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어디까지 허용해야 할까? 해킹과 편의의 경계에 선 게이밍기어

칼럼 | 장인성 기자 | 댓글: 7개 |
내 오른손의 중지 손톱은 약간 어긋나 있다. 사리 분별 어려운 꼬맹이 때부터 오락실을 드나들었는데 50원 한 판으로 오래 할 수 있는 걸 찾다보니 그나마 쉬운 슈팅 게임을 골라야 했다. 짧은 손가락으로 총알을 너무 열심히 쏴대다 손가락 옆의 살이 조금씩 부르터 내려앉았으니, 소싯적에 영광의 상처랄까.

오락실에서는 버튼을 연타하기 위한 온갖 방법을 구경할 수 있었다. 손가락만으로 도구를 압도하는 용자들이 간혹 있었지만, 대부분은 도구가 승리했다. 고무줄, 플라스틱 자, 작은 바퀴, 가챠 구슬... 버튼 연타 방법은 그야말로 천차만별. 그러고보면 인간은 호모 파베르, 도구의 인간이 맞다. 오락실 버튼 누르기나 잠들기 5초 전의 상상력처럼 쓸 데 없는 곳에서만 유독 창의력이 빛나서 그렇지.

오락실보다 PC방이 대세로 자리잡았지만 게이머들의 성향은 그때나 지금이나 비슷하다. 치팅 프로그램이나 핵(HACK)처럼 불법적인 요소가 있거나 게임사에서 금지하는 버그만 아니라면 누구나 나름의 편의를 추구하기 마련이다. 특정 키를 자동으로 눌러주는 기계 장치나 매크로같은 것들.



▲ 비행경로를 기억하기 위해 실제로 써본 방법들. 모니터 베젤에 붙인 포스트잇이 최고다.

해가 갈수록 성장할 것으로 예상되는 유망 분야가 게임 산업이고 덕분에 게이밍 PC와 게이밍 노트북은 매년 꾸준히 성장하고 있다. 그래서 탄생한 산업이 게이밍 기어다. 게임을 할 때 반드시 도움이 될 것만 같은, 꼭 그렇지는 않지만 그래도 사면 어쩐지 게임 실력이 늘어날 것 같은 콘셉트의 제품들이다. 밋밋한 업무용 제품과 달리 화려한 색상과 폼나는 제품 디자인은 필수.

특히 지나친 가격 경쟁때문에 차별화에 실패하고 사양 산업으로 접어들어가던 키보드와 마우스는 게임 산업때문에 그야말로 기사 회생을 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 이제는 글로벌 기업이 유명 게임 대회나 e 스포츠를 후원하는 것도 흔하고 아예 게이밍 기어를 차기 성장 목표로 삼는 IT 제조사들도 많아졌다.

초기에는 게이밍 기어로 부르기 민망한 제품들도 있었으나 최근에는 정말 획기적인 기능과 시선을 사로잡는 디자인을 갖춘 제품도 많다. 수많은 제조사들이 경쟁하다보니 신제품들도 속속 등장하고 또 제 값어치를 하는 제품들이 늘어나고 있으니 소비자의 입장에서는 참 즐거운 일이다.

다만 발전이 항상 긍정적인 장점만 있는 것은 아니다. 자동차의 등장으로 먼 거리를 쉽게 오갈 수 있게 되었지만 교통사고라는 악재도 함께 따라왔다. 다양한 게이밍 기어의 등장은 환영하고 싶지만, 최근에는 게이머의 입장에서 살짝 의구심이 드는 게이밍 기어들도 종종 등장하고 있다.

예전에도 게임에서 지원하는 매크로나 단축키를 삽입해서 편의를 돕는 게이밍 기어 제품들이 있었다. 그리고 좀 더 나아가 아예 게임사와 협력해서 디자인은 물론 액션에 사용되는 키만 빛나게 하거나 게임 내의 다양한 기능을 쉽게 쓸 수 있도록 제작된 게임 맞춤 제품들도 있었다.



▲ 블리자드의 공식 라이센스 제품인 Razer D.VA 에디션



▲ 이제는 유물이 된 WoW 리치왕의 분노 한정판 키보드. 스틸시리즈 제품이다.



▲ 구글에서 검색만 해도 온갖 화려한 게이밍기어들을 구경할 수 있다.

그런데 최근 등장하는 게이밍 기어들은 예전의 제품들보다 한 발 더 나아갔다. 디자인의 개선이나 편의성을 주는 단계를 넘어서 아예 게임의 플레이 자체에까지 영향을 줄 수 있는 기능을 넣은 게이밍 기어들도 보인다.

대표적인 예를 들어 조준점이 흔들리는 반동을 보완해 탄착군을 모아주는 마우스가 있다. FPS에서는 총을 연사할 경우 총기가 흔들리거나 반동이 생겨 조준점이 조금씩 변하는데, 이런 종류의 마우스는 자체 보정을 통해 조준점을 덜 흔들리게 잡아준다. 당연히 남들보다 쉽고 편하게 상대방을 쓰러트릴 수 있다.

게임 내의 정보를 바탕으로 적의 위치나 방향을 알려주는 게이밍 기어도 있다. 일부 게임들은 총알에 맞으면 자체적으로 대략적인 방향을 표시해 주지만, 이 기능은 적의 미세한 발걸음이나 효과음 등 게이머가 쉽게 구분하기 어려운 단서들까지 잡아내 방향을 좀 더 뚜렷하게 모니터에 표시해 상황 파악을 돕는다.



▲ 유튜브에서도 논란이 분분한 모 게이밍기어 마우스의 부가 기능

에임핵이나 맵핵처럼 확실한 해킹과 달리 기능상의 한계가 존재하기 때문에 이런 게이밍 기어를 쓴다고 해서 실력이 확 나아지지는 않는다. 다만 영향이 적다고 해도 게임사가 정한 규칙에서 벗어나 본인 실력 이상의 도움을 주는 것도 사실이다. 결국 문제는 이런 게이밍 기어를 쓰지 않거나 모르는 게이머들과의 형평성.

다른 문제도 있다. 이런 류의 게이밍 기어는 게임사에서 구분하기도 어렵다. 외부 프로그램을 통한 보정이라면 다양한 안티 치트 프로그램을 통해 어떻게든 막아내겠지만, 하드웨어 수준의 단계라면 사람의 행동과 구별하기도 힘들다. 심증 이상의 증거를 잡아내 제재하거나 방지할 수단이 마땅치 않다는 뜻이다.

아직까지는 논란 정도에 불과하지만 좀 더 과감하고 다양한 기능을 갖춘 게이밍 기어들은 계속 등장하게 될 것이다. 결국 게이밍 기어의 성능과 부가 기능이 게임의 핵심적인 밸런스까지 영향을 줄 정도가 된다면? 멀지 않은 시기에 게이머들의 불만이 퍼질 것은 불 보듯 뻔한 일이다.

게이밍 기어의 역사라고 해봐야 불과 십여년이다. 게이밍 기어의 기능을 어디까지 허용해야 할지 아직 정답은 없다. 다만 게이밍 기어의 편의가 게임의 재미와 균형을 해치지 않는 범위에 대해, 또 올바른 발전 방향이 어떤 것인지에 대해 한번쯤 진지하게 논의해 보아야할 시점이다.

[▶게이머를 위한 IT미디어 인벤 바로가기]

댓글

새로고침
새로고침

기사 목록

1 2 3 4 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