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도 넘은 비난, 멍들고 있는 선수들

칼럼 | 김홍제 기자 | 댓글: 209개 |
얼마 전 평소 알고 지내던 A선수가 유난히 의기소침해 있었다. 대인관계도 원만하고 항상 긍정적이며 밝았던 선수다. 왜 그런지 이유를 묻자, 충격적인 답변이 돌아왔다. 최근 조작 의심, 욕설 등의 온갖 비난을 퍼붓는 SNS 쪽지로 인해 프로게이머 생활에 회의감을 느낀다는 것이다.

더 알아보니 이런 메시지를 받고 있는 선수가 한 두 명이 아니었다. 현재 활동하는 프로게이머들 중 적지 않은 숫자가 이와 같은 쪽지를 받아본 경험이 있다고 한다. 비교적 어린 나이에 프로의 무대에서 활동하는 선수들에겐 큰 상처가 될 수 밖에 없는 일이다. 과연 이런 쪽지를 보내는 사람들은 누구이며, 무슨 이유에서 이런 행동을 하는 것일까?







▲ 실제로 선수들이 받았던 메시지 중 수위가 가장 약했던 내용이다.


기자는 짧게나마 프로게이머 생활을 했다. 프로게이머들이 승리를 위해 얼마나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는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많은 아마추어들이 프로가 되기 위해 수많은 시간을 들여 노력하고, 경쟁 속에서 살아남은 소수가 프로게이머가 된다. 그리고 프로게이머가 되면 지금까지 했던 노력의 두 배, 세 배 이상을 해야 경쟁 속에서 살아남을 수 있다.

프로게이머들은 한 번의 방송 경기 출전 기회를 얻기 위해 많은 것을 포기한다. 간절하기 때문이다. 한 번의 승리를 위해 상상 이상의 노력이 필요하다. 만약 어렵게 잡은 방송 경기 기회에서 의도치 않은 실수로 경기를 패배한다면 가장 상심이 큰 사람은 누구일까? 팬도 아니고 지인, 가족도 아니다. 바로 선수 본인이다.

자신이 꿈꾸던 무대에서 패배한 선수에게 말도 안 되는 비난을 일삼는 팬들이 많아지고 있다. 아무리 멘탈(정신력)이 좋은 선수라도 상처를 받는다. 최근처럼 비난의 강도가 점차 강해지고, 전달 방법이 직접적인 경우에는 프로게이머 생활에 회의감을 느끼는 선수들도 있다고 한다.

한 선수는 "팬들과 소통하기 위해 시작한 SNS가 오히려 선수들을 힘들게 하고 있는 상황이다. 마음이 약한 선수들은 이런 메시지를 받으면 정말 큰 상처를 받고, 은퇴까지 고려하게 된다. 멘탈이 좋은 선수들마저도 프로게이머 생활에 대한 회의감을 느끼게 되며 의욕을 상실하기까지 한다."고 전했다.

이전에도 댓글이나 커뮤니티 게시판 등에서 선수들을 비난하는 경우는 많았다. 하지만 선수의 SNS 계정에 들어온 메시지는 커뮤니티를 보지 않는다고 해서 피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악성 메시지를 피하기 위해 SNS를 통한 팬들과 소통을 하지 말라고 할 수도 없다.

실제로 이런 메시지를 받은 적이 있는 A선수는 "패배한 선수에게 조작이라는 비난은 프로게이머 자존심에 가장 큰 상처를 입히는 일이다. 선수들은 경기를 한 번 나갈 때마다 정말 많은 노력을 한다. 하지만 한 명은 이기고 한 명은 패배하게 되어 있다. 프로게이머도 사람이다. 합당한 비판은 수용할 수 있지만 도를 지나친 비난은 자제해주셨으면 한다"고 말했다.

지고 싶어하는 선수는 없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 한 때는 금기어였던 '조작', 요즘은 너무 가벼워졌다.






기억조차 하기 싫은 '승부조작' 사태 이후 '조작'이라는 단어의 무게감이 가벼워졌다. 기대 이하의 경기력이 나왔을 때, 예측과 다른 결과가 나왔을 때 조작이라는 단어를 언급하며 선수를 비난하는 목소리가 어김없이 흘러나온다. 지난 2010년 승부조작 사태가 남긴 상처 중 하나다.

조작이라는 말이 쉽게 사용되면서 일부 악성 팬들의 비난 수위도 강해졌다. 최근 이들의 행태는 놀랍다. SNS 메시지를 통해 선수에게 직접 차마 입에 담기 힘든 욕설과 조작이라는 말을 서슴없이 보낸다. 그리고 수위는 갈수록 자극적이고 강해지고 있다.

선수들의 열정에 박수를 보내고, 패자에겐 격려와 응원을 보내는 게 당연했던 시절이 있었다. 그 때와 비교했을 때 요즘 일부 팬들은 지나치게 거칠다. 많은 프로게이머들의 노력을 통해 'e스포츠'가 청소년들의 문화로 자리 잡았고, '프로게이머'는 청소년들의 '꿈'이 되었지만, 최근 그 '꿈'이 멍들고 있다.

■ 멍 들고 있는 선수들, 적극적 대처의 필요성도 있다.




▲ 지기 위해 노력하는 선수는 없다.


선수의 SNS에 직접 악성 메시지를 보내는 이유는 무엇일까? 단순히 패배가 안타까워서? 아니면 안티 팬이라서? 그렇다고 보기에는 수위가 너무 강하고, 방법 또한 직접적이다.

전문가 및 관계자들은 이들 중 대다수가 불법 사설 베팅을 하고 자신이 베팅했던 선수가 졌을 때 분노를 표출하는 경우가 많다고 입을 모은다. 얼마 전 SK텔레콤 T1의 리그오브레전드 팀도 때아닌 조작 논란으로 곤욕을 치렀다. 한국 e스포츠 협회가 직접 나서서 조작이 아니라는 증거를 발표했지만, 이미 선수들은 마음은 만신창이가 되어 있었다.

선동은 한 문장으로도 가능하지만, 그것을 반박하려면 수십장의 문서와 증거가 필요하다. 그리고 그것을 반박하려고 할 때 사람들은 이미 선동되어 있다. - 파울 요제프 괴벨스 -

최근 선수를 조작범으로 몰아가려는 악성 팬들의 움직임이 가끔 관측되고 있다. 어떤 의도를 가졌는지는 모르겠지만 조금이라도 의심스럽거나, 스스로 결과를 받아들이지 못할 경우 조작이라는 말로 커뮤니티를 뒤흔든다.

e스포츠는 불법 베팅 사이트의 표적 중 하나다. 그리고 불법 베팅 사이트를 사용하는 사람들이 많다. 최근에는 중고등학생, 대학생들도 용돈 벌이로 불법 베팅 사이트를 통해 돈을 걸고 있다고 한다. 물론, 불법 베팅 사이트는 서버를 해외에 두고, 상황에 따라 사이트를 폐쇄하는 등 근절이 쉽지 않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가만히 놔둘 수는 없다.

불법 베팅 사이트의 악영향은 '승부 조작의 가능성'에 그치지 않는다. 이를 사용하는 팬들은 점점 더 거칠어지고 있고, 이들은 e스포츠 관련 커뮤니티에서 '베팅러'로 불린다. 그리고 베팅러들은 커뮤니티를 돌아다니며 분위기를 해치고, 조작 드립을 날린다.

프로게이머들을 승부 조작 제의로부터 보호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다. 한국e스포츠협회는 꾸준한 소양 교육과 사설 베팅 사이트 모니터링을 통해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하지만 최근 '베팅러'들의 분위기 선동과 '조작 드립'은 또 다른 형태의 문제다.

협회 뿐 아니라 매체, 커뮤니티, 프로게임단, 방송국 등 e스포츠 업계는 이를 통해 피해를 받는 프로게이머들을 지켜야 할 의무가 있다. 매체, 커뮤니티, 방송국들 유저들이나 시청자들을 대상으로 캠페인을 펼칠 수도 있고, 프로게임단은 피해를 입는 선수들을 보호하기 위해 적극적인 대처, 법적인 움직임까지도 고려할 수 있어야 한다.

건전한 e스포츠 문화, 함께 만들어갑시다

* 일러스트 - 석준규 기자 (lasso@inven.co.kr)

댓글

새로고침
새로고침

기사 목록

1 2 3 4 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