젠가 간극이 줄어들고, 끝내 사라지게 된다면, 모바일 '전용'이 어떤 의미가 있을까? 휴대 기기의 작은 화면으로 PC 게임과 같은 경험을 어떻게 할 수 있을까 싶지만, 그 때가 되면 컨트롤러 체계도 어찌 변할지 알 수 없다. 언제나 산업은 새로운 해답을 찾아낸다.



▲ 기존의 모바일 게임도 점점 거치형 플랫폼과 비슷한 수준으로 나아가고 있다.


다음 시대의 화두, '멀티 플랫폼'
플랫폼과 무관한 '하나의 게임'이 온다.

머지않은 미래에 일어날 일이다. 한국 게임 시장의 역사를 되짚어 보면, 초기형 콘솔 이후 PC게임이 대세가 되었고, 이후 모바일 게임이 주류를 차지했다. 그리고, 이제 다음 시대는 '플랫폼의 구분'이 사라지는 시대다. 클라우드 게임과 모바일 기기의 발전은 굳이 게임 사양을 '모바일 기기'에 맞춰야 할 이유를 줄였다.

대다수의 콘솔 게임은 이미 오래 전부터 기간 독점이나 퍼스트파티가 아닌 경우 PC 포팅을 전제로 개발한다. 따로 콘솔 버전과 PC 버전을 구분하지도 않는다. 이제 모바일도 이 '하나의 울타리'에 들어올 준비를 하고 있다. 자연스러운 일이다. 모바일 전용 게임에 대한 게이머의 피로와 보다 코어하고 깊은 게임 경험을 원하는 게이머, 더이상 파고들 틈이 없을 정도로 과포화된 시장을 마주한 채, 콘솔 게임급 퀄리티의 게임을 뽑아내고 싶은 개발사. 소비자와 생산자가 바라는 바가 일치한다.



▲ 누구도 포트나이트를 '모바일'과 'PC'로 구분하지 않는다. 그냥 '포트나이트'일 뿐

물론, 지금 바로 모든 플랫폼에서 동일한 게임 경험을 얻기는 불가능한 일이다. 앞서 여러번 말한 컨트롤러의 한계도 있으며, 클라우드 게이밍은 이제야 태동한 단계에다 그마저도 인풋렉을 비롯한 자잘한 기술적 과제를 쌓아둔 상태다. 하지만 '애니팡'수준에 머물렀던 모바일 게임이 '검은사막 모바일'까지 이른 시간이 채 10년이 걸리지 않는다. 변화에 따른 진통은 피해갈수 없겠지만, 모든 플랫폼의 구분이 무의미해지는 날은 반드시 오게 되어 있다.

결국, 몇 년 후 시장의 대세는 모바일 게임도, PC 게임도 아닌, 그저 '하나의 게임'이다. 각각의 플랫폼에서 해당 플랫폼에 맞는 게임 경험을 줄 수 있는 게임. 나아가 플랫폼과 무관히 이름 하나로 정체성을 정의할 수 있는 게임. 산업의 구성원 대부분은 트렌드를 따라간다. 하지만 소수의 개척자는 트렌드를 미리 읽고, 이를 이끈다. 당장은 조금 먼 이야기일지도 모르겠으나, 산업의 흐름에 발맞춰 나가고자 한다면 '멀티플랫폼'이라는 화두를 한 번쯤은 곱씹는게 좋지 않을까? 내년, 그리고 후년의 지스타에서는 더 많은 다양한 플랫폼의 게임을 볼 수 있도록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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