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VR로 시작되는 '경험혁명'을 준비하라

칼럼 | 이명규 기자 | 댓글: 28개 |



이제는 고전이 된 20세기 후반의 SF 영화 '토탈 리콜'에서는 돈을 받고 기억을 심어주는 회사가 등장합니다. 주인공 아놀드 슈워제네거는 화성 출신의 킬러로서 정의를 위해 대활약하는 기억을 구입하게 되죠. 그리고 전성기의 아놀드 슈워제네거는 자신을 노리는 적을 제거하고, 화성으로 날아가 정의를 이룩합니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여러 가지 복선과 반전이 깔리게 되고, 영화의 끝에 다다라서는 지금까지 사건들이 정말로 단지 주입받은 기억인지, 아니면 실제로 벌어지고 있는 일인지 알 수 없게 됩니다.

당시의 기술적 한계나 개념에 갇혀있는 몇 가지 영화적 요소들을 제외하고, 이 사고파는 '가상의 기억'은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무엇과 매우 흡사합니다. 네, 바로 게임이죠. 우리는 게임 속에서 또 다른 누군가가 되고, 현실에서 겪을 수 없는 흥미로운 경험을 하기 위해서 돈을 지불합니다. 뇌에 직접 기억을 주입하는 등 실제로 와 닿는 체감의 정도나, 현실감 같은 여러 가지 기술적 한계를 제외하고 나면 그 개념은 거의 똑같죠.

지난 GDC 2016은 전 세계에서 가장 '증강 현실(Augmented Reality, 이하 AR)'이나 '가상 현실(Virtual Reality, 이하 VR)'에 대해서 활발한 이야기와 경험이 오간 행사였을 것입니다. 그렇게 새로운 개념을 맞이하는 사람들의 반응은 모두 제각각이었고, 생각하는 것도 저마다 달랐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 AR, VR이라는 새로운 개념의 가능성의 끝, 그러니까 최종적인 발전 형태를 고민해보게 됐습니다.




동시에 GDC 2016에서 만난 한 게임 개발자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게임은 언제나 현실과의 벽을 허물어나가는 방향으로 발전해왔다." 고요. 맞는 말입니다. 우리는 항상 더 현실적인 게임을 만들고 즐기기 위해 부단히도 노력해왔습니다. 더욱 사실적인 그래픽과 시각 효과를 만들고, 현실에서 벌어지는 현상과 흡사할 만큼 복잡한 시스템을 설계하고, 현실에서 할 수 있는 것들을 하나하나 기획해서 구현하고, 보다 체감성 높은 전달을 위해 온갖 하드웨어를 만들어왔죠.

이뿐 만이 아니었습니다. GDC 2016의 메인이벤트인 'GDC 30년 돌아보기'에 등장한, '재미 이론'으로 유명한 라프 코스터도 한마디 거들었죠. "세상을 MMO 월드에 대입하면, SNS와 같은 것들이 이미 길드나 월드 채팅 같은 소셜 시스템을 따라 하고 있다."는 이야기였습니다. 여기까지 이 하나의 큰 고민과 두 가지 메시지로 저는 한가지 질문을 도출해내게 됐습니다. 어쩌면 우리가 만들고 플레이하는 게임 그 자체에 대한 질문이기도 하죠.

그래서, 시작하는 명제는 그겁니다. "마침내 게임과 현실의 경험을 구분할 수 없게 된다면, 그건 과연 '게임'일까?"





직접 경험이 인식(認識)을 지배하던 시대는 끝났다



요즘 세대는 살면서 '겪어보지 않아서 모른다'는 말을 참 많이 듣습니다. 공부하고 배우고 연구해도, 직접 겪어봤다는 이들은 실제로 경험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그런 지식과 경험을 무시해버리죠. 그런데 현대 사회에서, 정말 직접 경험과 간접 경험이 그렇게까지 막대한 차이가 있을까요?

예술에 관심이 조금이라도 있으시다면, '리얼리즘'이라는 용어를 들어본 적이 있으실 겁니다. 특히 문학에서, 리얼리즘은 현실을 있는 그대로 묘사하는 것에 치중해왔습니다. 그 어떤 비현실적 묘사나 소재도 용납되지 않았고, 현실에 있었던 중요한 사건, 경험을 재현하는 것으로서 작품을 다뤄왔죠. 근현대 시기, 2번의 세계대전을 비롯해 현실은 어마어마한 사건들의 연속이었고, 전쟁 같은 역사적 사건들을 토대로 한 작품들이 쏟아졌습니다.




이 시기 리얼리즘 작품들은 당연하게도 당대의 모든 실존 사건들, 그리고 직접 그 사건 속에 있었던 작가의 '경험'을 토대로 쓰였습니다. 결국 리얼리즘 문학이란 어떤 '경험'을 하는가에 따라 작품이 결정되는 분야였습니다. 하지만 시대가 흘러 그러한 전지구적, 역사적 사건들은 일어나지 않거나 개인이 직접 경험하기엔 불가능한 것들이 되었고, 현대에 이르러 이러한 '리얼리즘'은 쇠퇴하고 있죠. 이제는 아예 개인의 경험에서 탈피한, 모두가 알고 있는 공공의 지식을 조립한 것 같은 소설들도 등장하고 있습니다.

이렇듯 현대에 들어서, 사람이 태어나 교육을 받고 어른이 되어 세상에 부딪혀보고 살아가면서 얻는 경험들은 '간접 경험'이 압도적으로 많습니다. 우리는 책에 적힌 사실을 토대로 세상을 배우고, 다큐멘터리와 미디어를 통해 세상의 사건을 접하며, 비디오를 통해 해외여행을 합니다. 이는 단지 단순한 체험에서 그치는 게 아니어서, '유로 트럭 시뮬레이터'라는 게임을 통해 운전법을 배운 뒤 중장비 운전면허를 취득한 게이머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이러한 간접적인 경험의 전달도 결국은 누군가의 직접적인 경험에 의존하며, '직접 경험'이 '간접 경험'보다 우월하다는 인식은 막강합니다. 그들의 논리는 단순하고 확실합니다. 직접적으로 겪는 경험은, 전달되는 정보의 양이나 그 전달력에 있어서 다른 어떤 유사 체험보다도 우위에 있다는 거지요. 불만스럽긴 하지만, 현재로서는 딱히 부정하기 어려운 것이 사실입니다.




하지만 만약 그 논리 하나를 뒤집어본다면 어떨까요? 간접적인 경험을 위한 전달 수단들은 항상 발전해왔습니다. 먼 옛날 한때는 오직 활자로 된 기록을 통해서 배우는 게 전부였던 간접 경험들이, 영상, 소리, 보다 체계적인 수단을 통해 우리에게 전해지고 있습니다. 그 때문에, 직접 경험의 우월성을 강조하는 이들을 보면 그런 의문이 들 수밖에 없는 겁니다. '과연 간접 경험이 직접 경험과 비교해 구분할 수 없을 만큼 발전할 수 있다면, 과연 그들이 내세우는 '직접 경험'의 절대성은 휴지조각이 아닌가?'





AR과 VR이 허물기 시작한 현실과 가상의 경계



그렇다면 다음은 이런 가정을 해봅시다. '만약 게임이 극한까지 발전해서 게임을 통한 체험이 실제 체험과 차이가 없게 된다면?' 하고 말이죠.

VR은 그 시작부터 게임과 현실의 격차를 줄이기 위해서 만들어진 기술이자 개념입니다. 오직 평면의 디스플레이로 정보를 전달하고, 키보드나 마우스, 조이패드 등으로 조작하는 현재의 게임은 현실과는 굉장히 많이, 생각보다 더 많이 동떨어져 있습니다. 우리는 게임을 하면서 수시로 이 게임이 현실과 동떨어진 물건이라는 걸 깨닫곤 합니다.

그러나 VR은 그 전달력과 조작 가능 범위 양면에서 지금의 게임보다 더 현실에 가깝습니다. 헤드 트래킹 기능과 3D 렌더링 기술의 접합으로 드디어 '3차원 공간'을 디스플레이로써 사용할 수 있게 했고, 조작 역시 손가락으로 누르는 버튼을 넘어서서 '동작' 자체가 조작법이 될 수 있게 만들었습니다.




물론 이 VR이 게임 발전의 최종 형태는 아닙니다. 게임 전체의 역사를 가정한다면, 이는 역사상의 몇 가지 큰 전환점 중 하나가 될 겁니다. 생각해보십시오. 지금까지 게임은 언제나 이런 식으로 발전해 왔습니다. 오직 1개의 버튼에서 시작한 조작부는 이제 수없이 많은 레버와 버튼, 동작의 집합체가 되었고 전달력 역시 흑백 브라운관에 찍힌 하얀 점 하나에서 출발해 속에 들어가 보는 3D 렌더링 공간으로 변했습니다.

저는 여기서 두 가지 사실을 확실히 장담할 수 있습니다. 바로 VR이 그 과정에서 몇 가지 진통이 있더라도 종래에는 성공하리라는 것과, 결국 게임은 현실과 구분할 수 없도록 발전하리라는 것입니다. 수많은 이들이 VR이 실패할 수 없다고 말하는 이유는 간단합니다. 이 기계는 '게임'의 본질적인 발전 방향과 합치되는 물건이기 때문입니다. 보다 현실과 가까운 시스템을 만들고 오감을 자극하는 것 말이죠.

이제 이 모든 것을 한데 모아봅시다. 직접, 간접 경험의 차이는 어떻게 생겨나는 것일까요? 아주 간단히 말하자면 그것이 실제로 와 닿는 체감의 정도가 다르다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매체의 한계에 따라 전달할 수 있는 정보의 양이 다르고, 얼마나 사실적으로 전달할 수 있는지도 차이가 납니다. 그런데 이 말은 곧, '경험'을 전달하는 매체의 한계만 극복한다면, 직접 겪는 것과 '경험' 그 자체의 차이는 없다는 말이 됩니다.

그렇다면 가정을 약간 바꿔봅시다. 방금 전의 가정과 비슷하지만 좀 더 구체적입니다. '만약 현실과 똑같은 오감의 반응과 상호작용이 가능한, 제약이 없는 가상현실을 통해 사건을 체험했고 이것이 가상현실이라는 것을 모르는 상태라면, 과연 그건 직접 겪은 경험일까, 아니면 간접적으로 전달된 경험일까?' 과연, 당신은 답을 내릴 수 있나요?





"진짜와 구분할 수 없는 가짜는 이미 진짜다."



위의 질문에 아주 쉽게 답을 내릴 수 있다면, 그건 속단하기 좋아하는 사람, 혹은 미래를 예측할 수 있는 천재 둘 중 하나일 것입니다. 이것은 매우 먼 미래의, 굉장히 큰 가능성까지 가정해 본 질문이기 때문입니다.

위의 질문은 게임이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바를 담고 있습니다. 현실의 직접 경험과 구분할 수 없는 가상의 간접 경험, 이것은 앞서 영화 '토탈 리콜'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나온 것이기도 합니다. 간접 경험으로서의 게임은, 오히려 직접 경험을 압도해버릴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실제로 인간의 한계 때문에 절대 경험할 수 없는 갖가지 과학적 현상들, 이를테면 블랙홀이나 매우 미세한 세포 현상 같은 것은, 이런 간접 경험을 통해 보다 효과적으로 전달될 수 있습니다.




결론은 그렇습니다. 그렇게 극한까지 발달한 게임이 존재하는 이상, 경험에 있어서 직접과 간접의 구분은 불가능하며 또 필요하지도 않다는 것이죠. 진짜와 구분할 수 없는 가짜는 진짜가 되며, 게임은 그저 경험의 다른 말이 될 겁니다. 그 시기에 다다르게 되면 우리는 제한이 없는 경험을 할 수 있을 것이며, 게임을 통한 체험은 모든 종류의 경험보다 사실적이고 효과적일 것입니다.

지금까지, '직접 경험'은 인간이 무엇인가를 배우고 습득하고 알아가는데 최고의 방법으로 군림해왔습니다. 시행착오를 통해 하나하나 조금씩 알아가는 것이 배움의 왕도였죠. 하지만 이런 연역적인 습득 방식은 끔찍하게 비효율적이었습니다. 아주 간단하게, 도제 방식으로 한 명 한 명 키워내는 전통적인 장인들의 대물림과, 현대적인 구조 하에서 빠르게 일정 수준에 도달하는 교육체계를 비교해보면 간단히 알 수 있습니다.

이는 AR, VR이 교육 분야 등에 굉장히 높은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고 평가받는 것도 이런 이유입니다. 이들은 우리가 그동안 간접 경험이라고 여겨왔던 것들을 정말 놀랍도록 효과적으로 전달할 수 있습니다. 오히려 직접적인 경험들을 압도할 수 있을 만큼 효과적으로요.

결국 수십, 수백 년 후의 미래를 가정하고 장기적으로 보았을 때, 게임 혹은 게임의 방식을 빌린 것들 모두, 우리가 물리적인 한계를 벗어나 더욱 빠르고 더욱 높은 수준의 발전을 이룩할 수 있도록 하는 궁극의 도구가 될 것입니다. 경험을 위해 드는 필요 이상의 비용들은 모두 절감될 것이며, 지식은 놀랍도록 빠르고 효과적으로 전달될 것입니다. 현실과 가상 현실의 경계는 모호해지고, 한 사람의 '기억' 속에서 똑같은 것으로 합쳐집니다. 결국 우리가 현실을 모방해 만들어 낸 가상 현실이, 현실 그 자체가 되는 겁니다.

그리고 확실한 것은, VR이 그 발전의 도화선이며, 그럼에도 우리는 기술적으로도 윤리적으로도 준비가 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이런 게임의 궁극적인 발전은 몇 년이 걸릴지도 모르고, 다양한 과학적 난제들처럼 현재로서는 이론적인 이야기일 뿐이지만, 저는 이것이 예정된 수순이라고 확신합니다. 하드웨어 만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때문에 우리는 새로운 차원의 잣대를 준비 할 필요가 있습니다.




좀 거창한 이야기지만, 인류가 그동안 발전해오며 겪은 '농업혁명', '산업혁명'이나 '정보혁명' 같은 다양한 혁명적 사건들이 '진화'의 과정이라고 한다면, 현실을 닮아가는 게임은 다음 진화 단계를 위한 열쇠입니다. 산업화를 통해 우리는 막대한 에너지와 생산력을 얻었고, 정보화를 통해 비할 수 없이 빠르고 정확한 정보처리 능력과 막대한 양의 새로운 지식들을 습득했습니다. 미래의 게임은 그다음 단계의 혁명을 통해, 모든 지식과 정보가 개인의 경험이자 기억이 될 수 있도록 해줄 겁니다. '경험혁명'은, 얼마나 멀리 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언젠간 벌어질 일입니다.

그리고 이 낙관적인 결론까지 도달하기 위해, 우리는 그 과정상 도처에 깔린 윤리적, 기술적, 사회적 문제들을 하나씩 풀어나가야 합니다. 컴퓨터가 만들어질 때에도, 우주를 개척할 때에도, 생명 복제를 이루어낼 때도 수많은 난관을 풀어나갔고, 계속 발전하는 한 이는 현재 진행형입니다. 그리고 이번엔 우리 차례입니다. G맨이 말했듯, 대비하십시오. 예측할 수 없는 결과에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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