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롤드컵 기행기 #2] LoL 프로팀도 우승없이 사랑받을 수 있을까?

칼럼 | 이명규 | 댓글: 18개 |



롤드컵 일지 #2. 중부전선 이상 없다

바람이 많이 불어 윈디 시티(Windy City)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는 시카고는 샌프란시스코와 전혀 다른 곳이었다. 그렇게 다른 모습이기는 롤드컵도 마찬가지였다. 각 팀이 치고받으며 혼전 일로였던 그룹 스테이지와 달리, 오히려 모든 경기가 일방적으로 끝나버렸다. 특히나 2주차 막판 주모의 술병을 오락가락하게 한 몇몇 팀들의 부진과 달리 8강전은 5세트가 단 한 번도 없는 한국팀들의 완승으로 마무리되어, 마음껏 때아닌 애국심에 도취될 수 있었다.




사실 처음 시카고로 향하면서 관객 반응에 대해 걱정과 우려가 남아있었다. 샌프란시스코나 로스앤젤레스를 위시한 캘리포니아 지역은 예로부터 e스포츠의 중심지 역할을 하던 곳이었고, 그 옆의 라스베가스, 북쪽의 시애틀만 해도 여러 e스포츠 행사를 유치하고 IT 기업 혹은 엔터테인먼트 산업이 융성한 곳이기 때문에 비디오 게임 프로 리그에 대한 열기는 보장되어 있었다. 하다못해 4강전이 열릴 뉴욕도 그 상징성 때문에 굵직한 대회가 몇 번 있었다.

하지만 시카고는 글쎄, 미국 도시 중 탑3에 드는 규모이고 각종 프로 스포츠 팀이 밀집된 미국 중부의 자존심과도 같은 도시지만, e스포츠가 과연 성공할까 하는 의문은 가시지 않았다. 더군다나 지금은 지역 연고 야구팀 시카고 컵스가 100여년 만의 우승에 도전하는 중이었다.




하지만 그런 우려는 8강전 첫날 대회장에 도착하면서 비로소 풀렸다. 언뜻 보면 시카고는 여느 때와 같은 평화로운 도시였지만, 경기가 열리는 시카고 극장에 가까워질수록 e스포츠 팀의 저지를 입은 이들, 롤드컵 재킷을 입은 이들, 코스프레를 한 이들 등 누가 보아도 롤드컵을 위해 자리한 이들로 골목이 가득 찼기 때문이다. 비록 도시 전체가 열광하는 규모는 아니었지만, 충분히 하나의 중요한 행사로 인식되고 있었고, 심지어는 시카고 지역 한인 방송에서도 취재를 나와 뉴스를 내보내기도 했다.




기우와도 같았던 걱정은 사라지고, 이제 남은 것은 즐기는 것뿐이었다. 여느 때처럼 기자로서 내가 즐길 수 있는 것들은 하나씩 해나가기로 했다.




한국 VS 전 세계, 이젠 익숙하지!





첫날 경기인 삼성과 C9의 매치는 시작 전부터 팽팽한 긴장감이 돌았다. 아무래도 북미 최후의 팀이다 보니, 현장에 있는 사람들 중 삼성 선수단과 우리들을 제외하면 모두가 적인 느낌이었다. 경기 시작 전, 라이엇에서 제작하여 보여준 8강팀 인터뷰에서도 한국 선수만 6명이 나온 것과는 대조적이었다. 하지만 현지의 팬들에게는 승패가 아니라 자신들이 좋아하는 팀이 경기를 한다는 것 자체가, 그리고 이런 재미있는 대회가 벌어진다는 것 자체가 즐기기 충분한 거리인 것 같았다. 비록 C9이 패배를 기록하더라도 이들은 여전히 박수를 보내고, 미소를 지었다. 물론 약간의 독설이 추가되기는 했지만 말이다.




사실 이날 경기 시작 전 사소한 에피소드가 하나 있었는데, 바로 삼성 선수들이 경기장에 도착했을 때의 일이었다. 본래 경기장 뒤편의 전용 통로로 가야 했던 선수들을 태운 버스가 시카고 극장 정문에(!) 나타나자, 입장을 위해 줄 서있던 수십 수백 북미 팬들의 시선이 모두 거기에 쏠렸다. 그러나 잘못 찾아온 것을 늦게 깨달은 버스는 선수를 내리지 않고 길을 찾아 후진과 전진을 반복했고, 여기에 북미 팬들은 저마다 카메라를 빼들고 빨리 나오라며 즐거운 야유를 퍼부었다. 곧 다시 떠나가는 버스 뒤로 팬들은 하나 되어 USA 챈트를 내질렀다. 그 상황이 꽤나 재미있었기에 주변의 북미 팬들과 기자 또한 간단한 농담을 주고받았다.



삼성 선수들이 떠나간 다음 USA 챈트로 대동단결하는 팬들.
누군가 한마디만 꺼내면 바로 그게 기폭제가 되어 모두가 하나 된 마음으로 뭉쳤다.

기자는 8강전 내내 롤드컵 한정 재킷을 입고 다녔는데, 몇 안되는 동양인이어서 그런지 그동안 선수냐는 질문을 참 많이 받았다. 경기장 주변에서 재킷을 입은 채로 서성이고 있으면 누군가 다가와서 “플레이어?” 라고 물어보는 일이 잦았다. 수많은 다른 추측이 가능할텐데, 왜 하필 선수라 생각했는지 의문이다. 어찌 됐든 대단한 칭찬이라 생각하고 다음에 또 그런 질문을 받아보면 선수인 척 연기를 해볼 생각이다.




심지어 한 번은 “아 유 큐베?” 라는 질문도 받았다. 물론 짜장면도 좋아하고 헤어스타일도 비슷하게 처참하지만 마침 삼성이 C9을 3대0으로 격파한 날이어서 어딘가 무서운 마음에 적극적으로 아니라고 해명했다. 농담 섞인 대화가 오가고, 그쪽에서 기자의 안경이 비슷해서 그런 줄 알았다고 해명하더라. 뉴욕에 가면 꼭 ‘큐베’ 이성진 선수와 같이 사진을 찍어보겠다고 마음먹었다. 솔직히 안 닮았다고 애써 부정할 수가 없어서 말이다. 개인적으로 무척이나 재미있게 대화를 나누고(머리를 전기톱으로 잘랐냐든지) 인터뷰도 인상 깊었던 선수인지라, 좋은 핑계거리를 잡은 것 같다.



누가 누굴 닮은건지 한 번 대어 봅시다

이처럼 전반적으로 한국팀, 한국선수들에 대한 외국 팬들의 시선은 좀 복잡했다. 존경과 동경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동시에 약간의 질투도 섞여있는 듯한, 매우 모범적인 팬심을 보여주고 있었다. 한국팀들은 정말 대단하다는 말과 동시에 넌 어디 팬이냐고 물어보면 "당연히! C9이지!" 라고 대답한 북미팬이 그런 모습을 가장 단적으로 보여주지 않았을까?




멋진 경기승패로만 좌우되지 않는다


경기 측면에서 이번 8강전은 다소 싱거웠다고 볼 수도 있겠다. 이번 대회의 북산고교였던 ANX는 8강에서 한국팀을 피했다고 좋아했을 수도 있겠지만, 오히려 그들을 더 잘 알고 있는 유럽팀을 만난 대가를 혹독히 치렀다. 또한 ‘임팩트’ 정언영의 C9도 아쉽게 무너지고 말았고. 중국팀들 또한 기대치보다 부족한 모습을 선보였다.



사실 이런 사진을 찍는 맛에 인터뷰를 한다

어쩐지 이번 8강전에서는 패자들에게 눈길이 좀 더 갔던 것 같다. 물론 예의가 아니기에 패한 팀의 인터뷰도 진행하지 않았고 패배한 것으로 그들과의 이번 대회에서의 연은 끝이었지만, 8강전에서 인터뷰를 하며 이야기를 나눴던 ‘임팩트’ 정언영, ‘리클릿’ 키릴 말로페예프는 한 번쯤 더 만나 이야기를 나눠보고 싶은 충동이 들었다. 그들의 승부에 대한 욕심이나 자신감 역시 진짜배기였기 때문이다. 그룹 스테이지에서 한차례 시련을 이겨내고 올라온 그들이었기 때문에 뒷모습이 그렇게 짠했는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그런 선수들의 성적과는 별개로 개인적으로 가장 재미있다고 느꼈던 응원전인 한중전이 두 번이나 있었던 것은 호재였다. 한중 기자들 간의 응원전에서, 오직 둘 뿐인 한국 기자들이 절대적으로 열세이긴 했지만, 우리에겐 무엇보다 가장 큰 강점인 최고의 선수단이 있었다. 한국팀들이 밀리고 있는 상황에서도 여유롭게 미소 지을 수 있었다. 이번 경기를 어떻게 생각하냐는 한 북미 기자의 말에 나는 “무대 위에 코치들 까지 합쳐서 한국인이 9명이고 중국인이 3명인데, 내가 한쪽 팀을 응원하는게 의미가 있겠어?” 라는 말로 대답해줬다. 물론 재수 없다는 농담 섞인 핀잔을 듣기는 했지만.




하지만 그런 응원전은 일방적인 감정싸움, 혹은 사람 간의 우열을 나누는 유치하고 별로인 방향이 아니라, 그저 모두가 그때그때 자신이 즐거운 순간을 즐기는 방향으로 흘러갔다. 중국 기자들도, 나도 국적과 팀과 관련없이 나오는 여지없이 대단한 플레이들에는 모두가 박수를 치고 웃으며 주변 사람들을 둘러봤다. 특히 이번 기간 동안 친해졌던 한 중국인 기자는 나와 같이 거리에서 팬들과 이야기하며 게임의 향방, LoL의 현재 메타에 대한 심도 깊은(하지만 영어 능력이 허락하는 한도 내의) 대화를 나누기도 했다.



"??? : 어디 감히 신성한 LoL 경기장에서...

이번 롤드컵에서 한가지 더 특기할 일이 있다면, 지난 LoL 씬의 유명인들도 만나볼 수 있었다는 것이다. 특히나 대반전은 ‘스카라’ 윌리엄 리 였다. 그를 만난 장소는 다름 아니라 기자실이었다. 그가 선수와 코치를 거쳐 e스포츠 기자로 활동하는 사실도 그때서야 알았다. 사실 그룹 스테이지 때부터 어딘가 익숙한 외모에, 기자인데도 사람들이 다가와 같이 셀카를 찍거나, 싸인을 받아가는 모습에서 이상함을 느끼기는 했다. 팀 디그니타스의 상징이자 세상 모든 카타리나의 아버지인 이 남자를 여기서 보게 되니 감개무량이었다. 그 또한 선수로서나 코치로서 개인 성적의 아쉬움을 뒤로 하고 이 LoL계를 떠나기엔 그 매력이 너무나 아까웠던 것 아닐까. 내가 이 게임을 하면서, 이 e스포츠에 몸담으면서 알았고 만났던 인연들이 모두 어떻게든 길게 이어졌으면 하는 소망이 들었다.




결과 뿐만 아닌 모든 것이 즐거운 프로 스포츠는 가능할까?




온 도시가 축제 분위기였달까? (출처 : 시카고 컵스 공식 페이스북)

3일차와 4일차는 공교롭게도 미국의 국민 프로스포츠인 메이저리그 프로야구의 중요한 챔피언십 시리즈가 있는 날이었다. 특히나 100년이 넘는 시간 동안 우승하지 못한 걸로 유명한 시카고 지역팀 컵스가 올해 그 어느 팀보다 강한 전력으로 우승을 넘보고 있었기에 응원 열기가 뜨겁다 못해 광기에 가까웠다. 호텔에서 경기장으로 향하는 거리 곳곳에서 컵스의 팬을 발견할 수 있었고, 각종 빌딩이나 식당마다 시카고 컵스를 상징하는 모자나 구단 마크를 붙여놓고, 야간에는 빌딩 조명 자체를 ‘GO CUBS’로 해놓는 등 도시 전체가, 또 도시 안의 모든 이들이 이 스포츠에 열정을 가지고 있다는걸 깨달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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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막 떠오르는 신흥 프로 스포츠 리그와 세계에서 가장 많은 관중 동원을 자랑하는 최고의 프로 스포츠의 대회가 동시에 열리고 있는 이 도시는 e스포츠가 어떻게 발전해야 할지 그 이상향을 제시해주는 것 같았다. 100년 넘게 우승하지 못하는데도 미국 그 어느 팀보다 광적이고 충성도 높은 팬들을 보유한 시카고 컵스는 최근 흥행 부진 끝에 대회 중단을 선언한 스타크래프트 프로리그를 생각나게 했다. 팀의 성적이나 승패의 재미를 떠나서 어떤 스포츠 생태계를 굳건히 하고 팬들이 즐기게 만드는 원동력은 대체 무엇일까? LoL 뿐만 아니라 e스포츠가 이런 기존의 프로 스포츠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기 위해서는 그 답을 구해야만 한다.




다음 무대인 뉴욕 매디슨 스퀘어 가든에서는, 한국의 3 팀과 유럽의 1 팀이 결승 티켓을 위해 사투를 벌이게 된다. 선수들은 최고의 무대에 오르기 위해 지금도 필사적인 노력을 하고 있을 것이다. 이번 롤드컵 이후로 우리가 이런 멋진 대회, 멋진 경기들을 얼마나 더 볼 수 있을지 희미하게 나마 가늠해보고 싶은데, 도저히 감이 오지 않는다. 그저 이 흐름이 끊기지 않고, 누구나 인정하고 더 많은 이들과 함께 나눌 수 있도록 우리도 선수들처럼 노력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부디 여기에 공감하는 사람이 많길 바라면서, 다음 주에는 동부의 이야기를 들고 올 수 있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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