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수첩] 셧다운제, 합리적 토론이 어려운 시대

칼럼 | 서명종 기자 | 댓글: 23개 |





1990년, 한 고등학교 3학년생의 1년간의 기록

지금으로부터 22년전인 1990년은 기자가 고등학교 3학년에 다니고 있을 때였다. 서울에 올라와서 학력고사 (92년 12월까지는 학력고사로 진행되었고, 93년 말의 대입시험부터는 수능으로 바뀌었다) 시험을 봤던 날짜가 12월 18일이었는지 12월 19일이었는지는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세워진 지 몇년 안되는 신생 사립고는 산을 파낸 공간에 만들어졌다. 버스 종점에서 15분을 걸어 올라가야만 학교에 도착할 수 있었고, 따라서 학교는 스쿨버스로 매일 아침 학생들을 실어날랐다. 아직도 기억나는 것은, 신진자동차학원 앞에서 아침 6시 53분에 내가 타야하는 스쿨버스가 섰다는 것. 아침마다 스쿨버스를 타고 가다보면, 다른 학교(학교의 지령에 의하면 경쟁학교!)의 스쿨버스들이 스쳐가곤 했다.

학교장의 신조는 "성적은 투입량에 비례한다"였다. 즉, 공부를 많이 시키면 시킬수록 성적은 올라가게 되어 있다는 것. 그래서 고등학교를 입학하는 첫날의 하교시간은 밤 10시였고, 한달 뒤 월말고사를 치른 뒤부터는 한시간이 연장된 11시가 하교시간이었다.

아마 88년, 89년의 사립학교 민주화운동과 전교조가 없었다면, 3년동안 단 한번도 해가 떠 있는 시간에는 하교하지 못했으리라. (그것도 오래 가진 못했다...) 덧붙이자면, 고등학교때 학교를 쉬는 날은 월말고사/중간고사/기말고사를 본 주의 일요일 단 하루였다. 한달에 단 한번. 시험을 치른 그 주의 토요일조차도 7시에 하교했고, 시험을 보지 않은 주의 일요일도 7시 하교였다. 유일한 위안이라면 주말에는 아침 6시 53분이 아닌 7시 53분으로 한시간 늦추어진 버스를 타도 되었다는 것 정도랄까.

물론 그 시간에 하교할 때도 맨손으로 집에 간 것은 아니었다. 8절지 깜지라 불리는 숙제를 받고 가서 아침 등교길에 제출해야 했으니까. 선생님의 기준에 맞게 써오려면 물경 1시간 30분에서 2시간 정도가 걸리는 그 8절지 깜지에는 사전작성이나 친구대여 등의 편법방지를 위해 당일날 찍은 선생님의 도장이 찍혀 있었다.






그런 2년간의 생활을 마치고 고등학교 3학년이 되었고 기숙사에 들어갔다. 당시 한학년 12개반에 720 명을 훌쩍 넘었던 (한반은 보통 60~65명 사이였다) 3학년 학생들중에서 성적순(일부는 기성회 임원의 자녀였지만)으로 70명 가량을 골라 기숙사에서 단체 합숙을 시킨 것이다.

8시에 시작하는 0교시 보충수업부터 시작해서 4번의 오전 수업, 3번의 오후 수업, 2번의 보충 수업, 다시 저녁 먹고 한번의 보충 수업(이 마지막 시간의 보충수업은 때에 따라 있기도 했고 없기도 했다)을 마치고 나면 대략 8시가 넘는다. 이때부터 자율학습이 시작되어 11시에 끝나게 된다.

자신의 신조에 충실했던 교장선생님은, 지금은 상상하기 어렵겠지만, 자율학습 시간 동안 담배를 피우면서 교실의 복도를 거닐었고 학생들이 열심히 공부를 잘하고 있는지 감독, 감시했다. 덕분에 멀리서 담배 냄새만 풍겨도 교장선생님이 떴다는 것을 쉽게 알수 있었지만. 이 모든 것들은 고3 전체의 공통 과정이었다.

다른 친구들이 하교를 위해 스쿨버스를 타러 갈 때 기숙사생들은 3학년 교실 복도와 이어져있는 기숙사로 바로 복귀한다. 그리고 간단히 씻은 뒤 11시 20분 가량까지 기숙사생 전용 교실에 모여 다시 자율학습을 시작한다. 공식 취침 시간은 12시 30분이었고, 공식 기상 시간은 아침 5시 30분이었다. 아침 5시 30분에 일어나 가벼운 체조와 운동장 돌기, 식사를 마치고 한시간 정도 자율학습을 하게 되면, 어느덧 친구들이 등교할 시간이 되어 교실로 가는 패턴이었다.

이런 생활 패턴은 1학기 때까지였다. 2학기 때는 취침 시간이 한시간 뒤로 미루어져 새벽 1시 30분이 공식 취침시간이었다. 그런데 다들 좀 더 남아서 2시 넘어서 자는데 나 혼자 1시 30분에 들어가 잘 수 있으랴. 어지간하면 2시 넘어서 자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기숙사 사감 선생님이 한분 있었지만, 혼자로서는 벅찬 일. 그래서 고3 담임들이 순서대로 돌아가면서 일주일이나 이주일씩 당번을 정해 기숙사 사감처럼 기숙사에서 아예 살면서 학생들을 관리/감독했다. 당시 고3 담임은 고3 담임이라는 이유로 추가 수당이 나왔고, 기숙사에서 살 때는 또 별도의 수당이 나왔다.

기숙사생들이 집에 가는 날은 토요일 저녁 단 하루였다. 토요일 저녁은 여느 친구들과 마찬가지로 7시에 하교했고, 평일보다 한시간 늦은 시간에 스쿨버스를 타고 다시 학교에 왔다. 일요일 저녁은 기숙사에서 보냈고. 토요일날 집에 가는 것은 유일하게 집밥을 한번 먹어볼 수 있는 기회였으며, 밀린 빨래를 교환하러 가는 시간이었다.

다른 친구들과는 달리 시험을 본 주의 일요일날도 오후 3시 가량까지 기숙사에 복귀해야 했다. 대청소를 한 뒤, 5시 가량부터는 평일처럼 자율학습에 매진하는 것이 일과였다. 한달에 단 한번, 시험본 주의 일요일 오전만이 유일하게 자유시간이었다.

나중에는 지치고 또 워낙 헉헉대면서 공부를 했던지라, 그리고 이런 빡센 일정을 소화했기에 원하는 대학에 합격할 수 있었던지라 지금도 추억이 새록새록하고 감회도 남다르지만, 다시 하라면 도저히 못할 것 같다. 어떻게 그 생활을 버텼는지 지금 생각해보면 신기하기도 하다.



머리가 나쁘면 손발이 고생한다

이런 경험을 가져서인지, 셧다운제의 근거로 드는 청소년 수면권을 보면 헛소리라는 생각밖에 들지 않는다. 온라인 게임은 커녕, TV도, 책도 전혀 읽을 수 없었던 22년전에도 1년내내 하루에 3~4시간 밖에 못잤던 사람이 바로 나이기 때문이다. 내가 바로 현장 증인이다!

지금의 청소년들도 마찬가지일게다. 물론 그 루트는 학원이라든가 과외라든가 하는 다른 형태일 수도 있겠지만, 적어도 학생들이, 수험생들이 기자가 고등학생일 때처럼 충분한 휴식은 커녕 체육활동도 제대로 챙기지 못하는 것은 동일할 것이다.

왜냐하면, 대학입학시험이라는 것이 지니는 중압감은 22년전에 비해 전혀 달라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나마 그때는 대학교를 나오지 않아도 그럭저럭 살 수 있는, 즉 취업난이 지금처럼 심하지도 않았고 그렇게 과한 스펙을 요구하는 시절도 아니었는데, 취업이 대입만큼 어려워진 지금 시절에는 오죽하랴!




▲ 이 성적표 한 장이 학생들의 인생을 좌지우지 하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변한게 없다


청소년 수면권 운운하는 자들은 고등학교때 기자처럼 공부에 파묻힘을 당해 살아보지 못했거나 혹은 아예 현실을 모르는 무지몽매한 사람들일 것이다. 그러니까 용감하게 그런 주장을 할 수 있을 게다.

예전에 "머리가 나쁘면 손발이 고생한다"는 말이 유행했던 적이 있었다. 정책도 마찬가지다. 머리가 나쁜 사람들이, 무식한 사람들이 정책을 짜거나 정책 결정 과정에 영향력을 행사하면, 그 정책 때문에 고생하는 손발이 있게 마련이다.

청소년 수면권은 바로 공부를 많이 시켜서이고, 대학입시 때문이며, 대학을 나와도 취업하기 힘든 세상살이 때문에 발생하는 것 뿐이다. 예전에는 그런 것을 숨기기 위해서 만화를 제물로 삼았고, 이제는 게임을 제물로 삼고 있는 게다. 그렇게라도 해야 어른들이 사회를 제대로 이끌지 못해서 지금 청소년들이 고생하고 있다는 사실을 조금이라도 더 숨길 수 있으니까.

그리고 게임을 제물로 삼아도 결국 해결되지 않을테니, 몇년 뒤 혹은 일이십년 뒤 새로운 문화나 새로운 미디어가 트렌드로 자리잡을 때, 다시 그것을 제물로 삼을 것이다. 원인을 파악하지 못하고, 아니 원인을 묻어두고 해결책을 찾고 싶어하지 않는 사람들이 원하는 것은 분노를 돌려 자기의 잘못을 숨길 수 있는 대체물일 뿐이다.

지금 우리가 보고 있는 것은 '무식한 사람들이 카드 돌려막기를 하고 있는 모습'이다.

얼마전 아청법 토론회에서 메텔과 관련된 발언을 했던 사람이 화제가 되었던 모양이다. 은하철도 999를 보면서 메텔의 목욕신을 보고 성적 호기심으로 잠을 자지 못했으며, 그래서 규제를 더욱 강화해야 한다는 것이 발언의 요지였다.

은하철도 999는 기자가 국민학교(지금은 초등학교지만)에 다니던 시절 TV에서 볼 수 있었다. 최초방영은 1981년. 그리고 그때는 29만원과 독재로 악명높은 전두환 시절이었다. 지금 기자의 머리속에서, '은하철도 999를 TV에서 방영해줬던 전두환이 더 나은 거 아냐'라는 생각이 떠오를 줄은 예전엔 감히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종교적 근본주의가 가지는 흑백논리

헌법에 정교분리가 명시되어 있긴 하지만, 사실 그게 지켜지기란 쉽지 않고 일신교적인 입장에서는 더욱 그렇다. 일신교는 자신과 같은 종교를 가진 사람이 아닌 사람을 단 두개로 구분할 수 밖에 없다. 얼른 회개시켜 우리 종교로 개종시켜야 할 사람, 그리고 진리를 거부하는 악의 무리. 중간이란 존재할 수 없는 것이 일신교의 특징이다.

나와는 다른 종교, 다른 신을 믿는 사람과의 공존을 받아들이는 것은 일신교를 믿는 사람에게는 대단히 힘든 고역이다. 그 사람을 인정하는 것 자체가 바로 자신이 믿는 유일한 신에 대한 불경이 될 수도 있고, 세계의 그 어느 일신교를 찾아봐도 다른 신을 믿는 신앙을 인정하라고 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다른 신 혹은 다른 신을 믿는 존재를 나와 같은 동급으로 인정하는 것 자체가 유일신이라는 존재의 근간을 뒤흔드는 일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일신교를 믿는 사람들과 종교적인 가치관에 대해 타협을 할 수 있다는 것은 대단히 어려운 일이다.

문제는 신정국가도 아닌 국가, 정교분리가 명시된 국가에서 특정 종교가, 특정 종교의 가치관이 지나치게 권력과 정책에 개입하게 되는 경우에 발생한다. 그런 사람들이 자신의 주장을 철회하는 것은 자신의 신념, 나아가 자신이 믿는 종교적 가치관의 한 부분을 무너뜨리는 것이 될 수 있기 때문에 철회가 지극히 어렵다. 특정 종교의 가치관이 정책에 개입하게 되면 우리가 보통 생각하는 민주주의에서의 합리적 토론과 타협, 양보라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그나마 세속과 많이 교류하면서 이런 부분에 대해 나름 합리적으로 생각하는 사람도 꽤 생겨났지만, 종교란 원래 보수적인 기질이 강하다. 그래서 신앙을 더욱 더 소리높여 외치고, 경전에 대해 신뢰를 더욱 많이 보내는 사람이 힘을 더 가지게 마련이다.

그래서 일신교에서 목소리가 크고 강력한 세력은 근본주의적인 경향을 띄는 경우가 많다. 종교적 근본주의의 목소리가 갈수록 강해지면 어떻게 되느냐고? 지금 아랍권에 들어선 신정국가를 보면 알 수 있지 않은가! 그 종교가 무엇이든지 간에 일신교의 근본주의적 경향이 강하면 강할수록 그들은 종교적 가치관으로 세속 전부를 물들이고 싶어한다.

지금 게임계의 싸움이, 문화계의 싸움이 어려운 이유는 두가지다. 하나는 상대가 무식하면서도 무식한만큼 용감하기 때문이며, 또 하나는 그 무식한 사람들중 일부에게 종교적 근본주의의 색깔이 짙게 배어있기 때문이다. 합리적 토론이, 학문적 연구가, 민주주의적인 대화가 어려운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그만큼 우리가 헤쳐나가야 할 길은 쉬운 길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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