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수첩] VR 그리고 성인 콘텐츠, 자연스러운 흐름인가? 과도기적 현상인가?

칼럼 | 정재훈 기자 | 댓글: 113개 |
처음 VR HMD를 접했을 때, 나를 비롯한 주변 기자들은 이 새로운 방식의 기기가 게임과 어떤 시너지를 만들어낼 것인가에 대해 이야기했다. 누군가는 다소 부정적인 태도였고, 또 누구는 게임이라는 엔터테인먼트에 새로운 패러다임이 열릴 것이라 말했다. 지금도 똑같다. 같이 커피를 한잔하거나, 담배를 피울 때, 혹은 퇴근 후의 술자리에서도 VR에 대한 이야기는 아직 흔히 쓰이는 떡밥이다. 그리고 마찬가지로 지금도 긍정과 부정의 의견 대립은 끊이지 않고 있다.

하지만 이 길고 긴 갑론을박의 과정에서, 우리는 몇 안 되는 공통적 결론을 내놓았다. 일단 VR HMD에 있어 메인은 '영상'이 될 것이며, 게임은 어디까지나 하나의 부분에 지나지 않으리라는 것. 그리고 영상 중에서도 가장 강력한 파급력을 가진 소재가 바로 '성인물'이라는 점이었다.



▲ 별거 없겠지 하면서도 살짝 설레고 뭐 그런

사실 성인물에 대해 대놓고 이야기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조금의 선이라도 잘못 넘는 순간 법적인 영역으로 들어가게 되고, 사회적 입지가 흔들린다. 물론 가벼운 자리에서는 부담 없이 이야기하곤 한다. 주변에 다른 여직원이 없는지 확인한 다음에 말이다. 하지만 이 주제를 기사로, 그리고 공적인 글로 끌고 오는 순간, 금기와 허용 사이의 위험한 줄타기가 시작된다. 어쩔 수 있나. 균형을 잘 잡을 수밖에.

그래서 게임 관련 기사를 수없이 작성하면서도, 직접적으로 성인물에 대해 언급한 경우는 없었다. 물론 뇌리를 스쳐 지나가는 성인향 게임들의 수는 수없이 많다. 모바일 시대가 본격적으로 열린 후, 아슬아슬한 선을 유지하며 유저들에게 어필하는 성인향 게임들을 본 것이 한두 번이 아니다. 그중 몇 작품은 선을 넘어 버려 철퇴를 맞는 것도 보았다.

하지만 VR 시대가 시작되려는 지금, 그 어느 때보다 '성인물'에 대한 직접적 이야기를 많이 듣는다. 인간이 만들어내는 영상물 중에서 가장 강력한 자극을 주지만, 그 때문에 금기의 영역에 걸쳐 있는 '성인물'. VR이라는 새로운 미디어에 '성인물'은 더는 존재하되 말할 수 없는 그런 것이 아니다. 오히려 당당히 VR의 초반 흐름을 주도할 소재 중 하나로 여겨지고 있다.

일산 킨텍스에서 열린 VR 서밋. 3일간 이어지는 작은 행사였지만, 현재 국내 업계가 바라보는 VR의 현주소를 바라보기엔 더없이 좋은 기회였다. 그리고 그곳에서, 기자는 아주 당당하게 만들어진 VR 성인물 시연 공간을 보았다.



▲ 줄이 참 길었다

당혹과 놀라움. 대문짝만 하게 걸린 'VR Adult Content'를 본 순간 든 감정이었다. VR과 성인물이 잘 어울린다는 것은 익히 알고 있으며, 실제로 잘 어울린다. 낯뜨거운 이야기지만, 성인물은 몰입할수록 더 큰 자극을 주며, VR의 최대 장점은 현실과 별다를 바 없는 '몰입감'이다. 찰떡궁합이라 할 수밖에. 하지만 지금까지 성인물은 그 어디서도 전면에 나서지 못했다. 개방된 사회 풍조를 가진 국가에서 성인물을 공개적으로 다룬다는 내용이 해외 토픽의 한 가닥에 실리기는 하지만, 적어도 대한민국에서는 어불성설이다.

생각을 돌려 '게임'을 보았다. 게임 또한 성인물과 궁합이 잘 맞는다. 이론적으로 생각해 보아도 상호작용 없이 단순히 정해진 영상을 보는, 우리가 쉽게 말하는 '야동'에 비해 상호작용이 가능한 게임의 몰입도가 더 크다. 하지만 일본을 비롯한 몇몇 국가를 제외하고, 그 어디서도 성인 게임은 전면에 드러나지 못한다. 에로스와 드라마의 중간쯤에 있는 작품들이야 드물게 보이지만, 이를 넘어서 포르노에 가까운 콘텐츠들은 철저히 대중의 시선에서 배제되기 마련이다.

하지만 어째서 VR은 가능할까. VR 서밋에서 직접 경험해본 성인물의 수위는 에로스와 드라마보다는 포르노에 가까웠다. 얼마 전 E3 2016 취재차 LA를 다녀온 동료 기자 또한 E3 현장에서 굉장히 노골적인 VR 성인물을 보았다고 말했다. 이렇듯 은유적이고 어느 정도는 베일에 싸인 콘텐츠들로 구성되던 엔터테인먼트와 성인물의 결합이 VR 시대의 개막에 맞춰 노골적으로 열려가는 이유가 무엇일까. 머릿속에 드는 의문은 기자 개인의 도덕적 잣대에서 나온 것이 아니었다. 그저 순수하게 궁금했다.



▲ '캐서린'의 한 장면, 게임에서도 노골적이지 않은 성적 소재는 곧잘 쓰였다.

다른 기자들, 그리고 관계자들과 이야기를 나누며 생각을 정리했다. VR 성인물이 공개적으로 등장하는 이유가 불편한 시선을 조금 감내하더라도 VR의 보급률을 보다 자극적인 방법으로 높이기 위해 자연스럽게 등장한 고육지책인지, 아니면 전체적인 엔터테인먼트의 흐름이 '성'이라는 다소 경직된 사고로 바라볼 수밖에 없던 소재를 수용하는 방향으로 나아가는지 말이다.

'VR 성인물'이 그저 짧게 스쳐 가는 흐름의 하나일 거라는 의견은 적지 않았다. 앞서 말했듯, VR의 초도 보급은 굉장히 중요한 부분이고, 게임처럼 성인물에 대한 관습적인 자세가 규정되지 않았다. 게임의 경우 어느 정도 수준까지는 허용이 가능하나, 선을 넘으면 '이건 너무 심한데?'라고 생각할 수 있는 장벽이 존재한다. 나라별로 허용 가능한 명확한 법적 잣대가 존재하기도 하지만, 게임을 즐기는 이들 사이에서 말없이도 통용되는 일종의 관습이다. 지금에야 성인물들이 공개적인 장소에 버젓이 등장하지만, 시간이 지나 VR이 충분히 인류의 삶에 끼어들어 연착륙할 경우, 게임이나 영화가 그러하듯 이런 자극적인 소재들은 다시 음지로 돌아가게 될 수도 있다.



▲ 성인 지향 콘텐츠가 상당히 많았다.

반면 달리 생각할 수도 있다. '게임'과 성인물의 이야기를 하면서 성적 소재를 주로 한 성인용 게임이 메인 스트림에 등장한 적이 없다고 말했지만, 공개되지 않은 영역에서 이런 게임들은 수도 없이 많다. 워낙 특이한 케이스이긴 하지만 일본은 아예 전문적으로 이런 게임을 개발하는 스튜디오들도 적지 않게 존재한다. 이름 한 번쯤은 들어봤음 직한 '일루전'과 같은 곳 말이다.

종교적, 혹은 사회 관습적인 이유로 노골적 성적 표현이 금기시된 이후, 인류의 역사는 항상 성에 대해 개방적인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다. 과거였다면 신성 모독으로 여겨졌을 퀴어 축제가 열리고 있고, 노골적인 포르노를 TV로 방영하는 나라도 존재한다. 수없이 많은 장벽과 관습이 이를 막아서고 있지만, 성에 대한 인류의 시선이 개방적으로 변해간다는 건 부정할 수 없는 현실이다. VR의 대두와 함께 떠오르는 성인물들 역시 이와 같은 흐름의 단면이라 보아도 될 수 있지 않을까. 더 개방적으로 변화할 엔터테인먼트와 성의 개념에서 말이다.

기자도 정답을 내릴 순 없다.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건, 인류가 VR에 친숙해져 가는 과정에서 성인물이 빠지지 않을 것이라는 점. 그리고 엔터테인먼트라는 분야에서 '성'이라는 다소 천박해 보이면서도 원초적인 개념에 대한 사회적 탄압이 점점 줄어든다는 것뿐이다. 이쯤에서 이 글을 읽는 분들에게도 똑같은 질문을 해보고 싶다. VR과 성인물, 과연 엔터테인먼트의 발전 과정에서 일어난 자연스러운 해프닝일까? 아니면 새로운 미디어의 도입이라는 시대적 환경이 빚어낸 과도기적 현상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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