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성인을 위한 그림동화, '필라스 오브 이터니티2'

리뷰 | 이현수 기자 | 댓글: 18개 |
2016년 GDC에서 조쉬 소여를 만났을 때 난 흥분 했다. D&D에서 파생하여 나온 갖가지 CRPG의 후계작들이 거의 메말라가고 있을 때 즈음이라 더 그랬는지도 모르겠다. 이후 '필라스 오브 이터니티2: 데드파이어(이하 데드파이어)'의 펀딩 소식을 듣자마자 한국어 지원을 위해 아낌없이 펀딩했다. 그러나 옵시디언은 나의 기대를 저버렸고, 나에겐 어디에도 전시할 수 없는 디지털 자산만이 들려있다.

뒷이야기를 여기서 적는 건 적절하지 않을 것 같다. 아니 어쩌면 같은 게임을 두 개 살 기회를 주기 위한 옵시디언의 '선택지'였을지 모르겠다. 언제나 그래 왔듯 그들은 선택지를 준 것이고 내가 결정했을 뿐이다. 게임 안이냐 밖이었느냐의 차이었던 것이다.



▲ 조쉬 소여... 왜 그랬어요... 왜!!

데드파이어는 크게 전작의 구성을 벗어나지 않는다. 이야기도 전작에서 그대로 이어지며 이야기 속 곳곳에서 전작의 풍취가 느껴진다. 2편의 그래픽은 더 좋아졌고 다중 클래스를 제공하여 경험의 폭을 늘렸다. 편의성은 조금 더 좋아졌는데, 그 중 가장 마음에 드는 건 '백과사전'이 마우스 오버 기능으로 구현되어있어서 코덱스 같은 저널을 들락날락하는 수고를 덜게 해준다. 결과적으로 세계관에 무난히 몰입할 수 있게 해준다.

전작에서의 주요 결정은 2편에서 매우 신중하고, 자세하게 다루어진다. 게임을 시작할 때 전작의 세이브파일을 불러오거나, 매스이펙트나 위쳐처럼 퀴즈형식으로 자신의 행적을 고를 수 있다.

사실 '필라스 오브 이터니티'가 세계관이 깊이 있는 세계는 아니다. 인간이 만들어 낸 신과 영혼석이라는 플롯이 전부일 뿐이다. 반면 전작에서 행했던 행동이 어떤 형식으로 발현됐느냐를 알게 되는 건 큰 재미다. 마치 영웅전설1,2의 관계랄까. 그렇기에 전작을 해보지 않은 사람들은 세계관 몰입이 조금 힘들 수도 있다.



▲ 전작의 연장선에서 2편이 시작된다.

메인스토리는 짧은 편이다. 내용은 무난한 편이나 축약했다는 느낌이 강하다. 서브 임무도 치밀하게 얽혀있어 이야기에 살을 붙이는 형태는 아니다. 그저 세계관을, 분위기를 느끼게 할 뿐이다. 데드파이어의 진짜 이야기는 세계 안에서 사는 '모든' 사람들의 이야기다.

이번 작품에서 옵시디언은 '도덕적 확실성'을 부정하게 하여 의미 있고 지속력 있는 결정을 내리는 데 집중한 것 같다. 전작의 선택요소를 그대로 끌고 온 것과 시너지를 내어 선택 결과에 직접 드러낸다. 캐릭터 배경도 작용하면서 도덕적인 선택이란 것은 과연 어떤 것인가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도덕률(道德律)과 도덕정서가 서로 배치되는 경우도 생긴다.

플레이 하는 동안 넓은 지역을 가로질러 다양한 이야기를 만난다. 대화가 되지 않는 NPC가 구시렁거리는 곳에서도, 선택지를 고르는 중요한 대화에서도 다양한 이야기가 플레이어를 감싼다. 옵시디언의 전작 '폴아웃: 뉴베가스'처럼 야심 찬 파벌 및 종족들이 존재하며 중세 종교 논쟁 같은 들불을 만들어내기도 한다. 이러한 소용돌이가 싫으면 바다에서 해적질이나 하면서 나름의 정치와 판세를 관망할 수도 있다.




아쉬운 것은 전작보다 파벌과의 관계가 적극 분출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사람 간의 관계 역시 마찬가지다. 숫자로 표시되는 관계도가 전부인데 마을 NPC나 파벌 NPC의 반응이 크게 달라지지 않는다. 전작에서 불필요한 살인을 저질렀을 때 비난 수위가 매우 높았다는 점과 비교하면 아쉽다.

동료관계도 아쉽다. 다시 돌아온 에데르는 여전히 매력적이며 전작의 경험을 바탕으로 그룹의 도덕적, 종교적 기준을 잡아주며, 알로스는 늘 그래 왔듯 또 자신을 숨기고 있다. 이처럼 각자 이야기를 하고 있음에도 전작보다 상호 대화는 줄어서 텍스트와 행동 사이의 행간에 숨겨진 이야기를 스스로 상상해야만 한다. 그저 졸졸 따라다니는 허수아비들처럼 느껴질 것이다.

전작과 마찬가지로 내 영향력이 동료의 관계에 스며들고 내가 세계에 미친 일들이 동료 성격에 변화를 주는 것은 여전하다. 평판 시스템에 기반을 두어 내 결정과 잡담에 반응하며, 관계를 발전시키거나 우정을 쌓거나 썸을 타기도 한다. 또는 격렬하게 설전을 펼치기도 한다. 동료 간의 갈등과 협조가 나를 무리의 리더처럼 느끼게 하지만, 적극 개입하기 위해선 행간 의미를 찾아내야 한다. 게임플레이성향에 따라 호불호가 확실히 갈릴 수 있는 영역이다.




서브 임무는 유지적으로 치밀하게 엮여서 세계관을 쌓아올리기보다는 이 땅의 '사람'들의 이야기를 전달하여 어떤 세계의 분위기인가를 전달한다. 위쳐3처럼 치밀한 매력과는 또 다른 소소한 재미다.

옵시디언의 전형적인 구조에 따라 대화 선택은 게임에 큰 영향을 받는다. 행동은 어떤 식으로든 세계에 투영되며 캐릭터의 기술과 평판은 모든 상호작용에 연관된다. 특정 집단에 좋은 평판을 얻는다면, 독특한 대화를 선택할 수 있고 이는 이야기의 흐름을 다른 식으로 끌고 갈 수 있게 한다. 게임 초반 선박의 깃발을 교체함으로써 요새에 무혈로 입성할 수 있는 선택지가 있는데 '역할 놀이'에 입각하여 다른 선택지를 선택한다면 결말은 피에 이른다.

CRPG를 할 때 초보자들이 많이 힘들어하는 게 다양한 스탯이다. 특히 교과서식 육성에 익숙한 국내 유저들은 '최강'을 만들기 위해 정보만 검색하다가 지레 지쳐버리는 모습을 자주 보이고 한다. 데드파이어는 캐릭터 메이킹이 중요하다고는 못하지만, 파티의 생존기술을 공유할 수 있어 불편함을 덜었고 다중클래스를 도입하여 더 많은 선택지를 줬다.

어느 한 분야의 포기가 어느 한 분야의 완전한 성공을 보장하지는 못한다. 다만, 다양한 조합을 만들기 위한 노력이 새로운 만남과 이에 따른 결과를 불러온다. 싱글플레이 게임이지만, 항상 다른 경험을 하게 해준다. 물론 멀티플레이처럼 다양한 스크립트를 구현하지는 못한다. 그래도 한가지 스크립트를 기반으로 선형적 경험을 제공하는 건 아니다.

데드파이어의 전투는 전작과 비교해서 너무 쉬워진 감이 있다. 그래도 효과적으로 대응하기 위해 통제하는 핵심은 달라지지 않았다. AI 스크립팅은 편의성을 제공하며 원하는 방식으로 반응하도록 한다. 스페이스를 누르며 한턴한턴 고민하는 것도 재미있지만, 내가 의도한 바대로 움직이는 것을 보면 뿌듯한, 톱니바퀴가 맞아 돌아간 듯한 재미를 느낄 수 있다. D&D룰을 사용할 수 없기에 발더스게이트와는 조금 다른 방식이지만, 나름대로 독창적인 모습을 보여주려고 노력한 모습은 보인다.




캐드누아가 박살 나서 어쩔 수 없이 데드파이어에서 새롭게 추가된 항해 시스템은 빛의 신을 추격하고 영혼을 회수하기 위한 최고의 도구다. 이번 무대는 고리타분한 중세 유럽에 스팀펑크를 접목한 세계를 벗어나 폴리네시아 문화를 연상시키는 다양한 요소를 다수 담겼다. 기원전 3000년 전부터 내려왔던 그 고명한 항해민족의 삶을 연상케 하는 분위기와 15세기~18세기의 대항해 시대를 접목한, 카누와 슬루프가 함께 항행하는 묘한 감성을 만들었다.

보이는 요소는 전형적인 폴리네시아 문화다. 카누와 거상이 존재하며 폭풍 미신이 존재한다. 게임에서 직접 언급되는 경우는 적지만, 접안해있는 아웃리거카누나 복장에서 흥미를 더한다. 그러면서도 사회 전반에는 식민지주의의 대항해시대가 젖어있다. 17세기경 유럽의 무역회사들이 퍼져 나가면서 야기한 해상 문제를 그대로 담았다. 무역회사와 총독의 관계, 영혼석의 관계 등 위협과 통제에 대한 것들이 대표적이다.

이외에 게임 곳곳에서 세계 분위기와 관련된 독특한 모습을 만날 수 있다. 게임 초반부 임무를 통해 만날 수 있는 하누아족은 아직도 흥미롭게 연구되고 있는 계급제도(카스트)를 재현하고 있다. 흔히 게임에서 만나 보는 유럽이나 중국의 봉건계급제과 달리 아리안이 갠지스 유역에 정착하면서 기원한 계급제를 모티브로 하고 있다.

그냥 넘어갈 수도 있는 요소지만, 하누아족은 카스트 기반의 사회주의에 성과주의를 올린 묘한 사회 체계를 가지고 있다. 사회주의에 근거하여 부를 분배하지만, 성과주의로 판단하여 계급의 층을 나누는 모습이다. 이를 기반으로 기회의 불평등 등을 토로하는 NPC 등 다양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다.

메인스토리는 커녕 게임 전체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는 않지만, 게임을 즐기면서 다양한 사회상을 보고 생각할 기회를 제공한다는 점에서 굉장히 즐거운 요소다. 어차피 텍스트를 읽으며 상상하는 게임 아니던가.

부의 분배가 나왔으니 말인데, 데드파이어는 전작보다 현실적인 재화감각을 게임 내에 구현했다. 전작 캐드누아의 일꾼들은 임금을 받지 않았으나, 데드파이어의 선원들은 대항해시대처럼 식량과 물을 소비하고 이에 따라 사기가 변화한다. 당연히 임금도 받아간다. 이 모든 것들이 잘 돌아가고 있어야 항해를 성공적으로 마칠 수 있다. 이런 시스템은 시각적으로 보이는 효과는 적지만, 갑판에서 나누는 대화들을 듣고 있자면 그 세계와 내가 이어진 것 같은 느낌이 들게 한다. TRPG의 감성이다.




배 관리는 크게 신경 쓰지 않아도 괜찮을 정도다. 각 보직에 맞는 사람을 배치하고 사기와 장비만 신경 써주면 된다. 사일런트힐 시리즈처럼 승조원에 크게 신경을 쓰지 않아도, 대항해시대처럼 개략적으로만 관리할 수 있다. 그래도 배 사나이가 된 듯한 느낌이다. 눈앞에 실제 파도가 보이지 않아도, 폭풍우가 보이지 않아도 상상할 수 있으니까. 이 게임의 분위기와 삽화+문자 진행방식이 그래도 괜찮다고 말해준다.

해상 전투는 TRPG가 초기 CRPG로 넘어오는 듯한 모습이다. 해적, 라이벌과 웅장한 해전을 기대했다면 별로 재미없을 것이다. 과거 CM 시리즈처럼 문자로 진행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시각적인 해전 혹은 백병전을 원했다면 실망할 수 있으나 전장의 함성이나 함포 소리를 상상하는 맛은 있다. 백병전은 지상 전투처럼 플레이할 수 있기는 하다. 전투 자체가 중요한 게 아니라 전술배치, 대포발사, 승무원 유지, 선박 보수 유지 등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데드파이어의 진정한 가치는 배경과 어떻게 캐릭터가 돌아가느냐다. 에오타스를 추적하는 과정에서 호기심은 미덕이다. 질문과 조사를 하고 에오타스를 따라가기 위해 모험을 한다. 받아들이기에 따라 세상은 상상력에 따라 질감이 생기고 대화를 통해 상호 망을 연결한다.

풍부하고 자세한 묘사는 배경 설정과 분위기를 조성한다. 데드파이어의 등장인물들은 미묘한 구석을 조금씩은 가지고 있는데 이를 산문으로 풀어내고 상호작용으로 짜맞춘다. 이 모든 것이 풍부한 읽을거리다. 인내심이 부족하다면 모바일 게임의 이야기처럼 쭉쭉 넘기고 말겠지만, 그러면 이 게임의 재미를 온전하게 느끼기 힘들다. 몇몇 부분에서 불필요하게 장황하고 집중력 떨어지는 게 있기는 하지만, 일반적인 책과는 분명 다른 경험이다. 그림책이랄까.

메인퀘스트가 긴 게임은 아니다. 서브 임무도 치밀하게 얽혀있어 이야기에 살을 붙이는 형태는 아니다. 그저 세계관을, 분위기를 느끼게 할 뿐이다. 그렇다고 요즘 인기 있는 게임들처럼 전투가 자극적이지도 않다. 수많은 텍스트를 읽으면서 눈과 머리로 생각하게 할 뿐이다. 영화와 소설 그 사이의 미디어라고 해야 할까. 하지만 디테일 하나하나에 관심을 두게 되면 내가 된 영혼 주시자를 보게 될 것이며 이는 무한에 가까운 자유를 만끽하게 된다.



▲ GTA 이후로 캐릭터 성격을 이토록 잘 담은 게임이 있었던가?

출판계는 긴 문장을 읽지 못하고 읽어도 이해하지 못하는, 상상하지 못하는 '실질적 문맹'이 늘어난 이유를 시각적인 자극에 너무 노출돼있기 때문이라고 지적한다. 데드파이어의 문장은 결코 고상하거나 아름답거나 감동적이지 않다. 그러나 상상력을 자극하기엔 충분하다. 전작보다 원문 자체가 좋아졌기에 번역도 좋아졌고, 호흡도 현대에 가까워져 매우 만족스럽다.

짧은 스토리는 전작과 마찬가지로 DLC가 채워주리라 기대한다. 애초에 CRPG 시장에 선택지가 없기에 기다리는 수밖에 없다.

돛을 펼치고 독특하고 흥미로운 환경을 여행하고, 야자 잎들이 비에 젖은 진흙탕 위를 어기적거리며 걸어갈 때. 그 옆에서 갈매기와 선원의 노래가 들려오면 내방에서는 단순한 끈으로 만든 현악기가 오케스트라로 들린다. 그게 바로 CRPG의 매력 아니겠는가. 읽음과 상상. 이 간단한 요소에 목말랐고 데드파이어는 이를 어느정도 해결해 줄 수 있는 성인용 그림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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