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한국 PC 패키지의 역사, 1억 원'을 보고

기획기사 | 정필권 기자 | 댓글: 27개 |



"저기... 나 게임 하나만 찾아줄 수 있어?"

돌이켜 보건대 뜬금없는 질문이었다. 평생 플레이해 본 게임이 손에 꼽을 정도인 비게이머 여자 친구가 게임을 찾아 달라는 부탁을 하다니 말이다. 그것도 최신 게임이 아니라 십수 년 전 어렸을 적 플레이한 고전 게임을 말이다. 본인은 어느 날 문득 기억이 나서 질문을 한 것일 터인데, 질문 받는 처지에서는 기억의 단편만을 가지고 무언가를 찾아달라는 질문이 난감하기 그지없었다.

'동글동글하고 작고 귀여운 애들이 나와서 퍼즐 같은 걸 풀어내는 게임인데...', '피자를 원하는 대로 만들어서 길을 막고 있는 애들한테 가져다줘야 해.', '횟수가 정해져 있어서 추론력을 기를 수 있는...' 정도까지만 설명을 들었는데 확신이 들었다. '난 이 게임을 전혀 모른다'는 생각 말이다.

오래전 여자친구가 던졌던 질문이 해결된 것은 비교적 최근의 일이다. 아마 게임을 찾는 데만 1년 정도가 걸렸던 것 같다. 주말 즈음 스팀 상점을 이리저리 둘러보다 발견한 '줌비니(Zoombinis)'라는 게임을 찾았다.



▲ 어.. 그래... 설명이랑 똑같네...?

이런 경험은 기자 개인에게 있어 몇 가지 생각할 만한 거리를 던졌다. 첫 번째는 1996년 출시됐던 게임이 ESD로 현재 컴퓨터 환경에 맞게 개발 및 출시가 이루어졌다는 점. 다음으로 회사가 인수·파산하는 과정에서도 게임에 대한 라이센스와 결과물들이 유지되고 계승되었다는 것이다.

특히, 회사의 인수합병과 폐업 등을 거치면서도 게임의 데이터와 판권이 계승 및 유지되었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줌비니의 유통 판권을 가졌던 브로더번드 소프트웨어, 러닝 컴퍼니가 기구한 역사를 거치면서도 게임의 데이터와 라이센스는 유지되었음을 볼 수 있다.

1998년 8월, 브로더번드는 러닝 컴퍼니에 인수됐고 1999년 러닝 컴퍼니마저 장난감 회사(바비 인형이 유명한)인 마텔에 인수되는 과정을 겪는다. 이후 마텔은 게임 부문을 정리하며 투자회사인 고어테크놀로지 그룹에 러닝 컴퍼니를 판매한다. 2001년 고어 컴퍼니는 유비소프트에 엔터테인먼트 부문을 매각했으며, 같은 해 교육 부문까지 다른 회사에 매각하고 사명을 다시 브로더번드로 바꾸며 결국 다시 원래의 회사명으로 돌아왔다.

20년간 기구한 과정을 거친 브로더번드는 2015년 개발사 TERC(정확하게는 교육 관련 연구 기관이다)를 다시 만나 줌비니를 스팀으로 재출시했다. 많은 이들의 추억 속에 있던 고전 게임은 오랜 시간이 지나 다시금 부활하게 됐다. 일반적이었다면 인수합병 과정에서 데이터와 판권 문제 등이 소실되었을 텐데도 말이다.



▲ 킥스타터 모금도 성공적이었다.

고전 게임의 복각, 그리고 성공은 변화한 시장 상황에서 성공의 근거를 찾아볼 수 있을 것이다. 당장 10년 전만 해도 대형 개발사나 유통사를 거치지 않은 게임을 만나기 어렵던 시기였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ESD가 보편화되면서 빠르게 통신상에서 게임을 내려받고 플레이할 수 있는 시대가 됐다. 게임 구매처와 소비자 간의 거리가 가까워지게 된 셈이다.

그러나 반대로, 게이머들은 신작 게임의 홍수를 맞이하게 됐다. 올해 초 기준으로, 스팀에서 판매되는 게임만 3만 개를 넘어섰다. 모바일과 다른 플랫폼까지 합치면, 게임이라는 콘텐츠의 수는 어마어마한 수준에 이르렀다. 하루에만 다양한 장르, 많은 수의 게임들이 출시되지만, 그중에 유저들의 시선을 끄는 물건은 찾기 어려운 시기가 왔다. 그렇기에 '고전 게임의 복각'이라는 개념은 그저 추억 팔이 이상의 의미를 갖기 어려울지도 모른다.

현재의 게임들은 게임의 콘텐츠, 그래픽 모두 과거와 궤를 달리한다. 해상도는 이제 4K를 바라보는 시대이고 도트 튀던 캐릭터들은 HD 텍스처로 옷을 갈아입었다. 나날이 발전하는 CG, 한층 더 많은 용량을 담을 수 있는 저장 매체의 변화까지 고려하면, 솔직히 비교되지 않는 수준이다.



▲ 너무도 많은 게임이 우리의 선택을 기다리고 있다.

문제는 그럼에도 약 10년 만에 다시 만난 게임에 재미와 반가움을 느낀다는 점이다. 대체할 수 있는 게임들이 수많이 존재함에도 말이다. 물론, 추억은 미화되기 마련이며, 지금 플레이한다고 느낄 수 있으리란 보장도 없다. 아니, 일단 몇백 개가 넘는 라이브러리에서 고전 게임들을 플레이하는 것부터가 난관일 것이다.

그래도 이제는 만날 수 없는 게임들을 내 라이브러리에 소장할 수 있다는 사실은 분명한 의미가 있다. 라이브러리 한켠에 게임을 두고, 과거를 추억하며 묘한 감정이 드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 플레이의 영역보다는 과거의 즐거움을 회상하는 매개체의 역할이다. 그리고 ESD가 있음에. 과거 게임들을 현시대에 맞게 축적하고 재생산할 수 있는 구조에. 과거의 역사를 한곳에 모아서 즐길 수 있다는 것에 기묘한 즐거움이 있다.

동시에 국내 게임들이 이런 기회를 가질 수 없다는 점에 슬픈 감정이 든다. 얼마 전, 옥션 중고거래 매물로 올라온 '한국 PC 패키지 게임의 역사를 구매해 주세요'라는 글을 보고 나서 더더욱 그렇다.




누군가는 1억 원이라는 매물의 가격에. 누군가는 내용물의 실질적 가치에 주목했을지도 모른다. 뭐 어찌 됐던 1억이라는 가격은 관심을 끌만 한 것이었으니까. 하지만 개인적으론 제품의 가격, 목록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오히려 지금까지 국내에 출시됐던 게임들이 현세대에 맞게 재생산되거나 결과물을 축적하지 못했다는 점에 주목하고 싶다.

돌이켜보면, 과거 한국 패키지 시장에서도 준수한 작품들을 꼽을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 그 많던 게임들은 흔적도 찾아보기 어려울 정도로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아마도 많은 이유가 있을 것이다. 시장 구조가 급격하게 바뀌었다는 점도 들 수 있고, 회사 자체가 사라진 게임도 있을 것이다. 회사가 존재는 하더라도, 여러 사정으로 게임의 판권이 여기저기 파편화되었을 가능성도 있다. 해외 게임과 비교하면 상대적으로 주목을 받지 못했다는 점도 있다. 당장 '한국 게임의 역사'를 다루는 문헌 자료도 부족한 상황이니까.

분명 지금에서도 추억할 수 있는 게임들이 있었다. 추억 보정이던 완성도던 간에, 게임이 출시된 지 십 년이 넘게 지나도 플레이할만한 가치가 있는 게임들은 존재했다. 하지만 국내 패키지 시장을 장식했던 과거의 작품들은 현시점에서 완전히 잊혀진 것들이 되어버렸다. 다른 플랫폼과 모습을 보여주며 팬들에게 실망감을 안기지 않으면 다행일 정도다.

과거의 결과물을 누적·유지하지 못한 국내 패키지 시장이기에, 복각의 역할은 기업이 아닌 개인에게 넘어갔다. 회사의 사정을 벗어나 개인의 손에서 과거작들이 현재 시스템으로 만들어지고 있다. 아마도 많은 이들이 명작으로 손꼽을 '날아라 슈퍼보드: 환상서유기'부터, 안영기 개발자가 직접 다시 제작한 '또 다른 지식의 성전'(구글플레이 출시, 현재 개발 중단)까지. 유의미한 결과물들이 나왔고 진행 중이다.

게임들이 쏟아져 나오는 시대. 하지만 적어도 과거의 추억, 명작들만이 줄 수 있는 그들만의 가치가 있을 것이다. 그렇기에 이번 '한국 게임의 역사 1억 원' 판매글을 보며, 아쉬움과 슬픔이 남는다. 우리는 빛날 수 있었을 과거의 유산들을 축적하고 보존하지 못했다. 내가 아쉬움이 남는 것은 그래서다.

가격을 떠나서, 누군가의 노력과 과거 우리의 추억을 이러한 형태로 만날 수밖에 없다는 점. 현재도 즐길 수 있는 콘텐츠가 아니라, 일종의 기념품이자 추억거리. 또는 불법 콘텐츠로만 접할 수 있는 존재로 남았다는 점에 말이다. 가끔은 과거의 게임들이. 그리고 이제는 사라진 '가람과 바람'과 같은 회사들이 그리울 따름이다.

댓글

새로고침
새로고침

기사 목록

1 2 3 4 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