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아듀, 그린 게임랜드... 추억이 된 '철권의 성지'에 바치는 소회

칼럼 | 박태균 기자 | 댓글: 3개 |
추억은 지난날을 돌이켜봤을 때 떠오르는 모든 것이다. 장롱에 켜켜이 쌓인 이불 위에 올라가면 느껴지던 압도적인 안정감과 아늑함을 기억하는가. 노을 지는 놀이터에선 누군가의 어머니가 아이를 찾으며 하루의 끝을 알렸고, 크리스마스가 다가올 때마다 곳곳에 설치되는 은은한 연노랑빛 조명은 당신의 세상을 한층 따뜻하게 만들었을 것이다.

추억은 떠올릴 수는 있어도 당시의 경험과 감정을 똑같이 반복할 수는 없다. 추억이 만들어지는 과정엔 반드시 무언가의 상실이 있기 때문이다. 지나온 시절의 시간에 대한 상실, 첫 경험이 주는 설렘에 대한 상실, 내가 아껴왔던 사람이나 물건, 장소에 대한 상실. 무언가가 사라졌기에 실재는 추억으로 변하고, 이에 모든 추억은 그리움을 낳는다.



▲ '철권의 성지' 그린 게임랜드는 모든 철권 유저들의 추억이 됐다

지난 9일, '철권의 성지' 그린 게임랜드(이하 그린)가 폐업했다. 갑작스러운 소식에 수많은 국내외 철권 유저들이 충격에 빠졌다. 누군가에겐 이미 추억이 된 오락실이지만, 또 다른 누군가에게 그린이란 추억으로 삼기엔 아직 이른 장소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린은 그 장소 자체를 상실함으로써 앞으로는 오직 사람들의 추억 속에서만 존재하게 됐다.

한때 철권에 열정을 바쳤던 필자에게도 그린 폐업은 큰 아쉬움으로 다가왔다. 고등학생 시절 그린에 수차례 방문해 데스 매치(한쪽이 승단 혹은 강등될 때까지 대전하는 것)를 치렀고, 그린의 명물이자 경기력을 늘려주기로 유명했던 사장 아주머니의 냉커피도 꽤 마셨다. 방송으로만 봐왔던 '네임드' 고수 유저들에게 조심스레 대전을 부탁해 한 수 가르침을 받기도 했다.

이후 바쁜 생활에 치이며 오락실에 발길을 끊게 됐지만, 어느 경로로든 철권을 접할 때마다 그린에서의 경험들은 생생하게 떠올랐다. 지금까지 살아오며 철권만큼 진심으로 즐겼던 것이 몇 개나 있었던가. 게임을 좋아하게 해 준 것이 철권이었고, 철권을 더욱 좋아하게 해 준 것이 그린이었다. 필자에게 그린은 일찍이 추억의 장소가 됐지만, 느닷없는 폐업 소식에 마음이 흔들리는 건 어쩔 수 없었다.



▲ 누군가에게 그린은 청춘을 바친 보금자리이자 인생 그 자체였을 것이다

필자도 이럴진대 그린에 살다시피 하던 철권 유저들은 어떨까. 지금도 각종 철권 대회에서 활약 중인 현역 프로게이머들을 포함해 폐업 전날까지 그린을 방문했던 특기도 취미도 철권인 열혈 철권 유저들 말이다. 집보다 그린에 있었던 시간이 더 많았을 그들에게 그린이란 청춘을 바친 보금자리이자 인생 그 자체였을 것이다. 그린이 두 번 다시 돌아갈 수 없는 장소가 된 지금, 그들이 느낄 비통한 심정은 가늠조차 못 하겠다.

21년간 그린을 운영해 온 사장 내외의 슬픔도 상당했을 것이다. 윤 사장은 무뚝뚝한 겉모습과 달리 인터뷰를 통해 그린을 찾는 손님들을 '아들'로 여긴다고 이야기할 정도로 철권 유저들에 대한 각별한 애정을 보였다. 손님들의 건강과 안부를 물으며 오락실에 훈훈함을 더했던 사장 아주머니의 따뜻함은 말할 필요도 없다.

한때 발 디딜 틈 없이 철권 유저들로 가득했던 그린을 폐업하기로 했을 때, 사장 내외는 어떤 마음이었을까. 시리즈가 거듭될수록 비싸지는 기깃값을 감당하면서도 사람들의 발길이 점차 줄어드는 것을 느꼈을 때, 자타가 공인했던 '철권의 성지'라는 타이틀을 모든 철권 유저의 추억 속에 묻어야만 했을 때, 사장 내외가 감당해야 했던 안타까운 감정들은 상상조차 할 수 없다.

그러나 단 한 가지, 폐업 과정에 있었던 트로피 처분만큼은 더없이 안타깝다. 그린을 아지트로 삼았던 몇몇 철권 프로게이머들은 자신들의 피와 땀, 영광과 명예를 그린과 함께했다. 하지만, 윤 사장은 '트로피의 주인들이 과거에 연연하지 말고 미래로 나아갔으면 하는 생각'에 별다른 통보 없이 해당 트로피들을 버렸다. 결국 이 사건은 격투 게임 커뮤니티에서 큰 화제가 됐고, 그린의 아름다운 마무리에 흠집을 냈다.



▲ 트로피들이 길거리에 버려진 모습 (출처 : '무릎' 배재민 트위터)

한편, 철권7의 PC(스팀) 버전 발매로 철권 시장의 규모 자체는 크게 성장했다. 철권 월드 투어(TWT)의 정기 개최에 따라 전 세계 e스포츠 프로게임단이 국내 철권 고수들을 후원하기 시작했고, 개인 스트리밍이 용이해지며 철권을 생업으로 삼았던 유저들의 생활 형편은 지난날보다 훨씬 나아졌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그 어떤 물질적인 풍요로움도 그들의 공허함은 채우기 어렵겠다. 그린에서 매일같이 밤을 새워가며 동료들과 함께 울고 웃었던 그 시절로 다시는 돌아갈 수 없게 됐기 때문이다. 그린을 거쳐 현역으로 뛰고 있는 철권 프로게이머들 외에도, 본인의 젊음을 그린에 투자했던 모든 철권 유저들이 같은 심정일 것이다.

물질적인 공간으로서의 그린은 이제 없다. 하지만 '철권의 성지', 대한민국의 철권 문화를 만들고 선도했던 상징적인 공간으로서의 그린은 영원할 것이다. 그린을 추억하는 많은 이들의 가슴 속에서, 그들의 그리움을 배불리 먹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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