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북경일기① - 신기하고 기이했던 그 나라, 중국

기획기사 | 원동현 기자 | 댓글: 2개 |



북경일기 코너는 중국의 어제와 오늘, 그리고 내일을 생생하게 짚어보는 3부작 특집기사입니다. 실제로 중국에서 10여 년간 거주한 바 있는 기자가 본인의 경험담을 통해 중국에 대한 인사이트를 제공할 예정이니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북경일기① - 신기하고 기이했던 그 나라, 중국
북경일기② - 중국, 하나의 거대한 '플랫폼'으로 변모하다
북경일기③ - 시진핑의 중국몽, 우리에게도 '꿈' 같을까?






나는 중국 재외국민 1.5세대다. 사실 세대를 구분하는 것이 쉽지 않아 이렇게 애매모호하게 표현했다. 1세대라 하기엔 시기적으로도 한발 늦었고, 현지에서 태어난 것도 아니기에 1.5세대라 스스로 불렀다.

1998년, 이제 갓 초등학교에 입학했을 적에 난 중국과 한국을 오가기 시작했다. 99년도 말부터는 본격적으로 중국에 정착해 약 10년간 현지에서 학업을 마쳤다. 원래 초등학교 과정만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올 계획이었지만, 여러모로 계획이 틀어져 계속 남게됐다. 한국을 떠날 당시만 해도 이렇게 오래 중국에 있으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1992년 중국이 한국과 정식으로 수교를 맺은 이후, 중국 시장의 잠재력을 알아본 수많은 한국인 사업가가 그 속으로 뛰어들었다. 우리 아버지 역시 그중 한 명이다. 천주교 종교화를 전문으로 그리시던 화가셨지만, 새로운 삶을 찾고 싶으셨던 것 같다. 아버지는 중국을 무궁무진한 성공의 기회가 도사리는 대륙이라 하셨다. 중국은 아버지로 하여금 수십 년을 들어온 붓을 놓게 할 만큼 매력적인 곳이었던 걸까? 너무 어렸던 난, 당시 그 뜻을 이해하지 못했다.

1998년, 선선한 바람이 불기 시작했던 가을 즈음으로 기억한다. 어차피 짐은 나중에 별도로 배송받을 계획이라 가벼운 옷가지만 챙겨서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본격적으로 이주하기 전에 먼저 터를 잡고, 환경을 알아보고자 가는 길이었다. 목적지는 중국의 수도 북경이었다.

당시 초등학교에 갓 입학했었던 나로서는 해외로 간다는 사실 자체가 퍽 흥미롭게 느껴졌다. '이주'라는 단어는 크게 와닿지 않았고, 그저 한낱 '여행'처럼 여겼다. 때마침 창밖의 풍경 역시 뉘엿뉘엿하게 노을이 져 아주 아름다웠다. 난 그 순간을 아름다운 추억이자 축복으로 여겼지만, 어머니는 아니었던 것 같다. 노을빛으로 물든 산등성이를 바라보며 어머니는 하염없이 눈물을 훔치셨다.

짧은 비행 이후, 비행기에서 첫발을 내딛는 순간 공기가 다르다는 걸 느꼈다. 살짝 텁텁하기도 하고, 알 수 없는 향기도 섞여 있었다. 무엇보다 가장 크게 위화감을 느낀 건 역시나 언어였다. 모국어가 당연하다는 듯이 쓰이던 사회에서 살다가 갑자기 타국을 오니 긴장감이 들었다. 이게 여행이라면 이 역시 이국적인 정취라고 여기며 즐겼을지도 모르지만, 앞으로 이 환경 속에서 살아가야 한다 생각하니 공포에 가까운 기분이 들었다.

8살 즈음의 난 그 압박을 이기지 못하고 공항 한복판에서 엉엉 울기 시작했다. 아직 중국 땅에 발도 채 디디지 못했건만 뭐가 그리 무섭고 서러웠는지 눈물 콧물 다 흘리며 엄마의 치맛자락을 고사리손으로 꼭 움켜잡았다. 입국장에 나와보니 미리 중국에 와있던 아버지가 공항에 마중을 나와 있었다. 한걸음에 달려와 흐느껴 우는 나를 안고 새로운 집으로 이끌어갔다.

우여곡절 끝에 다다른 곳은 북경 조양구에 위치한 왕징이란 지역이었다. 공항이랑 가까워 한국인이 모여살기 시작한 동네다. 당시엔 왕징신청이라 불리는 회색빛의 고층 아파트 단지가 하나 있었고, 주변은 온통 허허벌판이었다. 당시 집이 23층이었는데, 그곳에서 주변 풍경을 바라보고 있자면 약간 묘한 기분이 들었다. 도로엔 흔한 흰 선 하나 그어져 있지 않았다. 신호등은 당연하다는 듯 없었고, 차와 말 그리고 소가 같이 달리는 진풍경이 보였다. 그리고 그 여백을 메꾸는 공사장과 풀밭, 여기가 도시라 할 수 있는 건지 의문이 들었다.



▲ 멀리 보이는 회색 아파트가 왕징신청이다(출처 : wjgov.com)

다행히도 아파트는 깔끔했다. 대륙의 공간 활용은 늘 이런 건지, 아파트 내에 공원도 넓직하여 보기 좋았다. 어딘가 어색하지만 곳곳에 한국어 간판들도 보여 약간이나마 안심이 됐다. 들어보니 이 왕징이란 동네는 중국인보다도 한국인이 더욱 많은 아파트 단지라 한다. 실제로 거리를 걷다 보면 심심치 않게 한국어가 들려 반가웠던 기억이 난다.

중국에서 맞는 첫 번째 아침, 아버지가 중국식으로 식사를 하자고 제안했다. 어머니는 질색을 했지만, 먹는 거에 호기심이 왕성했던 난 아버지를 쫄래쫄래 따라갔다. 아버지가 나를 이끌고 간 곳은 딱히 식당은 아니었다. 이른 시간 길거리에서 각종 아침거리를 파는 노점상들이었다. 지금 돌이켜보면 위생상태가 정말 심각하게 안 좋았던 것 같지만, 당시엔 각종 음식들이 눈앞에서 지글거리는 소리와 함께 구워지고 튀겨지는 게 매력적으로 느껴졌다.

要几个?
몇 개 드실 거요?

来两个吧, 多儿钱呢?
두 개 주세요, 얼마죠?

五块
5위안

수많은 아침거리 중 내 눈을 사로잡은 건 '찌엔빙'이었다. 얇게 부친 밀전병에 달걀물을 덧바르고 각종 소스와 튀김 그리고 소시지 등을 얹어 먹는 음식이다. 맛도 맛이지만, 1개 먹으면 성인 남성도 배가 다 찰 만큼 어마어마한 양이 특징이었다. 그런 아침식사가 개당 2.5위안, 즉 한국돈으로 500원이 채 안 됐다.

배도 불렀거니, 아버지는 날 이끌고 동네를 구석구석 다니며 다양한 풍경을 보여줬다. 이른 아침 공원에 나와 단체로 태극권을 연마하는 할아버지들, 음악에 맞춰 부채춤을 추는 아주머니들, 그리고 사람 크기만 한 붓으로 바닥에 물글씨를 쓰던 '기인' 등 한국에서는 단 한 번도 본적 없는 풍경이 눈 앞에 있었다.

그 기인 할아버지는 붓에 물을 적셔 공원 콘트리트 타일 한칸 한칸에 한자를 나누어 쓰고 있었다. 아버지는 그 글을 지긋이 바라보더니 그 할아버지가 쓰고 있는 것이 중국의 유명 시인 이백의 작품이라 했다. 전쟁이 빨리 종결되길 바라는 마음이 담겨있다나, 하지만 그런 뜻은 크게 중요하지 않았다. 그냥 눈 앞에 펼쳐진 풍경이 참 이국적이란 생각이 들면서, 내가 정말 외국에 왔다는 실감이 들었다.



▲ 왠지 인상깊게 남은 풍경이었다(출처 : ifeng.com)

다음으로 들른 곳은 아파트 단지 외곽에 위치한 시장이었다. 비닐문을 젖히고 들어가니 중국 특유의 향신료와 싱그러운 채소 냄새가 물씬 풍겨왔다. 한국에서는 한 번도 본적 없던 특이한 채소와 과일이 즐비했다.

小胖子,你要什么呢?
뚱땡이, 뭐 사러 왔니?

돌연 옆 판매대의 아주머니가 내게 말을 걸어왔다. 당시 중국어 한마디 모르던 난 당황해 아버지를 바라봤지만, 아버지는 그냥 호탕하게 웃고 있을 뿐이었다. 참고로 小胖子의 뜻을 알게 된 건 몇 년 후의 일이었다.

아버지도 중국어를 그렇게 유창하게 구사했던 건 아니기에 손가락으로 물건을 짚어가며 쇼핑을 했다. 간단하게 샌드위치를 해먹을 겸 오이, 감자 등을 구매했다. 특이하게도 모든 농수산물은 저울에 중량을 매겨 가격을 책정했는데, 일단 어마어마하게 저렴했다. 당시 50위안 한 장이면 1주일 치 식료품을 살 수 있는 수준이었다.

세상물정 잘 모르던 나에게도 그 물가는 가히 충격적이었다. 어떻게 이렇게 물가가 싸냐고 아버지에게 물었다. 아버지는 중국은 사회주의 국가인 만큼 기초적인 '먹거리'에 관한 통제가 엄격하다고 했다. 쉽게 말해 쌀, 과일 등의 1차 생산품의 가격을 생산자가 임의로 올릴 수 없는 시스템이다. 이 덕에 극심한 빈부격차에도 대부분의 '인민'들이 기초적인 식생활을 이어나갈 수 있는 것이다.

이렇게 한 바퀴 동네를 둘러보고 집으로 돌아가는 중, 낯선 복장의 또래들이 눈에 들어왔다. 흰색과 파란색이 섞인 체육복, 목에 둘러맨 붉은 스카프, 그리고 바짝 깎은 머리. 삼삼오오 모여 친구들끼리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며 등교하는 모습은 한국과 크게 다르지 않았지만, 뭔가 미묘한 다름이 느껴졌다. 그 행렬에 시선을 뺏기고 있던 중, 돌연 커다란 노래 소리가 학교 주변에서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起来!不愿做奴隶的人们! 일어나라, 노예가 되기 싫은 사람들이여
把我们的血肉筑成我们新的长城! 우리의 피와 살로 새로운 장성을 쌓자
中华民族到了最危险的时候 중화민족에 가장 위험한 시간이 도래했다
每个人被迫着发出最后的吼声。 억압받는 모든 이가 최후의 함성을 외친다
起来!起来!起来! 일어나라! 일어나라! 일어나라!

펄럭이는 오성홍기, 그 속에 담긴 다섯 개의 노란 별. 그리고 아파트 한복판에서 울려 퍼지는 중화민족의 위기를 부르짖는 노래, 지금 돌이켜보면 참 이질적인 풍경이다. 그 아이들이 매고 있던 빨간 스카프 '홍링진(红领巾)'은 아직도 가끔 생각이 난다.



▲ 출처 : zdwxx.cn

2010년 1월, 나는 중국에서의 10여년 간의 학업을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왔다. 그간 내가 쌓아온 중국의 이미지는 한 장의 파노라마 사진에 가깝다. 놀랍도록 빠른 경제 발전과 아름다운 문화 속에 어두운 이면이 더러 묻어있었다. 반평생을 지낸 이 땅을 떠난다는 사실이 서글프기도 했지만, 언젠가는 다시 돌아올 것이란 예감이 들어 그리 어렵지 않게 발걸음을 옮겼다.

아이러니하게도 난, 한국에 돌아온 이후 중국의 존재감을 보다 크게 느끼기 시작했다. 멈추지 않는 경제 발전의 모습은 산업 혁명의 막을 연 증기 기관차를 연상케 했다. 타국의 것을 수입하기 바빴던 모습은 어느샌가 사라졌고, 수출국으로서의 위용을 보이기 시작했다. 시진핑은 '중국몽'이란 슬로건을 내세우며 미국을 넘어서겠다는 포부마저 드러냈다.

중국에 남아있는 친구들과 연락을 주고 받다 보면, 하나 같이 입을 모아 '오늘의 중국은 과거와는 완전히 달라졌다'고 말한다. 너무나 빨리 변화해 현지에 거주하는 사람들도 따라가기 바쁠 정도라는 과장 아닌 과장을 보태기도 했다.

호기심이 동했다. 내가 보고 느꼈던 그 시절의 중국과는 뭐가 달라졌을지, 그리고 그대로 남아있는 것은 무엇일지 이 두 눈으로 확인하고 싶었다.

지난 9월 16일, 한국으로 돌아온 지 약 8년 8개월 만에 난 다시 한번 중국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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