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칼럼] 가상 현실(VR) 기술과 게임 엔진

칼럼 | 이득우 대표 기자 | 댓글: 40개 |



이득우 대표님은 유니티 테크놀로지스의 한국 지사에서 이사로 근무하였고, '유니티4 게임 개발의 정석'을 집필한 바 있습니다. 현재는 인디디벨로퍼파트너스 대표로 게임 엔진과 미들웨어에 관련된 전문 교육과 국내외 다양한 인디 게임 행사를 진행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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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외부 필진의 기고 내용은 본지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2012년, 7월 4일, 미국의 썬비치 힐튼 호텔에서 게임 업계의 내노라 하는 베테랑 세 명이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이 기다리는 사람은 팔머 럭키(Palmer Luckey)라는 19세의 젊은 청년으로, 약속보다 한참 늦은 시간에 티셔츠에 슬리퍼를 신고 나타났다. 팔머 럭키는 아버지 창고에서 그가 직접 만들었다는 케이블이 뒤엉켜있는 조잡한 전자 기기와 테이프로 칭칭 감긴 검은색 벽돌 모양의 헤드셋을 상자에서 꺼낸 후, 한 사람씩 차례대로 머리에 씌워주었다. 그리고 얼마간의 시간이 흘렀다. 헤드셋을 벗은 베테랑 세 명은 조용히 서로를 쳐다보았다.

“오 마이갓”

이것이 전설적인 오큘러스 리프트의 시작이다. 시작부터 게임 산업을 들썩이게 만든 이 멋진 장치의 발전 과정은 해마다 모든 게임 쇼에서 화두가 되었고, 킥스타터 펀딩 최고 금액 기록(약 290억원), 페이스북 인수(약 2.5조원)와 같은 숱한 화제를 일으켰다.



▲ 오큘러스 리프트의 제작 변천사

그로부터 5년이 지난 2016년 지금, 정식 출시를 눈 앞에 둔 오큘러스는 삼성, 소니, HTC, 구글과 같은 경쟁자(또는 협력자)들과 함께 선두에서 VR 분야의 새로운 지평을 열고 있다.

2016년도는 가상 현실(VR) 원년이라고 할 만큼 VR에 대한 관심이 유난히 뜨겁다. 특히 IT 업계가 가상 현실을 새로운 미래 기술로 주목하면서, 어느 정도 독자적인 영역이었던 게임 엔진 기술에도 관심을 보이기 시작한 것은 필자도 조금 당혹스러울 정도다.

가상 현실은 단순히 예전에 나온 키넥트나 Wii-U 컨트롤러에서 발전한 조금 비싼(?) 게임 플레이 장치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분명 있을 것이다. 하지만 필자가 체감하는 가상 현실에 대한 업계의 기대는 훨씬 그 이상이다. 가상 현실을 통해 인류의 새로운 혁신이 탄생하길 기원하는 거대한 아우라가 느껴질 정도다. 과연 삼성, 구글, 페이스북 등 유수의 기업들은 VR을 통해 무엇을 기대하는 것일까? 그리고 우리는 어떤 미래를 마주하고 있는 것인가?


가상 현실의 핵심 키워드. 현실성(Presence)

VR 산업을 바라보는 관점은 여러가지가 있지만 전반적으로 공감하는 보편적인 프레임은 VR은 인류의 새로운 표현 수단(evolutionary narrative)이라는 것이다.

VR은 3차원 공간을 활용해 의사를 전달하고, 3차원 가상 세계 내에서 스토리를 서술해 낸다는 점에서 2차원을 매개로 했던 기존 방식과 큰 차이를 가지고 있다. 이 새로운 방식이 제대로 동작하기 위해서는 현실성(Presence), 다시 말하면 가상 세계로의 완벽한 몰입감이 반드시 필요하다.



▲ 영화에서 게임으로, 게임에서 VR로의 진화

이러한 이유로 VR 산업을 이끌어가는 선두 기업들은 가상 현실 산업을 진행할 때 몰입도를 높이는 것을 우선 과제로 삼고 있다. 초기 사용자가 가상 현실을 경험하는 단계에서 어설픈 현실감으로 시작하는 단계에서 경솔하게 서둘러 사용자의 경험을 망쳐버리면, 지금까지 공들여 준비해온 이 산업이 한순간에 거품으로 취급되지 않을까 노심초사하는 긴장감이 은연중에 깔려있다. 오큘러스가 소비자의 비난을 감수하고 600달러라는 높은 가격으로 출시를 결정하고, 사용자에게 높은 컴퓨터 하드웨어 스펙을 요구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 많은 사람에게 충격을 안겨준 오큘러스의 가격 발표

완벽한 몰입감의 전달은 오큘러스와 같은 헤드셋 제조업체 뿐 아니라 가상 현실을 열망하는 콘텐츠 제작자를 포함한 모든 게임 업계 종사자들이 함께 협력해 풀어야 할 과제와도 같은 것이다. 완벽한 몰입감을 위해기술적으로 무엇이 필요한지, 한번 살펴보자.


가상 기술의 최대 과제. 모션에서 화면까지의 지연시간(Motion-to-Photon Latency) 줄이기

가상 현실 기술은 머리의 움직임을 감지하고 변화를 기반으로 두 개의 모니터 화면에 반영하는 것으로 요약할 수 있다. 이러한 관점으로 보면, 가상 현실의 구현은 기존 게임 기술의 마우스 입력 처리를 머리의 움직임으로 대체하고, 모니터에 한 번 렌더링 하던 동작을 두 번 반복해서 렌더링하는 일견 간단한 원리로 이루어져 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앞서 언급했듯이 가상 현실이 추구하는 것은 단순히 두 번 렌더링된 화면이 아닌 완벽한 몰입감의 제공이다.

완벽한 몰입감을 구현한다는 것은 여간 까다로운 작업이 아니다. 기술적으로 미세한 머리의 움직임을 감지하자마자 두뇌가 알아차리지 못할 만큼 짧은 순간에 눈 앞에 배치된 두 개의 화면에 바로 결과를 반영해야 한다. 이를측정하기 위해 나온 지표가 모션에서 화면까지의 지연시간(Motion-to-Photon Latency)이다.



▲ 모션에서 화면까지의 지연시간의 개요

PC나 콘솔에서 모니터로 게임을 즐기는데 적절한 수치인 60FPS(초당 프레임 수)는 평균적으로 1/60초, 즉 16.67ms(밀리초)의 대기 시간(Latency)을 가진다. 하지만 이 수치가 VR로 넘어오면 바로 불합격 판정을 받는다. 바로 민감한 머리의 움직임 때문이다. 우리의 뇌는 수 ms 단위로 민감하게 머리의 움직임을 감지하는데, 지연 시간이 15ms 이상 넘어가게 되면 가상 현실에서는 몰입감을 주는데 실패했다고 판단한다.

가상 현실의 선두 주자인 오큘러스는 2014년도에 이 문제 해결을 위해 가격을 상승을 감수하고 디스플레이를 교체하였다. 기존에 사용했던 LCD패널이 OLED패널로 교체되자 화면이 바뀌는 빈도인 주사율(Refresh Rate)이60에서 90으로 크게 개선되었다. 소프트웨어와 그래픽 카드에서 빠른 속도로 렌더링을 수행해 이미지를 생산하더라도 하드웨어에서 화면이 따라가지 못한다면 무용지물이기 때문이다. 올해 출시되는 메이저 업계의 VR 기기는 모두 OLED 디스플레이가 장착되어 있으며, 최소 90Hz의 이상의 주사율을 제공한다. 이는 1/90초 측 11.11ms 단위로 화면이 갱신됨을 의미한다. ( 참고로 오큘러스 CTO 존 카맥(John Carmack)은 가상 현실에서 11.11ms의 지연 시간은 90~95%유저들에게 만족감을 준다고 언급한 바 있다. )



▲ 2016년도에 출시 예정인 메이저 가상 현실 헤드셋 기기.
모두 OLED 디스플레이를 탑재해90Hz이상의 주사율(Refresh Rate)을지원한다.

이렇게 하드웨어 스펙 기준이 상향 평준화 되자 자연스럽게 소프트웨어 쪽에서도그에 맞춰 숙제가 생겼다. 하드웨어 주사율에 맞춰서 어떤 상황에서든 11.11ms 이내로 렌더링이 수행되게 만드는것이다. 기존의 PC/콘솔게임은 즐기다가도 프레임 속도가 잠시 떨어지면 "어! 잠시 랙걸렸네"라고 대충 넘어갈 수 있지만, 화면이 눈 바로 앞에 붙어 있는 VR은 다르다. 두 프레임이 연속으로 같은 이미지를 보여주게 되면 빛의 자극이 강해져 심각하게 몰입감이 저하된다. 게다가 더 현실성 있는 경험을 제공하기 위해서는 프레임 수치를 안정적으로(Constant)으로 유지하는 것에도 신경을 써야 한다.

이는 줄넘기에 비유될 수 있다. 줄넘기에서 돌아가는 줄은 하드웨어고 안에서 뜀을 뛰는 사람은 소프트웨어다. 줄은 자동으로 11.11ms 마다 한 바퀴씩 돌아가고 있고, 점프하는 사람은 여기에 맞춰 줄에 안 걸리게 빨리 빨리 뛰어줘야 한다. 화면의 수, 그리는 시야 등을 감안했을 때 예전 PC 게임 만들던 때보다 최소 3배는 더 빨라야 한다.

소프트웨어가 11.11ms 마다 안정적으로 이미지를 찍어내기 위해서는 입력부터 디스플레이 출력의 각 과정에서 쥐어짜내듯 조금이라도 단축시켜야 한다.이 전체 과정은 아래와 같이 다섯 단계로 요약할 수 있는데, 각 과정에서 조금이라도 시간을 단축하기 위해 VR 하드웨어, 그래픽 카드 제조사, 표준 규약, 게임 엔진등 모든 업체들이 각자의 영역에서 새로운 솔루션을 발표하고 있다. 가상 현실시장이 활성화되는 것은 이들 업체에게도 큰 기회이기 때문이다.



▲ 입력으로부터 콘텐츠가 디스프레이 화면의 여정과 관련 업체 기술

이 프로세스의 중심에는 사용자의 콘텐츠 개발을 책임지는 게임 엔진이 자리잡고 있다. 콘텐츠 제작자에게는 최신 가상 현실 기술 트렌드를 바로 반영한 게임 엔진을 활용하는 것이효율적이기 때문이다. 지난 2월에 가상 현실 기술을 놓고펼쳐진 유니티와 언리얼, 두 게임 엔진의 전쟁도 표면적으로 드러나지는 않았지만 무척이나 치열하게 전개되었다.


가상 현실을 위한 유니티 엔진의 변화

유니티는 지난 달, 2월 10일에 열린 Vision VR/AR Summit행사를 주최함으로써 개발자 플랫폼 유니티의 존재감을 한껏 과시했다. 필자는 이번 행사를 영상으로만 봤지만, 이번 행사는 필자가 아는 기존의 ‘유니티 행사=개발자 행사’라는 공식을 깬 새롭고 신선한 행사였다. 유니티 대표 존 리키텔로의 세련된 사회로 시작된 키노트는 유니티라는 소프트웨어의 단순 소개가 아닌미래 VR 산업을 함께 고민하는 거시적인 관점의 주제로 진행되었으며, 유니티와 협력하는 수 많은 벤더들과, 유니티로 제작된 다양한 VR/AR 사례를 보여주는세션을 통해 유니티로 대동단결한 문화 축제 같은 분위기를 자아내었다. 특히 키노트 마지막에 깜짝 등장한 존 리키텔로와 팔머 럭키와의 대담은 현재 유니티의 위상을 보여주는 좋은 볼거리였다.



▲ 유니티 대표 존 리키텔로와 팔머 럭키

이번 행사에서는 기술적인 설명도 빠지진 않았다. 유니티 CTO인 요하킴 안테(Joachim Ante)가 직접 나와 다음 버전인 유니티 5.4는더블 와이드 렌더링(Double Wide Rendering)이라는 가상 현실에 최적화된 기술로 퍼포먼스를 크게 향상시킬 예정이라고 발표하였다.

Vision AR/VR Summit 2016의 전체 영상은 유튜브 채널에서 확인할 수 있다.



▲ 유니티 5.4에서 새롭게 선보일 기술 '더블 와이드 렌더링(DW)의 적용 전후 비교


언리얼 엔진이 제시하는 미래의 가상 현실기술

유니티가 Vision VR/AR Summit행사에서 다수의 지원군과 함께 먼저 포문을 열었다면, 언리얼은 전세계에서 가장 큰 모바일 행사인 MWC 2016에서 제대로 된 핵폭탄 한 방으로 응수했다. 갤럭시 S7을 처음 공개한 삼성 언팩 현장에서 발표한 프로토스타(ProtoStar) 데모다.

[▲프로토스타 데모]

작년 삼성전자와 에픽게임즈가 협력해 비밀리에 준비한 것으로 보여지는 이번 데모는 화려한 비주얼 이상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 새롭게 발표된 벌칸(Vulkan) API를 최초로 활용해 모바일에서 기존 가상 현실의 한계를 초월한 미래 가상 현실 콘텐츠의 청사진을 보여줬다는 것이다.



▲ 벌칸 API 홈페이지

기존의 모바일3D 그래픽은 비효율적인 OpenGL E/S 기술에 의존해왔는데, PC게임 제작에서만 사용할 수 있었던 여러 고급 렌더링 기술을 벌칸을 사용하면 모바일에서도 동일하게 사용할 수 있음을 데모를 통해 직접 증명한 것이다.

또한 이번 데모를 계기로 삼성 전자와 긴밀한 공동 작업을 통해 오큘러스-삼성 기어VR-언리얼 엔진이라는 모바일에서의 최적화된 파티 조합을 만들어내게 된 점도 큰 소득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협력 관계와 콘텐츠 제작의 경험은 언리얼 엔진에 반영되어, 향후 고퀄리티 모바일 VR 콘텐츠를 만드는데 많은 기여를 할 것으로 보여진다.

여담으로 유니티 행사에는 팔머 럭키가 등장했고, 삼성 언팩 행사에서는 오큘러스를 인수한 페이스북의 저커버그가 눈에 띄지 않게(?)깜짝 등장했다.



▲ 가상 현실 기기의 문제점

언리얼이 데모로 보여준 기술은 아직 삼성 갤럭시 S7 이상에서만 적용 가능한 기술이다. 하지만 이 기술은 가상 현실 산업이 원하는 미래의 방향이기 때문에 조만간 다른 핸드폰 제조사에도 전파될 것으로 예상된다.


정리하며

가장 저렴하면서 대중적인 가상 현실 기기, 구글 카드보드와의 플랫폼 제휴를 발표한 유니티, 최고급 모바일 기기에서 미래의 기술을 선보인 언리얼. 이 두 엔진은 경쟁자지만 서로 다른 전략과 행보를 보이고 있다. 다음 주에 다가오는 GDC에서 두 엔진은 언제나 그랬듯 우리에게 새로운 놀라움을 선사해줄 것이다.

게임 엔진과 기술에 대한 논쟁은 잠시 접어두고, 가상 현실 기술이 가져올 미래에 대해서 한번 생각해보자, 가상 현실은 좋게 말하면 가능성이 무궁무진한, 나쁘게 말하면 효용성에 아직 물음표가 있는 미지의 산업이다. 에픽게임즈가 지난 2월에 발표한 새로운 가상 현실 에디터는 콘텐츠 작업의 새로운 변화를 가져올 것인지 단순한 재미 요소로 끝날지는 아무도 모른다.

[▲ 에픽 게임즈가 발표한 VR 에디터]

스타크래프트 세대가 이전 세대에 존재하지 않았던 경이로운 마우스/키보드 손놀림을 보여줬듯이, 현재 세대는 스마트폰을 통해 경이로운 터치 신공을 보여주고 있다. 미래 세대는 가상 현실과 증강 현실을 매개로 경이로운 3D 제작 신공을 보여줄 것인가?



▲ VR/AR기술을 활용한 NASA의 우주선 제작 프로그램 사례
(출처: Vision VR/AR Summit 2016 키노트 영상)

사회 전 분야에서 가상 현실을 활용한 경험이 보편화된다면 인류는 이를 통해 풀리지 않던 난제를 극복하거나 비약적인 생산성의 향상을 이루어 낼 수 있을 것인가? 필자는 VR의 미래에 대한 해답은 여기에 있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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