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로코도코의 신호, 프로는 화려하지 않았다

칼럼 | 서동용 기자 | 댓글: 346개 |
'로코도코' 최윤섭이 얼마 전 유튜브를 통해 자신의 심경을 밝혔다. 제목은 'life Sucks(짜증 나는 인생)'. 비속어가 많이 섞여 있긴 하지만, 진솔한 고백이었다. 최윤섭이 속해있는 퀀틱 게이밍은 북미 LCS(한국으로 치자면 롤챔스 정도의 대회)에 참가하지 못했다.

패자의 변명은 아니었다. 다소 자신을 자책하는 느낌이었다. 그때의 플레이를 자책하는 것이 아니라, 마치 '프로게이머'가 된 자신을 후회하는 것 같았다.

최윤섭은 3년 차 LOL 프로게이머다. 스타크래프트 1의 임요환은 은퇴하기까지 14년이 걸렸다. 스타 1 게이머에 비해서 경력이 오래되지 않은 듯 보이지만, LOL은 조금 다르다.

LOL은 한 시즌이 바뀔 때마다 선수들도 바뀐다. 이렇게 선수가 빨리 바뀌고, 새로운 신인이 등장하는 게임은 지금까지 없었다. 빨라도 너무 빠르다. 한 시즌이 아니라 한 게임 만에 은퇴하는 선수도 있다.

최윤섭이 그런 게이머는 아니었다. 오래 했다. 게다가 LOL 역사에 족적을 남길 정도로 잘했다고 해도 충분하며, 한때는 국내 정상의 원거리 딜러라고 평가받을 때도 있었다. 피지컬이 아니라 상대방의 움직임을 예측하는 최윤섭의 플레이에 모두가 매료됐던 때도 있었다. 트리스타나의 앞 로켓 점프는 이제 '로코 점프'라는 말이 더 익숙하다.

그런 일류 게이머였던 그가. 지금은 게임을 계속 해야 하는지, 그만둬야 하는지 고민하고 있다. 단 3년을 했을 뿐인데 말이다.


프로게이머를 그만둬야 할 때는, 패배하고 나서 화나지 않을 때. - 임성춘 감독

프로게이머는 감정적인 직업이다. 무표정한 얼굴로 게임을 하고 있지만, 가슴 속은 누구보다 더 뜨겁다. 그래서 경기에 패배한 프로게이머는 아무도 건드리지 않는다. 감독, 코치는 물론 관계자까지 아무도 웃으며 농담을 걸 수가 없다. 그만큼 프로게이머들은 패배했을 때 불같은 분노를 느낀다.



[ SKT T1 K의 '벵기' 배성웅 ]

중요한 게임에서, 특히나 방송으로 중계되는 게임에서 패배했을 경우의 감정은 과연 어떨까? 얼굴이 빨개지고, 속에서는 온갖 단어가 목구멍까지 올라올 수도 있다. 물론 프로이기에 그런 감정을 다스려야 하겠지만 말이다. 이런 심정은 게임을 즐기는 사람들이라면 누구나가 한 번쯤은 느껴봤던 감정일 것이다.

프로게이머들은 그 특성상 훨씬 더 배가될 것이다. 실력을 자부하는만큼 패배로 고조되는 감정도 더 높을 테니까. 그래서 프로게이머는 잔인한 직업이기도 하다.

과거 프로게이머를 꿈꿨고 한국 대표로 대회에 출전한 적이 있는 기자도, 한때는 프로게이머들이 부러웠다. 그들은 '승리자' 같았다. 많은 관심을 받고, 큰 무대에서 멋진 조명 아래 경기를 펼친다. 자신의 플레이는 하이라이트 영상으로 편집돼 세계 각국의 팬들이 찾아보고 칭찬한다. 자신이 개발한 스킬 트리나, 아이템 빌드는 '~식'(예를 들면 페이커식 미드 리븐)이 돼서 많은 사람이 따라 한다. 나에게 프로게이머는 동경의 대상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다. 경기에서 패배한 선수들이 경기장을 빠져나갈 때의 표정을 보면서, 화려함의 이면에 내재된 잔혹함과 서글픔을 볼 수 있었기에. 그들은 화려하기만 한 스타가 아니었다. 모든 것을 걸고 몇 시간에 승부를 걸어야 하는 '검투사' 같았기 때문이었다.


임요환이 잘 해서 이긴 게 아니고 홍진호가 못해서 진 것이 된 요즘?

패배의 분노에 휩싸여 있을 때, 기름을 붓는 사람도 있다. '프로들을 응원하고, 그들의 플레이에 열광하는' 뜻의 팬은 아니다. 속된 말로 '선수를 까는' 안티팬들이다.

팬이 있으면 안티팬도 있게 마련이고, 또 팬과 안티팬이 병존하는 것은 프로 스포츠라면, 프로 엔터테이너라면 자연스러운 현상이기도 하다. 그 역시 인기의 척도니까. 팬들은 안티팬으로부터 스타를 보호하고 위로하고 방어해준다. 그로 인해 스타는 괴로움을 잊고 다시 연습에 매진하여 화려한 모습으로 귀환할 수 있는 것이다. 어찌보면 팬과 안티팬은 나름의 상호보완적인 관계를 가지고 있기도 하다.

팬과 안티팬. 헌데, 요즘은 그 경계가 불분명해지고 있다. 팬이 됐다가도, 안티팬으로 돌변하는 요즘이다. 얼마나 그 변화가 무쌍한지... 얼마 전 경기에서 1세트에서 CJ 블레이즈가 이겼을 땐 '앰비션' 강찬용의 칭찬 일색이었던 사람이, 2세트에서 패배했을 때 강찬용은 이제 한물갔다며 CJ 블레이즈에서 퇴출해야 한다고 말한다. 불과 30분~1시간만에, 경기 하나의 결과에 따라서 180도 돌변하는 멘트를 확인한 기자에게는 충격이었다. 기자도 이럴진대, 당사자인 그 선수가 받는 충격은 과연 어떠했을까

예전 스타크래프트1 시절은 이와는 조금 달랐던 것으로 기억한다. 홍진호와 임요환이 대결해서 임요환이 이기면 '임요환이 너무 잘한다."가 대부분의 반응이었다. 홍진호의 팬이나, 임요환의 팬들도 패자에게는 심심한 위로를, 승자에게는 축하의 말을 건넸다.

지금은 승자의 칭찬은 찾아보기 힘들다. 패배한 팀의, 가장 눈에 띄게 못 했던 선수에게 비난의 화살이 집중되고, 비난은 생명력을 얻어 자가발전한다. 그 와중에 "졌지만 잘 하셨습니다. 다음에 좋은 모습 보여주세요."라고 글을 올린다면, 비웃음을 당하기도 한다. 임요환이 잘한 게 아니라, 홍진호가 못해서 승부가 갈린 거다.

최근 심각하게 십자포화를 맞은 게이머중에 삼성 갤럭시 오존의 '다데' 배어진이 있다. 삼성 갤럭시 오존이 시즌 3 월드 챔피언십에서 탈락한 이유는 배어진 때문이라고, 당장 팀에서 내보내야 한다는 글 밖에 없었다. 나쁜 경기력을 보여준 건 맞다. 배어진 자신도 인정했다. 하지만 그런 글들을 보고 심기일전을 할 가능성이 높을까, 충격으로 슬럼프에 빠져들 가능성이 높을까.




프로게이머도 사람이다. 자신을 욕하는 말을 듣거나, 글을 보게 되면 상처받지 않을 수 없다. 요즘 말로 너무 '선비'같은 말인가? 하지만 사실이다. 프로들은 생각보다 그런 글을 많이 접한다.

경기에서 패배한 직후 자신을 비난하는 글밖에 없다. 그럴 때 마다 선수들은 씁쓸한 웃음밖에 짓지 않는다. "괜찮냐, 그런 글 신경 쓰지 마라."라고 주위 사람들이 위로의 말을 건네보지만, 그들에겐 별 도움이 되지 않는 것 같다.

상처를 회복하는 능력이 사람마다 다르듯, 자신을 향한 비난에 견디는 능력도 사람마다 다르다. 멘탈갑이 아니라면 프로게이머 하기도 쉽지 않다. 많은 프로게이머들이 자신을 향한 비난에 이기지 못하고 은퇴했다. 그 중에 일류 게이머도 있었고, 뛰어난 소질을 가진 유망주도 있었다. 그 비난이 조금 덜했다면, 그 사람이 단단한 멘탈의 소유자였다면, 지금쯤 어떤 위치에 있을지 궁금하기도 하다.

프로인 이상, 그것을 직업으로 택한 이상, 스폿라이트의 화려함을 받는 대신에 비난을 감수하는 것 역시 프로의 요건이기도 하다. 그런 '까임'을 당하더라도 프로가 보여줄 수 있는 것은 사실 하나밖에 없다. 프로에 걸맞는 경기를 보여주는 것, 그 하나로 모든 비난을 잠재워야 하는 것이 프로의 숙명이다. 그렇기에 그들에게는 정말 가혹한 환경일 수 밖에 없다.

작은 응원 문화가 선수들에겐 큰 도움

하지만 긍정적인 것은 팬들 스스로 이런 문화가 나쁘다는 것을 알고 있고, 좋은 팬 문화를 만들어가고 있다는 것이다.

최근 '치어풀' 문화가 살아나고 있다. 치어풀은 선수들을 응원하는 그림, 또는 사진, 글 같은 것이다. 선수들은 경기장에서 자신의 자리 바로 앞에 치어풀을 설치한다.



[ 리그오브레전드 인벤 '튜러스'님의 치어풀 ]

☞ 롤인벤 치어풀 게시판 바로가기

치어풀은 선수들을 응원할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다. "한 장의 글이나 그림 따위가 선수들에게 얼마나 힘을 주겠어?"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수 있다. 하지만 프로들에게 치어풀은 상상 이상으로 도움이 된다.

최근에 방문한 IM LOL 팀의 연습실. IM 2팀의 미드 라이너 '쿠로' 이서행 선수의 컴퓨터 옆에는 팬들이 선물한 치어풀이 걸려 있었다.

제작하는 데 꽤 많은 시간이 들어가는 치어풀만 선수들을 도와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기본적인 칭찬의 글이나, 응원의 멘트. 패배했을 땐, 격려와 위로가 필요하다. 우리는 이런 기본적인 것들이 선수들에게 얼마나 큰 힘이 되는지 잘 모르고 있다.

이번 시즌 진에어 그린윙스는 프로다운 행동으로 많은 칭찬을 받았다. 같은 조에 속해버린 진에어 형제팀. 양 팀은 서로 제닉스 스톰, CJ 프로스트에 패해 1패를 안고 있는 상황이었다.

양 팀은 형제 내전에서 승리하면 마지막 경기의 결과에 따라 8강 진출에 청신호가 켜질 수도 있었다. 1세트는 스텔스의 승리. 당장 성적이 중요한 LOL 판에서 8강에 진출한 팀과 진출하지 못한 팀의 대우나 평가는 확연히 달라진다. 프로다움은 잠시 접어두고 팰컨스가 스텔스에게 2세트에 '져주기'만 한다면, 스텔스가 8강에 진출하며 구단의 위상을 높일 기회였다.

하지만 이 어린 친구들의 '프로정신'은 그런 생각을 잠시나마 했던 사람을 부끄럽게 할 정도로 뛰어났다. 양 팀은 최고의 경기력을 뽐내며 명경기를 창조했다. 끝까지 승부를 알 수 없는 혈투가 끝나고 양 팀이 받았던 성적은 1무. 진에어 형제팀은 8강에 진출하지 못한 채 탈락했다.


잔인한 세계에서 사는 프로게이머들. 우리까지 잔인해지지 말아야.




겉으로 보이는 프로게이머의 화려함에 비해, 감내해야 하는 고통이 너무 크다. 10대 후반, 20대 초반. 우리 인생에서 너무나 중요한 시절이다. 프로들은 연습실에서 하루 10시간 이상을 연습해야 한다. 가족이나, 친구들을 만날 시간도 적다.

다른 친구들이 군대에 가거나, 취직했다는 소식을 들어야 한다. 프로들은 언제 빛을 볼지 모르는 불안함 속에서, 조금이라도 연습에 소홀했다간 바로 뒤처지는 잔인한 세계에 있다.

'로코도코' 최윤섭 다음은 누구일까. 프로를 계속 해야 하는지, 자신은 불안해하고 있다는 것을 누군가가 또 우리를 향해 신호를 보내올 것이다. 지금 LOL 의 상황을 본다면 그 어떤 선수가 그런 신호를 보내도 이상하지 않다. 비록 지금 최고로 잘나가는 선수라 할지라도, 단 하나의 경기에서 삐끗하기만 하면 말이다.

경기 하나에 일희일비하는 것은 팬의 속성이기도 하다. 해외 축구 소식을 보노라면, 매 경기마다 역적과 영웅이 탄생하고, 같은 선수가 불과 한 경기만에, 며칠 사이로 역적에서 영웅으로, 영웅에서 역적으로 바뀌는 경우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다.

어찌보면 팬들도, 그리고 안티팬들도 자신이 기대했던 결과가 나오지 않았기에 그 분노를 그렇게 표출하는 것일 수도 있으니까. 자신이 응원했던 팀이 진다는 것은 팬들에게도 잔인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런 모습 하나하나가 모여 선수들을 더욱더 몰아붙이고 좌절과 상처를 확대시킨다면, 잠시 한걸음 호흡을 가다듬는 것이 낫지 않을까.

LOL 프로선수가, LOL e스포츠가 무너지는 모습을 바라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테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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