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폭력적인 게임일수록 전자파가 높아 위험하다? 도넘은 게임업계 때리기

칼럼 | 장인성 기자 | 댓글: 52개 |
아침에 출근하면서 여러 분야의 뉴스를 확인하지만 역시 최우선으로 손길이 가는 곳은 게임, 그리고 IT업계 소식이다. 변함없이 평온한 하루가 되길 항상 바라지만, 오늘은 '게임업계 때리기'처럼 보이는 뉴스가 유독 눈에 띄었다. 언론들을 통해 보도된 '폭력성 게임일수록 컴퓨터의 전자파 방출을 늘려 유해성이 높다'는 충북도립대학 조동욱 교수의 연구 결과가 그것이다.


살인사건과 학교 폭력의 원인이 게임이라는 등 워낙 게임업계의 평온(?)을 깨트리는 뉴스가 많긴 하지만, 만약 일말의 의혹일지언정 게임 업계에서 책임을 져야 한다면 솔직하게 인정하고 방안을 논의하는 것이 올바른 자세일 것이다. 그래서 보통 이런 뉴스를 보게되면 화를 내기에 앞서 진짜 합당한 내용인지를 먼저 살펴보게 된다.


그런데 '폭력성 게임일수록 컴퓨터의 전자파 방출을 늘려 유해성이 높다'는 이번 연구는, 솔직하게 말하자면 반박을 해야 한다는 생각조차 찝찝하게 느껴질 정도로 어이가 없었다. 하드웨어의 영향으로 발생하는 전자파의 원인을 소프트웨어의 한 종류에 불과한 게임, 그리고 폭력성까지 연결하는 과감함에 할 말을 잃었다고 표현해야 할까.


☞ [SBS] '폭력성 게임일수록 컴퓨터 전자파 상승' 보도
☞ [네이버] 연합뉴스 '폭력성 게임일수록 컴퓨터 전자파 상승' 보도







[ 폭력게임의 대명사로 불리는 GTA는 전자파도 많이 방출할까? ]



폭력성 게임일수록 컴퓨터의 전자파 방출을 늘려 유해성이 높다는 충북도립대학 생체신호분석연구실 조동욱 교수의 연구 발표를 보면, 일단 조사 자체로는 문제가 없는 것처럼 보인다.

그는 대기상태에서 36도였던 컴퓨터 그래픽카드의 온도가 레이싱 게임을 즐기자 45도, 스포츠 게임은 51도, 그리고 폭력성 게임은 57도까지 상승했다는 조사를 바탕으로, 그래픽 카드의 온도가 높을수록 컴퓨터에서 방출되는 전자파가 증가하니 폭력적인 게임일수록 위험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러나 이 연구를 잠깐만 살펴보면 상식적으로도 말이 안되는 오류가 숨어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가장 큰 문제점은 그래픽 카드의 온도가 상승하는 이유를 전자파의 방출과 전혀 무관한 게임의 장르, 즉 소프트웨어의 내용에 해당하는 콘텐츠와 연결시켰다는 것이다.


위의 연구 결과 대로라면, 그래픽 카드의 성능을 최대로 사용하는 내셔널 지오그래픽의 HD 다큐멘터리 영상은 폭력적인 컴퓨터 게임보다 해로우니 시청하지 말아야 한다. 그리고 캐드(CAD)나 3D 그래픽 분야, 벤치마킹 업계에 종사해 그래픽 카드의 온도가 80도를 상시로 넘나드는 분들은 폭력적인 게임을 즐기는 것보다 훨씬 해로운 업무 환경에 노출되어 있는 것이다.


연구 논문의 내용을 직접 확인하지 못했지만, 언론의 보도에는 전자파에 직접적인 영향을 끼치는 컴퓨터 및 그래픽 카드의 사양에 대한 언급이 빠져있는 것으로 보아 연구 실험의 정당성을 뒷받침하는 가장 기초적인 부분인 요인 통제의 측면에서도 중대한 문제가 있을 가능성이 크다.


'맨 헌트'는 왠만한 공포 영화나 슬래셔 무비 못지않은 잔혹한 세계관과 살인이나 고문 등이 직설적으로 표현된 콘텐츠 때문에 제대로 출시된 국가조차 많지 않지만, 9년전에 출시된 게임이기 때문에 최신 사양의 컴퓨터로 실행하면 그래픽 카드의 온도는 크게 변화하지 않는다.

그러나 맨 헌트에 비하면 폭력적인 콘텐츠가 전혀 없다고 봐도 무방한 '메이플스토리'나 '마법천자문' 같은 최신 게임들은 '맨 헌트'보다 그래픽 카드를 훨씬 많이 사용하고 있다. 당연히 전자파도 많이 방출하니, 똑같은 논리대로 게임의 사양이 높으면 폭력성이 커진다는 말도 안되는 결론을 내릴 수도 있다는 뜻이다.






[ 게임은 장르와 무관하게 사양에 따라 그래픽 카드의 사용량이 달라진다. ]



만약 이 글을 작성중인 기자에게 문의해준다면, 똑같은 장르의 게임들로 다양한 그래픽 카드의 온도가 나열되는 정반대의 실험 방법을 알려드릴 용의도 있다. 단지 출시된 연도와 요구 사양에 따라 게임만 나열하고 실행하면 된다. 게임에 대해 약간이라도 알고 있다면, 인과 관계의 오류에 해당하는 이런 연구 결과를 받아들일 수 있을까.


그래픽 카드의 사용량과 게임의 콘텐츠에 해당하는 폭력성은 직접적인 연관이 없다. 당연히 전자파와도 무관하다. 위의 연구 결과는 영화의 내용과 무관하게 동영상 파일의 화질이나 용량을 문제삼아서 30분짜리 포르노 영상보다 2시간짜리 자연 다큐멘터리가 더 선정적이라는 결론을 내린 것과 비슷하다.


게다가 전자파가 몸에 유해하다는 주장 역시 아직 명확하게 결론이 내려진 바 없다. 우리가 흔히 전자파로 부르는 전자기파에 대해 국제 보건 기구(WHO)의 결론은 아직 '관계가 있을 수도 있다'는 의혹 정도에 그치고 있으며, 만약 실제로 해롭다고 해도 컴퓨터가 내뿜는 전자파는 러닝 머신이나 냉장고에 비하면 소량에 불과하다. (러닝 머신이 컴퓨터 모니터에 비해 47배나 높은 전자파를 방출한다는 환경부의 2006년 연구결과도 있다.)






[ 가전제품이 내뿜는 전기장과 자기장에 대한 방송통신위원회의 발표자료 ]



장기적으로 게임을 오래 즐기면서 발생할 수 있는 피해나 지나친 몰입에 대한 우려에는 공감한다. 게임산업은 역사가 짧기 때문에 앞으로 우리가 예상하지못한 문제들이 발생할 가능성도 있고, 이런 부작용과 문제들에 대해서는 업계 전반의 자각과 적극적인 대처가 필요할 것이다.

다만 유사 과학(사이비 과학)에 불과한 '게임뇌 이론'을 시작으로 게임 업계의 반론을 무시한 채 셧다운제가 추진되었던 것처럼, 이런 불합리한 연구가 또 다른 '게임업계 때리기'로 이어질 전조가 아닌지 걱정될 뿐이다.

언론의 첫번째 원칙은 있는 그대로의 사실을 가감없이 전달하는 것이다. 그러나 사실이 아니라 상식 선에서 판단해도 받아들이기가 쉽지않는 연구를 그대로 대중 매체에 전달한다면, 사실을 왜곡없이 전달해야 하는 언론의 책임을 방기한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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