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수첩] 'PS VR', 콘솔 기반 VR이 가진 남다른 의미

칼럼 | 정재훈 기자 | 댓글: 60개 |


VR에 관심을 둔 후로, '오큘러스'를 체험할 기회는 왕왕 있었다. 개발자용 키트가 돌아다니던 때부터 적극적으로 체험을 위해 나서곤 했으니 말이다. 하지만 그에 비해 '프로젝트 모피어스'라는 이름으로 개발되던 'PS VR'은 체험해볼 기회를 쉽사리 잡지 못했다. 'PS VR'은 극히 제한적인 경우에만 시연하곤 했고, 대부분은 해외 게임쇼에서 이뤄졌기 때문에 아쉽지만 어쩔 수 없었다.

그 와중 11월 4일, 지스타 2015를 앞두고 넥슨 아레나에서 진행된 SCEK의 미디어 간담회는 드디어 잡은 좋은 기회였다. 행사 시작 전 아침 일찍 먼저 체험 기회가 있음을 알고 평소보다 한 시간 먼저 일어나 도착한 간담회 현장. 자리를 잡기 무섭게 일어나 시연장으로 향했다. 체험용 타이틀은 '섬머 레슨'. 개인적으로 취향에 맞는 게임은 아니지만, VR을 체험하기 위한 콘텐츠로는 내심 최고의 소재라 생각하고 있던 터라 더욱 기대되었다.

하드웨어를 머리에 장착하는 과정은 의외로 간단했고, 착용감 또한 생각보다 편했다. 볼트형 톱니바퀴를 조절해 조이는 정도를 조절할 수 있기 때문에 너무 조여서 머리가 아프거나, 혹은 헐겁지도 않았다.



▲ 화려한 외형이지만 무게가 정수리에 집중되어 불편하지 않다

시작된 시연. 잠시 앞이 어두워진 이후, 내 눈앞에 해변이 들어왔다. 그리고 그곳에, 기타를 치며 노래를 부르는 금발 소녀의 뒷모습이 있었다.


■ VR로서의 기능은 '확실'

게임은 굉장히 간단했다. 시작하면 나는 처마 밑에 앉아 있고, 소녀가 기타를 치다 불현듯 나의 존재를 발견하고 다가온다. 분명히 게임인 것을 잘 알고 있고, 밖에서 볼 때 내 모습이 어떤지도 잘 알고 있지만, 얼굴을 바짝 들이미는 소녀의 모습을 보고 나도 모르게 흠칫할 수밖에 없었다. 시야의 80%를 차지하게 되면 거짓도 진짜처럼 보인다는 말이 틀린 말은 아니었다.

이후 몇 번의 대화가 오간다. 소녀는 미국인으로, 일본어를 배우기 위해 가정 교사를 초빙했는데, 그 가정 교사가 나인 모양이다. 본인이 직접 쓴 일본어 노트를 들고 뜻을 물어보는데, 문제는 나도 일본어를 전혀 모른다는 거다. 이 과정에서 노트를 조금 더 자세히 들여다보기 위해 고개를 돌리거나, 얼굴을 들이밀어 노트에 가까이 가져다 댈 수 있다. 그래 봐야 뜻은 모르니까 정신없이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지만.



▲ 눈을 동그랗게 뜨고 이게 맞냐고 묻는데 일본어를 하나도 몰라서(...)

그렇게 짧은 대화가 끝나고 나면, 소녀는 이제 됐다고 가라고 한 후 매정하게 떠나 버린다. 아참! 가기 전 잠깐 가만있으라고 하더니 진짜 가깝게 얼굴을 들이미는데, 이때만큼은 산전수전 다 겪었다고 자부하는 나도 식은땀이 흘렀다. 어깨에 붙어 있던 나비가 신경 쓰였나 보다.

'섬머 레슨'의 시연에서 내가 가장 중점을 두고 관찰한 사안은 그래픽의 렌더링 상태나 게임으로서의 완성도가 아닌, 이 체험이 '얼마나 현실처럼 느껴지는가?'였다. 그리고 내 심장은 적어도 확실히 반응했다. "그깟 폴리곤 덩어리에 심장이 쿵쾅대다니 기자님 여자에 너무 약하시네"라고 말해도 사실 할 말 없다. 나 역시 체험 10초 전까지만 해도 '절대 안 속는다'라는 심경으로 기계를 썼으니 말이다.



▲ 진짜 이렇게 쳐다보는데 가짜인거 알면서도 심장 떨어진다.

'PS VR'을 통해 체험해 본 '섬머 레슨'은 비록 시각과 청각 정보만을 나에게 전달했지만, 이성적 영역을 넘어 내 본능을 건드리기에는 충분한 위력을 갖추고 있었다. 그리고 이 말은 곧, 'PS VR'이 VR이라는 장비가 가지는 근본적 목적, 즉 '몰입도 높은 체험'을 선사하기에 충분한 스펙을 가지고 있다는 뜻이었다. 'PS VR'은 분명히 충분한 가능성을 가지고 있었다. 물론 그것이 전부는 아니지만 말이다.



■ 불안한 해상도, 'PS4'의 한계는 어떻게 넘어설 것인가?

내가 걱정하는 것은 'PS VR'이 다른 VR 장치와 확연히 다른 태생을 갖고 있다는 점이다. '오큘러스'나 밸브의 '바이브'와 같은 VR 장비들은 일반적으로 PC에서 구동하는 것을 베이스로 삼는다. 그 말은 곧, 그래픽을 직접 구현해내는 'GPU'의 실질적인 한계가 없다는 뜻이다.

과거 AMD에서 진행했던 VR 전문 소프트웨어 툴킷인 'Liquid VR'의 설명회, 그리고 NDC의 VR 관련 강연회에서 이런 이야기를 들었다. "인간이 직접 보는 시각과 최대한 비슷해지기 위해서는, 양안에 UHD급(쉽게 말해 4K급) 해상도의 스크린에 대응해야 한다." 말이 UHD지, 단일 모니터로 송출하는 UHD영상도 웬만한 그래픽 카드는 버거워한다. 덤으로 VR 장비는 주사율(프레임)이 굉장히 중요한데, VR의 기본인 90Hz 이상의 주사율을 유지하려면 GPU가 더욱 빡빡하게 굴러갈 수밖에 없다.



▲ 현재로서는 무난한 수준이지만, 앞으로 유저들은 더 많은 것을 요구할 것이다

문제는 'PS4'의 하드웨어 스펙이 이와 같은 고화질의 그래픽 송출을 하기엔 턱없이 부족하다는 뜻이다. 물론 오늘날의 콘솔은 기본적으로 '게임 구동과 그 연산에 최적화된' PC의 개념으로 볼 수 있기 때문에 동급 가격대의 PC에 비해 구동 능력이 월등히 앞서긴 한다. 하지만 현재 시장에 나온 최고급 PC는 이미 콘솔의 사양을 아득히 뛰어넘었으며, 이 법칙은 과거부터 쭉 이어져 오고 있다. 효율 자체는 'PS4'가 PC보다 좋을 수 있지만, 전체적인 사양에서는 밀릴 수밖에 없다는 이야기다.

실제로 'PS VR'의 해상도는 1920 X 1080(한쪽 눈 당 960 X 1080)이며, 주사율은 120Hz - 90Hz다. 주사율은 크게 문제가 없으나, 게임을 하다 보면, VR로서는 아쉬운 해상도 때문에 화면이 자글거리는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마치 어릴 적 TV를 코앞에서 보다 어머니에게 혼날 때의 그 화면과 같다고 해야 할까?



▲ PC에 비해 모자란 PS4의 하드웨어 스펙은 걱정되는 부분

결국 'PS VR'은 상황 연출과 착각을 통해 VR의 본질적인 구실을 할 수는 있지만, VR의 또 다른 장점인 '보는 맛'을 충족시키기엔 아직 부족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 더 암담한 것은, 'PS4'라는 콘솔에 귀속된 'PS VR'의 특성상, 앞으로 성능의 개선 여부 또한 불투명하다는 점이었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개발자들과 소니의 고민이 필요할 것 같다.



■ '보급력'은 탁월, VR 콘텐츠의 데뷔 무대로는 '적합'

하지만 'PS4'를 베이스로 삼는다는 'PS VR'의 특징은 달리 해석하면 강력한 장점이 될 수도 있다. 'PS4'가 게이밍 기기로서 PC보다 우위에 있는 건 바로 '가격'이다. 제대로 된 게임 좀 돌릴만한 PC는 보통 80~100만 원의 돈이 필요하며, 최소로 잡아도 60만 원은 들여야 그럴싸한 PC를 마련할 수 있다. 하지만 'PS4'의 경우 그 절반 정도의 금액만 있다면 충분히 마련할 수 있다. VR을 무리 없이 구동하기 위해 높은 사양의 PC가 필요하다는 것을 생각해 보면 가격 문제는 생각보다 큰 이점이다. 과거와 비교하면 콘솔 보급률이 꽤 높아진 것도 'PS VR'에게는 청신호일 테다.



▲ 10월 초 단행한 가격 인하 덕에 경쟁력이 더욱 강해졌다

더불어 '규격화된 콘솔'이라는 점도 장점이 된다. 이 말은 'PS VR'을 즐기는 유저들이 모두 같은 환경에서 같은 엔터테인먼트를 즐길 수 있다는 뜻인데, 단순히 '유저간의 사양 격차'의 문제뿐만 아니라 멀티 플레이 환경에서의 호환성이나 VR 게임에 대응하는 '인프라'의 구축 면에서 고려할 면이 많은 PC 환경에 비해 훨씬 유리하다. 콘텐츠를 개발하는 개발자로서도 다양한 경우를 가정할 필요 없이 딱 PS4의 사양에 맞추면 되니 개발 과정이 더욱 편리해진다.

쉽게 생각해도 'VR 한번 시도해 볼까?"라는 생각에 VR을 알아보게 되면, 비싸게 PC를 새로 맞추고 다른 플랫폼을 알아보는 것보다 간편하게 'PS4'를 구매한 후 'PS VR'을 시도하는 것이 더 편할 거다. PC가 점점 더 발전하고, 그에 맞춰 PC 기반의 VR 장비들이 더욱 발전하게 되면 불리해질 수도 있으나, 성능의 편차가 크지 않은 초기 인구를 잡기에는 훨씬 이상적이다.



▲ 기반이 같은 만큼 VR 관련 인프라의 구축도 훨씬 편하다

장기적으로 보았을 때, 'PS VR'이 가지는 높은 보급 잠재력은 VR 시장 전체의 저변 확대에도 좋은 영향을 주게 될 것이다. 신기술이 삶에 적용되는 과정에서 대중은 일단 '경계'와 '호기심'을 먼저 갖고, 그다음 '경험'의 단계로 나아가는 게 통상적이다. 진입 문턱이 타 VR 장비보다 낮고, 인프라도 잘 닦여 있을 'PS VR'은 '경험'으로 나아가는 단계에 분명히 한몫을 해낼 것이다. 이후 VR에 익숙해진 유저들이 새로운 시도를 이어가다 보면 어느새 VR이 일상생활에 굉장히 밀접한 기술이 되어 있을 테고 말이다.

이렇듯 'PS VR'을 체험하고, 소니의 발표를 들으며 내가 느낀 것은 'PS VR'이 VR 시장의 정점에 이를지는 모르겠으나, VR 시장의 저변을 확대하고, 대중에게 VR을 알리는 데는 최적화되어 있는 장비라는 점이었다. 또한, 개발 환경도 유리하고, 진입 장벽도 다소 낮으니 VR에 입문하고자 하는 개발자들에게도 'PS VR'은 최적의 데뷔 무대가 아닐 수 없다.

'PS VR'의 발매 예정 시기는 내년 초. '오큘러스'를 비롯한 PC 기반 VR 장비들도 슬슬 모습을 드러내는 시기다. VR 관련 업체들이 시장의 초기 주도권을 두고 불꽃 튀는 경쟁을 벌이게 될지, 혹은 시장을 사이좋게 나눠 가지며 상생의 길을 걸어갈지 아직 나는 감히 예단하지 못하겠다. 그러나 항상 새로운 무언가를 바라는 유저의 입장에서, 이 '기다림'은 기분 좋은 일임이 분명하다.



▲ VR에 도전하는 개발사들에겐 최적의 데뷔 무대일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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