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수첩] 370일의 항해 마친 '문명 온라인'... 그저 실패에 불과한가?

칼럼 | 정재훈 기자 | 댓글: 68개 |



11월 2일. 엑스엘게임즈의 송재경 대표가 짧은 글을 남겼다. 주요 골자는 '문명 온라인'의 서비스 종료. 12월 7일부로 문명 온라인의 국내 서비스를 끝낸다는 이야기였다. 작년 12월 2일 OBT를 실시한 이후 정확히 370일. 출시 전, 대한민국 게임계에서도 손꼽히는 기대작이었던 '문명 온라인'의 항해는 이렇게 마무리되었다.

2년 전이었던가. 2014년 지스타 때만 해도 상상도 하지 못했던 일이다. 벡스코 B2C 관의 한쪽에 엑스엘 게임즈의 부스는 정말 단단해 보였다. 뭔가 자신만의 영역을 구축한 것처럼 보였다고 해야 할까. 다른 게임사처럼 엄청나게 크지도 않았고 다양한 작품을 내세운 것도 아니었다. 그저 문명 온라인이라는 작품 하나였다. 그리고 1년이 지나 12월 2일. 문명 온라인의 오픈베타 테스트가 시작되었다. 이후 또 1년이 지났다.

그냥 '그렇구나'하고 넘어갈 수도 있는 일이다. 온라인 게임의 종료 소식은 못해도 1주일에 한 번은 듣는 소식이다. 모바일 게임으로 치면 하루에 몇 작품씩 종료 공지를 보는 날도 있다. 이 모든 작품에 어찌 사연이 없으랴. 이를 만들고, 운영해온 이들에게는 자식과도 같은 게임들이리라. 하지만 그마저도 게이머들에게는 잠시 눈앞을 스쳐 간 게임에 불과하다. 나 또한 다르지 않다. 그간 종료 공지를 본 게임만 몇 종이던가. 하지만 문명 온라인의 종료 소식은 조금 달랐다. 그저 스쳐 갔다기엔 문명 온라인에서 받은 인상이 워낙 강렬했기 때문이다.



▲ 2014년 지스타, 엑스엘 게임즈 부스



■ '오판'이었나, '낙관'이었나

냉정하게 보자면 한계가 많은 게임이기는 했다. 세션이 끝날 때마다 게임 정보가 리셋되는 점이라든지 필수적으로 일정 수 이상의 유저가 있어야 게임이 성립되는 등, 국내 게이머의 정서와는 사뭇 맞지 않는 점들이 많았다. '문명 온라인'이 게임으로서 성공하기 위해서는 필요한 전제조건이 너무 많았다는 것이다.

세력 간의 팽팽한 구도가 만들어지려면 일정 수 이상의 유저가 골고루 네 세력권에 분포해야 했고, 그러면서도 생산에 종사하는 유저와 전투 유저 사이의 비율이 일정하게 맞춰져야 했다. 세션이 리셋되더라도 유저들이 탈력감을 느끼기보다는 새로운 전투에 뛰어들어야 했고, 이 모든 과정이 근본적으로 재미있어야 했다. 하지만 문명 온라인은 이 모든 요소를 갖추지 못했다.

결국, 유저는 떠났다. 온라인 게임에서 유저는 곧 게임의 생명을 이루는 기본 단위인 세포와도 같다. 물론 종료는 어디까지나 '국내 서비스'에 한정되기 때문에 문명 온라인이 이대로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어디까지나 국내에서는 더 볼 수 없다는 뜻이다.

서비스 종료 소식을 보며 마음이 싱숭생숭해졌다. 한때 재미있게 했던 게임이어서도, 기대작이었던 게임이어서도 아니다. 앞서 말했듯 그냥 지나갈 수도 있는 일이었다. 그럼에도 뜻 모를 아쉬움이 남는 이유는 지난 시절, 문명 온라인을 보며 내심 바라던 일말의 기대가 스러진 것 때문일지도 몰랐다.

"그게 우리나라에서 될까?"

문명 온라인에 대한 이야기를 처음 들었을 때, 동료와의 대화는 대부분 이 방향으로 흘러갔다. 시스템에 대한 이야기, 컨셉에 대한 이야기. 말할 것은 많았지만, 결국 끝은 똑같았다. 국내에서는 안 통할 것 같다는 결론. 부정적인 마무리였지만, 동시에 다들 또 다른 희망도 품었다. 게임 기자라고 다 알 리가 없으니까. 우리가 생각지 못한 가능성을 송재경 대표는 보았을 수도 있었다.

송재경 대표라고 우리가 서로에게 날린 의문과 같은 질문을 받아보지 않았겠는가? 아마 수없이 많이 들었을 거다. "그런 시스템이 국내에서 통할 것 같은가?" 내가 송재경 대표의 마음속을 들여다본 것은 아니지만, 아마 스스로도 자문하고 또 자문했을듯싶다. "과연 될 것인가?" 그만큼 문명 온라인은 기존의 MMORPG와는 너무나도 달랐다. 같은 MMORPG라 생각하기 어려울 정도로.

결과적으로 엑스엘 게임즈는 불도저처럼 개발을 밀고 나갔다. 개발 방향을 선회하지도 않았고, 과할 정도로 현실과 타협하지도 않았다. 세션제, 유저들에 의해 만들어지는 세력 구도. 완성된 모습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문명 온라인에는 그들이 말했던 뼈대가 담겨 있었다. 아쉽게도 우리의 의문은 빗나가지 않았지만 말이다.



▲ 어쨌든 그들이 그리려던 그림은 모두 그려냈다.



■ '성공적인 실패'

서비스 이후의 일은 제쳐놓고서라도 그들이 생각했던 게임이 그대로 나왔다는 점에 박수를 보내고 싶었다. 어느 순간부터, 국산 MMORPG 자체가 드물어졌다. 수없이 나오는 모바일 게임에 반비례하듯 온라인 게임 신작의 숫자는 줄어만 갔고, 그나마 나오는 게임들도 대부분은 무채색의 게임들이었다. 이미 다른 많은 게임에서 검증받아온 시스템에 약간의 아트, 그리고 조금의 변조. 주목할 이유라곤 말 그대로 '신작'이라는 타이틀밖에 없는 게임들이었다.

게임업계를 보고 있기에 이해한다. 게임 개발이 어디 한두 푼 드는 프로젝트인가. 수백억이 넘는 돈을 때려 부으면서 실험을 할만한 용기있는 기업은 많지 않다. 수백억을 써도 티도 안 나는 굴지의 대기업이면 모를까, 점점 축소되고 있는 MMORPG 시장에 그럴만한 담량을 가진 기업은 없을 거다. 결국, 안정과 타협을 선택하기 마련이다. 전 모델에 비해 조금 더 좋아지고, 조금 더 잘빠진 모양으로만 나와도 불티나듯 팔리는 스마트폰처럼, 어느새 MMORPG도 그렇게 되어버렸다. 그간 사람들이 좋아해 온 이것저것을 모아 새 포장지로 정성스레 감싼 작품들 말이다.

반면 엑스엘 게임즈는 과감했다. 그들 또한 성공에 대해 기대는 했을망정, 확신은 할 수 없었을 거다. 그럼에도 문명 온라인의 노선을 바꾸지 않았다. 50의 성공을 거둘 길을 벗어나 0 아니면 100의 길을 시도했다. 실패했지만, 그 시도는 멋졌다. 게이머들은 문명 온라인과 같은, 기존의 게임과는 궤를 달리하는 작품이 나올 수 있다는 점을 인지했다. 그리고 문명 온라인이라는 게임 안에서 재미있었던 점과 흥미로웠던 요소들을 잡아냈다.

MMORPG는 결국 플레이어가 각자의 구실을 하는 게임이다. 하지만 이 사전적 의미는 이제 그냥 비슷한 한 종류의 게임을 일컫는 관용어구가 되어 버렸다. 대부분의 MMORPG에서 모든 직업은 결국 전투를 위해 존재한다. 남들보다 더 강하고, 더 잘 싸우기 위해 게이머는 노력한다. 칼이든, 마법이든, 결국 그 수단이 다를 뿐 게임을 관통하는 주제는 싸움과 이를 위한, 그리고 이를 통한 성장이다.

하지만 문명 온라인은 다른 가능성을 제시했다. 싸움을 싫어하는 유저들은 뒤에서 자신의 역할만 해도 충분히 세력에 이바지할 수 있고, 게임을 즐겁게 플레이할 수 있다. 내가 직접 싸우지 않아도 승리할 수 있다는 것. 기존의 MMORPG에서 쉽게 볼 수 없는 모습이다. 물론 실제 게임에서는 잦은 트롤링과 비정상적 플레이가 난무해 이런 모습들의 빛이 바랬지만 이는 게임의 완성도 측면에서 따질 문제다. 중요한 것은 MMORPG를 즐기는 게이머들에게 새로운 관점을 심어주었다는 그 자체다.

게임 산업이 발전하는 길도 이와 같았다. 새로운 게임에서 재미있는 요소를 발견하고, 이 요소를 또 다른 게임의 흥미로운 점과 섞고 다듬어 새로운 게임을 만들어낸다. 수십 년간 이런 '시스템' 디자인 자체는 저작권이 없는 오픈 소스와도 같이 여러 게임에 퍼져 나갔고, 이 과정이 반복되면서 게임은 점점 발전해왔다.



▲ 이 많은 '로그 라이크' 게임들도 결국은 '로그'라는 게임에서 출발했다.



■ 나아갈 '잠재력'은 충분하다

국산 온라인 게임의 정체기가 괜히 온 것이 아니다. 어느 순간 이런 시도가 사라져 버렸다. '풍류공작소' 처럼 시대를 앞선 자율성을 추구한 게임이나 '허스키 익스프레스'처럼 전혀 익숙치 않은 개썰매를 전면에 내세운 게임들. 성공은 거두지 못했지만 게이머들에게는 깊은 인상을 남겼다. 물론 이 게임들이 '시도'로 남은 이유는 성공을 거두지 못했기 때문이다. 새로운 시스템을 내세워 성공한 게임들은 곧 레퍼런스가 되었고, 수없이 카피되어 마치 분신처럼 다른 게임으로 만들어졌다.

앞서 말했듯 충분히 이해가 가는 일이다. 그러므로 이런 시도를 하지 않는다고 뭇 개발사들을 비난하고 싶은 것은 아니다. 그들이라고 새로운 게임을 만들기 싫었을 리가 없다. 주변 환경이 허락하지 않고, 현실이 앞을 가로막기에 어쩔 수 없는 일이었을 거다.

문명 온라인의 서비스 종료 소식을 듣고 언젠가 이날이 올 것을 예상했음에도 아쉬움이 남는 것 또한 같은 이유다. 비록 실패했을지언정, 그들은 새로운 도전을 했고 작게나마 게이머에게 새로운 시선을 열어 주었다.

나로서는 지금 이 시점에서 어떤 말도 하기 어렵다. 다른 개발사에 문명 온라인처럼 새로운 시도를 해보라고 말할 수도 없고, 개발사 입장에서도 섣불리 결정할 수 없는 일이란 것도 알고 있다. 그저 아쉬울 뿐이다. 새로운 방향을 개척하는 게임들이 나오기 어려운 현 상황이 아쉽고, 조금이나마 변화의 가능성을 보여주었던 작품이 성공을 거두지 못한 채 그저 가능성의 제시만을 남겨둔 채 스러진 것이 아쉽다.

비관하지는 않는다. 개발사의 주체를 누구로 봐야 할지는 모르겠으나, 적어도 내가 그간 만난 개발자들은 가슴 속 어딘가에 그만의 게임에 대한 열망을 품고 있었고, 충분한 실력을 갖추고 있었다. 발휘할 기회만 오면 된다. 황무지처럼만 보이던 땅에서 문명 온라인이라는 새싹이 올라왔다. 비록 거목으로 성장하지는 못했지만, 앞으로 싹을 틔울 수 있는 씨앗들이 땅 밑에 가득 묻혀 있다. 언젠가 한두 방울 이슬비라도 내리기 시작하면, 그때 또 다른 새싹이 돋아나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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