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완벽한 게임 원작 영화, 10분이면 충분했다

리뷰 | 강승진 기자 | 댓글: 47개 |
▲단편 영화 '페이퍼, 플리즈'
본 기사는 영화의 상세한 내용을 담고 있으므로 10분 남짓한 위 영화를 시청하신 후 보시기 바랍니다.

"도덕적이란 것은 나중에 기분이 좋아지는 것이고, 비도덕적인 것이란 나중에 기분이 나빠지는 것이다."

잃어버린 세대의 대표 작가 어니스트 헤밍웨이는 이렇게 말했다. 이 문구는 법적 시비를 가리기 어려운 현대 일상의 도덕적인 사건 어느 곳에 끼워 맞춰도 적절하다. 내리지도 않았는데 엘리베이터를 타는 아주머니나 임산부 보호석에서 잠을 자는 청년쯤에 대입해보라. 적절하지 않은가. 이른바 말이 되는 명언인 셈이다.

재미있는 건 헤밍웨이가 무엇을 하다 이런 말을 했느냐는 점이다. 이 문구가 나온 곳은 저서 '오후의 죽음'이다. '오후의 죽음'은 헤밍웨이가 스페인 투우를 기뻐 마지않아 감상하며 쓴 에세이집이다. 철학적인 부분으로 발전시켜 나가 뻗어 나온 생각의 가지 중 하나였지만. 어쨌든 지금은 여러 사회단체로부터 비도덕적이라고 비난을 받는 투우다. 그리고 헤밍웨이는 거기서 도덕률을 다시 깨쳤다. 지금도 이보다 도덕에 대한 이해를 쉬이 돕는 문구가 드물다는 점은 참 아이러니할 뿐이다.

시대는 다르지만, 모순적인 방법으로 도덕적 올바름에 대해 이야기하는 이가 있다. 그는 도덕이 완전히 배제되어야 하는 곳. 법과 서류만 있어야 할 곳을 다룬다. 그리고 오히려 그곳에서 공산주의와 관료제를 비판한다. 또 유저가 도덕적인 갈등에 빠져 고민하게 만든다. 헤밍웨이처럼 역설적이다. 그는 바로 '페이퍼, 플리즈'의 제작자 루카스 포프다.




가상의 공산국가 아스토츠카 국경선을 교차하는 작은 검문소. 게임 '페이퍼, 플리즈'에서 주인공은 이 검문소에 앉아있는 심사관이다. 그는 입국을 원하는 이들이 나라에 들어오는 것이 타당한지 가린다. 이때 플레이어는 다양한 입국 서류와 절차를 퍼즐 풀듯 맞춰나간다.

그런데 이게 무 자르듯 가와 불가로 깨끗이 나뉘지 않는다. 홀로 가족을 남겨두고 온 이. 전쟁, 기아가 없는 곳으로 피난 온 사람. 사랑하는 이를 찾아 홀로 검문소에 온 여성. 준비 서류가 불충분해 그냥 돌려보내기엔 그들이 어떤 참상을 겪을지 눈에 뻔하다. 씁쓸한 뒷맛. 법적으로는 옳은 일을 했지만, 기분 나빠지는 일. 플레이어는 혼란에 빠진다.

그럼 법 대신 도덕적으로 옳은 일을 하면 되지 않을까? 그렇게 이뤄진 행위가 행복한 결말만을 가져다주지도 않는다. 그럴듯한 불쌍함으로 자신을 꾸민 남성. 그 품속에 작은 권총을 숨겼을지 모른다. 검문소를 지나면 체제 전복을 꿈꾸며 화염병을 던지는 테러리스트가 되기도 한다.

영화 '터미널'을 잠시 기억해보자. 반입 불가능한 약을 아버지 치료약이라며 난동부리는 외국인이 있다. 주인공 톰 행크스는 번뜩이는 기지로 그를 입국시켜주며 관객을 절로 미소 짓게 했다. 하지만 입국 후 그 약으로 불법 각성제를 만들어도 이상하지 않은 곳. 그게 바로 게임의 배경 아스토츠카다.



▲ 반입이 가능한 염소 약이라고 속여 통역해 입국을 도와준 주인공.
하지만 결백하다고 눈물 흘리는 그를 정말 믿을 수 있을 것인가.('영화 터미널' 중)

공산주의라는 울타리에 둘러싸였던 러시아 감독. 그 시선에서 다시 만들어진 영화 '페이퍼, 플리즈'는 어떨까?

크레디트를 제외하면 러닝타임은 10분여. 그동안 상업적으로나 비평적으로나 ‘망했다’라는 말을 듣는 게임 원작의 영화는 120분이 모자라다시피 하며 이야기를 쏟아냈다. 그런데도 원작의 중요 장면을 부실하게 표현했다는 비판을 부지기수로 받았다. 그럼 대체 이 영화는 10분 동안 무엇을 보여줄 수 있을까? 주인공 소개나 제대로 할 수 있을까?

애초에 이 영화는 제대로 된 인물 소개를 하지 않는다. 나아가 이야기의 근본이 되는 아스토츠카의 정치적 상황부터 그가 있는 장소. 심지어 지금 하는 게 무엇인지조차 제대로 설명하지 않는다. 그렇다. 영화 '페이퍼, 플리즈'는 뭇 게임 원작 영화들보다 심각하게 불친절하다. 하지만 모든 곁가지를 덜어냈기에 몸은 가볍다. 영화는 도달하고자 하는 2가지 목적을 향해 처짐 없이 숨 가쁘게 달려나간다.




영화는 러시아의 니키타, 릴리야 오진스키 부부가 연출했다. 그들은 영화에 부연 설명을 넣어두지는 않았다. 대신 작은 소품과 인물들로 게임의 장면들을 되돌아보게 했다.

입국 허가-거부 도장, 버튼과 함께 비프음을 내며 덜거덕덜거덕 올라가는 셔터. 그리고 서랍 한편에서 국경 관리성 법령을 꺼내는 순간 모든 그림이 완성된다. 이때 관객의 눈은 스크린(아마 대부분 모니터일 테다.)에 게임 속 관리소를 자연스레 덮어씌운다.

게임과 대비할 수 있는 소품으로 가득 채워진 공간. 이는 10분 동안 이야기가 삭막하고 작은 검문소에서만 진행되기에 가능했다.

여기에 관리소장과의 비극적인 사랑을 그린 엘리사나 오브리스탄에서 온 테러범 로빈스키 부부 등 살짝 바뀐 설정을 가진 인물들의 등장도 게임 플레이 당시의 기억을 되짚게 한다. '아! 원작에서는 이랬지.'하며.



▲ 게임 진행에 꼭 필요한 입국 법령. 영상으로는 이렇게 그려졌다.

게임은 옳고 그름을 말하지 않는다. 그래서 플레이어 스스로 깨달아야만 도덕적 고민에 빠진다. 영화는 주인공을 관객이 아닌 제3의 인물로 만들었다. 이제 관객은 시각적으로 주인공의 심리 상황에 몰입할 수 있다. 그리고 이는 주인공의 죄책감을 감싸던 막이 터진 순간 절정에 달한다. 관리소장이 입국 허가를 부탁한 여성, 엘리사를 만나고 나서가 그때다.

주인공은 극 초반 기계처럼 입국 허가와 거부를 가린다. 서류 부족으로 쉬이 입국시킬 수 없는 엘리사가 심사소에 들어온다. 오늘 아침 그녀를 통과시켜달라는 소장의 부탁이 떠오른다. 그리고 입국 거부 후 그녀가 처할 상황도 그려진다.

잠시 고민한 주인공은 무미건조한 목소리로 '쁘로스찌쩨 미냐(나를 용서하세요)'라고 말하며 입국 거부 도장이 찍힌 여권을 그녀에게 돌려준다. 담담한 어조와 달리 그의 시선은 엘리사 대신 바닥만을 향할 뿐이다.

참고로 엘리사의 배경은 영화에서는 직접 드러나지 않는다. 깊이 있는 주인공의 갈등 묘사와 상황으로 그럴 것이라고 유추할 뿐이다. (물론 게임을 기억하는 유저라면 설명이 필요 없는 주요 이벤트지만 말이다.)



▲ 끝내 엘리사의 눈을 보지 못하는 주인공.



▲ 주인공이 부양해야 할 가족의 사진.
그리고 타인의 사랑을 짓밟아야 하는 입국 거부 도장이 한참 후에서야 찍히는 동안
이를 한 화면에 담으며 보는 이가 주인공의 심적 갈등을 함께 느끼게 한다.

주인공은 얼마 후 로빈스키 부부의 입국을 심사한다. 남편은 문제없이 통과했다. 그런데 뒤이어 들어온 아내의 서류에서 미미한 결함을 발견한다. 주인공은 가족을 만나러 왔다는 로빈스키 부인과 자신과 함께 환하게 웃는 가족의 사진을 바라본다. 사진과 엘리사가 떠나며 건넨 팬던트를 겹쳐 본 주인공은 로빈스키 부인의 결함을 못 본 체 넘겨주었다. 그리고 이는 로빈스키 부부의 폭탄, 총기 테러로 파국을 향해 치닫는 결말을 불러왔다.

영화는 여기서 끝이 난다. 무엇이 옳은지 그른지 끝내 알려주지 않은 채.




사실 이 영화를 모두에게 추천하냐고 묻는다면 절대 '아니다'다. 일반 관객이 보았다면 그저 화면 구성이 돋보이는 예술 영화쯤으로 보일 테다. 영화가 관객이 게임 '페이퍼, 플리즈'를 알고 있다는 전제하에 진행되니 더더욱 그렇다.

하지만 게임 팬은 총성과 함께 크레디트가 올라가는 순간 헤밍웨이가 말했던 기분 나쁨을 느낀다. 주인공이 도덕적이라 여긴 상황에서마저 이 기분 나쁨을 느낀다면 절대적인 도덕 가치. 그리고 '이런 관료제하에서는 옳고 그름마저 부정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라고.

이런 미묘한 감정을 느꼈다면 제대로 왔다. 이것을 깨닫는 게 바로 루카스 포프가 게임을 통해 전하고자 하던 메시지였다. 그리고 러시아 감독 부부 손에 재탄생한 영화가 이 주제를 훌륭하게 전달했다.




▲ 이름 없는 감독관 역을 맡아 몇 안 되는 대사와 표정으로 갈등을 고조시킨 이고르 사보쉬킨.

'페이퍼, 플리즈' 짧은 10분은 게임 팬에게는 부도덕을 느끼는 동시에 더없이 위대하고 감격스러운 순간이다. 재해석된 원작의 감성을 느끼는 데에 이 짧은 시간이면 충분했으니까. 그리고 게임 원작 영화도 완벽해질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았으니까.

아! 그리고 가장 처음에 기술했던 대로 찬찬히 영화를 봤다면 게임을 다시 플레이하고 영화를 꼭 한 번 더 보시라. 그때 보는 검문소와 주인공의 표정은 또 다른 모습일 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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