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수첩] '한국'을 그릴 게임을 기다리며

칼럼 | 강승진 기자 | 댓글: 34개 |
제주 4.3은 우리 근현대사에 있어 쉬이 입 밖에 꺼내기 어려운 역사였습니다. 오랜 기간 반공 논리와 함께 정권 붕괴를 노린 폭동으로 불렸고 제국주의의 맞서 통일 정부 수립을 위한 민중 항쟁이라는 주장도 있었습니다. 1980년대에 들어서며 논의 움직임이 커지며 그 관심이 높아졌고 참여정부에서는 국가원수의 사과가 있었지만, 여전히 진상 규명이 이뤄지고 있는 오늘날의 역사입니다. 그리고 이념의 사이에서 평범한 일상을 뺏긴 일반 시민들이 수없이 살해당한 아픔의 역사이기도 하죠.

아직은 사람들의 관심이 높지 않은, 그래서 글이나 영상으로는 쉽게 전달할 수 없었던 이야기기기도 한데요. 이런 과거를 체험하는 데에는 게임 만한 게 없을 겁니다. 코스닷츠(COSDOTS)의 언폴디드: 동백이야기(언폴디드)는 그런 제주 4.3을 겪은 13살의 주인공 동주의 시선으로 이를 게이머들에게 전달하죠.

아마 최근 출시된 몇몇 게임이 역사적 사실에 집중해 게임다움을 잃었던 것을 기억하실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한국 역사를 다룬 게임에 대한 기대보다는 걱정이 더 앞설 수도 있고요.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언폴디드는 앞서 모바일로 선보인 2개의 작품이 그러했듯. 아니, 그 장점을 더 잘 살린 포인트 앤 클릭 어드벤처로서의 정체성에 그 장점이 있다 할 수 있습니다.




예전 시에라나 루카스아츠 게임들이 그랬듯 포인트 앤 클릭 게임의 핵심은 그래픽 어드벤처가 보여줄 수는 시각적 효과. 그리고 하나의 거대한 스토리를 바탕으로 마우스 클릭으로 화면을 오가는 배경과 퍼즐입니다. 아무래도 이번 프롤로그가 게임의 도입부를 간략하게 다룬 만큼 차근차근 쌓이는 이야기의 흐름은 맛만 보여줄 수 있었다면, 그래픽 연출과 퍼즐의 짜임새는 가지고 있는 색을 제대로 칠해 보여줬죠.

2인 개발로 시작한 작품이 낼 수 있는 역량, 기술력 등을 고려해 최대한 색을 덜어낸 아트는 앞선 두 작품을 넘어 한층 물렁물렁해졌습니다. 목각 인형처럼 최소한의 움직임으로 구현한 인물들의 애니메이션은 더 높은 프레임으로 보다 자연스럽게 움직이고 애니메이션이 해줘야 할 역할에도 충실하죠. 물건을 건네주는 데 손만 턱 내밀면 알아서 물건이 옮겨가는 게 아니라 정확히 물건을 집고 그걸 전해주는 모습을 제대로 구현했습니다.

이야기에 온전히 빠져들어야 하는 게임에서야 너무나 당연하게 구현해야 할 요소 중 하나이지만, 근래 이런 부분에서 실망감을 안겨준 게임들이 더러 있었기에 더 눈에 띄는 부분이기도 하죠.

이런 매끈한 애니메이션과 제한적인 색 구성. 그리고 펜과 먹으로 칠해진 배경은 때론 수묵화 같기도 하고 펜화 같기도 한 오묘하면서도 정겨운 이미지를 그려냅니다. 아마 이런 평화로운 분위기의 아트가 곧 다가올 비극을 더욱 비참하게 그려내는 데 쓰일 거라는 점에 괜히 마음이 무거워지기도 하지만요.



▲ 분위기를 제대로 살려낸 아트와 애니메이션

언폴디드의 아트가 게임의 분위기를 만들어낸다면 게임으로서의 힘을 내는 건 퍼즐입니다.

게임 속 퍼즐은 대개 '논리'로 귀결됩니다. 눈이 돌아가는 판타지나 화려한 미래 기술은커녕 제주도의 가장 어려운 시기를 다룬 만큼 호리병이나 빨랫비누, 붓 처럼 퍼즐 요소들 자체는 굉장히 토속적이죠. 그리고 프롤로그 스토리의 기둥인 깃발 재료 찾기는 그런 평범한 물건들을 어떻게 논리적으로 다룰 수 있는지 보여줬죠.

예를 들어 깃발에 쓰일 노란 천을 만들기 위해서는 흰 천을 황색으로 물들이는 염색 작업이 필요한데요. 설익은 감을 소금물에 잘게 으깨고 그 물에 천을 담가 염색하면 노란 천을 얻습니다. 설익은 감부터 소금과 물, 흰 천, 재료들을 다 담을 큰 대야까지. 이것들을 구하고 찾아가는 과정이 또 다른 퍼즐과 이야기들이 줄지어 연계되어 있죠.

그렇다고 이런 퍼즐이 마냥 스스로 찾아서 풀어내야 할 어려운 것으로 남아있는 건 아닙니다. 어떻게 풀어야 할지 힌트도 주고 주인공 동주가 이를 일지에 적어내며 중요도를 알려주기도 하죠. 또 풀이 자체가 현실적이고 상식적인 선에서 이루어지고 그 힌트도 대화를 통해 찾을 수 있습니다. 이를 바탕으로 하나하나 정답에 다다를 때는 막히기도 하고 어떻게 해야 할지 답답하기도 하지만, 풀고 나면 무릎이 탁 쳐지는 그런 논리적인 퍼즐이죠.



▲ 상류에 빨랫비누를 풀어



▲ 아주머니를 유인한 뒤



▲ 대야로 천 염색하기. 이런 퍼즐은 대화와 추리로 풀어나간다



▲ 시를 좋아해 일지에 이것저것 기록하는 주인공 동주의 특색을 살린 저널 시스템

그리고 당장 눈앞에 있는 문제를 풀어나가는 과정에서 잘 알지 못했던 역사적인 사실을 대화와 물건. 그리고 주인공의 독백 등을 통해 자연스럽게 전달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언폴디드는 게임의 핵심은 재미 그 자체에 두었습니다. '교육적' 요소를 마냥 앞에만 두지 않은 거죠. 우선 퍼즐을 기반으로 한 포인트 앤 클릭 어드벤처로 게임 자체에 몰입하고 딸려오는 이야기들에 귀를 기울일 여지를 만드는 식입니다. 물론 그러면서도 핵심 스토리는 제주 4.3의 이야기를 따라갈테고요.

대개 역사적 사실을 바탕에 둔 게임이 범하는 우(愚)는 그 바탕에 있는 이야기와 메시지를 플레이어에 무리하게 주입하고자 하는 데 있습니다. 게임 자체가 견뎌낼 무게 이상의 이야기 한도를 그리고 이를 플레이어가 짊어지게 하기도 하고 메시지를 전달하는 데 게임 역량 이상을 써버리기도 하죠.

오히려 게임 속에서 역사적 교훈과 교육을 겸할 수 있다면 그건 너무나도 또렷한 장점입니다. 하지만 그 메시지에 몰입해 게임으로서의 체급 키우기에 부실했다면 '게임' 그 자체로서의 가치를 제대로 지녔다고 할 수 없겠죠. 그렇기에 언폴디는 2명으로 시작한 프로젝트가 낼 수 있는 역량 안에서 '게임에 더 가까운 역사 소재의 작품'을 비교적 온전하게 그려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하지만 언폴디드가 보여준 이런 만듦새는 되려 아쉬움을 사기 충분합니다. 게임 자체로서의 아쉬움이 아니라 한국적인 것을 다루는 게임이 이렇게 뿐이 나올 수 없는 현실 말이죠.



▲ 게임 속에 주어진 목적과 힌트들 속에 당시의 시대 모습이 담겨있다

근래 우리의 역사를 다룬 게임은 다양한 장르로 출시됐습니다. 스토리 기반 게임으로 매번 좋은 평가를 끌어낸 MazM의 페치카는 잘 알려지지 않은 독립운동가 최재형 선생의 이야기를 다룬 게임으로 2020 게임대상 굿 게임상을 받기도 했습니다.

역사뿐만 아니라 한국적인 소재로 만들어진 게임들도 꾸준히 선보였습니다. 플랫포머의 역할에 충실한 카르마 나이트는 무당의 모습을 떠올리게 하는 한국적인 디자인의 주인공과 적들을 그리고 있고 출시 전부터 큰 관심을 끈 사망여각은 바리공주설화에서 그 이야기를 가져왔습니다.

모바일 마켓과 PC 플랫폼 스팀 등 게임을 선보일 수 있는 창구가 다양해지며 이처럼 한국을 게임 속에 그려내는 인디 개발사는 많아졌죠. 하지만 큰손들의 참여는 여전히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모바일 주류를 이끄는 MMORPG부터 액션, RPG 등의 배경은 흔히 판타지 세계관으로 불리는 대게 서구 중세 유럽의 모습을 따릅니다. 세계의 모습이 게임에 녹아들었다기보다는 최적의 시스템에 게임 세계를 덧입히는 데 우선점을 두고 있어 간혹 등장하는 현대물, 혹은 한국 배경의 이야기도 그저 새로운 스킨을 입힌 것 정도로 느껴지죠.

기업 주도의 한국형 게임이 역사나 배경을 그린 게임이 아니라 과금 구조나 시스템의 국산화를 일컫는 'K-게임'으로 비하하듯 쓰이는 것도 그런 이유기도 하고요.



▲ 연해주 독립운동사를 다루고 좋은 평까가지 끌어낸 MazM: 페치카.

우리나라를 소재로 하는 게임을 만들기 어려운 분위기도 중견 기업들이 쉬이 발을 들여놓기 어려운 데 한몫하고 있습니다.

광복 이전 일본에 의한 피해와 수탈, 그리고 한국전쟁으로 인한 이념 대립이 여전한 근현대사는 그 관계자가 아직도 살아있는 오늘날의 역사이기도 합니다. 어느 한쪽의 입장을 잘못 대변했다가는 선한 의도와 관계없이 정치-사상적인 문제로 변모되어 버리기도 하죠.

그 이전의 역사들은 창작자의 자유로운 상상력이 힘을 내기 어려운 분위기가 조성되어 있습니다. 게임이 아니더라도 창작물의 성격과 관계없이 역사적 사실에 기반을 두지 않은 내용이나 사건에 고증 오류와 왜곡을 이유로 비판받는 경우가 허다하죠. 모든 걸 따진다면 결국 역사서 한 줄에 적인, 혹은 후손들이 주장하는 1차원적이고 영웅적 인물만을 그려낼 수밖에 없을 겁니다.

당장 해외 게임사들이 역사를 어떻게 게임화하는지 생각하면 확실히 그 차이가 보입니다. 자신을 제육천마왕으로 칭했다고 알려진 오다 노부나가는 게임 속에서 진짜 마왕이나 악마, 패왕 등 최종보스에 걸맞은 인물로 그려지곤 하죠. 서구권 개발사 역시 기존 역사적 사실에 대한 조사, 그 위에 창작자들의 자유로운 상상력이 올려지기도 합니다. 그래서 게임 속에서 역사적 인물들은 재미없는 수업 시간의 문장이 아니라 그 어떤 영화, 드라마 속 인물보다 매력적으로 그려지죠.

시장성 확대로 암울했던 시기보다는 나아졌다고는 하지만, PC나 콘솔 A급 게임의 씨가 말라버린 상태에서 섣불리 한국 배경의 게임을 내놓기도 쉽지 않습니다. 이미 오랜 기간 명맥이 끊겨 버려 시장성조차 제대로 판단할 수 없는 상황에서 뛰어드는 건 큰 모험과도 같으니까요.



▲ 귀무자2의 오다 노부나가. 이제는 인간이 더 어색하다



▲ 기존 역사 위에 암살단의 이야기를 교묘하게 엮어내는 어쌔신크리드

한국적인 게임을 더 많이, 더 높은 품질로 만날 방법 중 현실적인 건 네오위즈와 사망여각이 보여준 퍼블리싱 협약. 혹은 한발 앞선 투자일 겁니다. 인디 개발사들은 기업이 하지 못하는 참신한 발상과 아이디어를 게임에 녹여냄과 동시에 마케팅이나 QA 등을 좀 더 전문적인 기업이 돕는 식으로 퀄리티도 함께 올릴 수 있겠죠. 투자가 함께 이루어진다면 아이디어를 감당한 재원을 더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근본적으로는 한국형 게임에 대한 고민을 그저 인디 개발자들에게 밀어 넣는 분위기가 형성되서는 안됩니다. 충분한 자원과 그에 걸맞은 연출과 게임플레이가 받쳐진 대형 게임의 존재는 한국형 게임을 세계에 알리는 힘이 되고 나아가 소규모 인디 게임이 빛을 발하는 그늘을 만들기도 하니까요.

토탈워와 같은 대전략의 배경이 고구려, 백제, 신라의 삼국통일 전쟁이고 크루세이더 킹즈 같은 시뮬레이션의 주인공이 조선 시대의 왕위를 노리는 낮은 서열의 왕자이며 일본 관료를 독립운동가와 함께 암살하는 오픈 월드. 그런 게임은 결국 아무것도 하지 않는 상태에서는 나오지 않을테니까요.

크루세이더 킹즈 등 오랜 기간 역사 기반 시뮬레이션을 개발한 패러독스 인터랙티브의 알렉산더 울프너는 지난 IGC에서 한국 역사와 문화의 가능성을 이야기했습니다. 길고 고유한 역사는 곧 흥미로운 역사이며 한국을 잘 모르는 해외 게이머들에게 흥미를 심어줄 수 있다고 말이죠. 아픈 역사를 밝혀내고 찬란한 역사를 기억하는 것 모두 말이죠.

다만, 그 가능성이 '국뽕'이라는 무분별한 비난과 인디 게임 개발자들의 피와 땀에만 의지하는 지금의 한국이 계속된다면 영영 상상의 영역을 깨고 나오지 못할지도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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