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PC 게임의 돌파구, e스포츠가 답이 될까?

칼럼 | 오의덕 기자 | 댓글: 13개 |
퇴근 후 거실 의자에 앉아 컴퓨터 전원버튼을 누르며 생각했다. ‘이게 과연 얼마 만이지?’ 키보드 위에 뿌옇게 내려앉은 먼지를 보니 당황스럽기까지 하다. 게임 기자라는 특성상 하루의 대부분을 PC 그리고 게임과 함께 보내지만, 집에서 PC를 켜는 일이 갈수록 줄어들고 있다.

여전히 게임이 가장 큰 여가 생활 중 하나임에는 변함이 없다. 그러나 언젠가부터 귀가 후 나에게는 두 가지 선택지가 생기기 시작했다. 애써 피곤한 몸을 일으켜 책상 앞에 앉아 PC를 켤 것인지 아니며 소파에 편하게 누워 스마트폰이나 태블릿을 꺼내 들 것인지.

최근 한국뿐 아니라 전 세계 게임시장에 몰아치고 있는 모바일 게임의 폭발적인 흥행에는 여러 가지 이유 중에서도 언제 어디서나 즉시 플레이할 수 있는 모바일 디바이스의 강력한 ‘접근성’이 가장 크게 작용했다고 생각한다.

먼 과거부터 존재한 닌텐도DS와 PSP 같은 휴대용 게임기를 언급하며 반론할 수도 있겠지만, 그것과는 확연히 구분되는 접근성이다. Wi-Fi, 3G, LTE 등 시간과 장소에 상관없이 항상 무선 인터넷으로 연결된 스마트폰 시대로의 돌입은 긴급 업무나 개인적인 용건 때문에 잠시 게임기를 내려놓고 어쩔 수 없이 PC를 켜야 하는 귀찮음과 여기서 비롯하는 게임 플레이의 단절을 대부분 제거해 주었다.

나는 귀가 후 처리해야 할 업무가 많은 사람 중 한 명이다. 예고 없이 쏟아지는 업무 이메일과 사건, 사고, 취재는 밤늦도록 PC를 옆에 끼고 살 수밖에 없게 만들었다. 그러나 지금은 다르다. 거실에서 태블릿 하나만 들고 있으면 굳이 PC가 없어도 동영상, 음악, 독서 같은 각종 엔터테인먼트부터 다양한 업무까지 한 번에 처리할 수 있다. 게다가 가장 중요한 ‘게임’까지 한 기기에서 플레이할 수 있으니 이보다 더 좋을 순 없는 거다.




[ ▲ "Play Everywhere"이란 좌우명을 가장 멋지게 성공시킨 게임 '캔디 크러시 사가' ]



‘바이오쇼크 인피니트’ 같은 이른바 블록버스터를 원하는 하드코어 유저들에게는 모바일 게임이 아직 성에 차지 않을 수 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스마트폰과 태블릿의 성능은 외계인을 납치해 고문한 듯 안드로메다로 향하고 있고 PC, 콘솔 대작 게임과 똑같은 수준은 아니더라도 그 정수를 온전히 담아낸 모바일 게임이 급증하는 추세다.

특히 출퇴근 대중교통 수단, 지하철이나 버스에서의 플레이가 귀가 후 거실 및 침실까지 그대로 이어지는 플레이의 ‘연속성’은 PC 게임이 비주얼이나 콘텐츠 면에서 다소 우위에 있다고 하더라도 기존에 하던 모바일 게임을 계속 선택하게 하는 ‘접근성'과는 별개의 중요한 요인이다. 단번에 알 수 있는 예시가 바로 2013 야구시즌 특수를 노린 온라인 야구게임과 모바일 야구게임의 엇갈린 성적표다.

게다가 단지 게임뿐 아니라 PC로 할 수 있는 거의 모든 영역을 모바일 플랫폼이 빠르게 흡수하면서 많은 시장조사 기관이 예측하는 바와 같이 PC 플랫폼 자체의 쇠락까지 가속화되고 있다. 모바일 게임은 기하급수적으로 성장하는 데 비해 PC는 본격적인 경쟁에 돌입하기도 전에 플랫폼 보급률조차 감소하는 상황. 한 치 앞도 보지 못하는 게 우리네 인생이라지만 PC 게임, 특히 PC 온라인 게임의 미래를 장미빛으로 논하기에는 어둠이 너무 짙게 깔려 있는 게 사실이다.


그렇다면 정녕 PC 게임의 돌파구는 없을까? 나는 이 물음에 대한 힌트를 PC의 전원버튼을 누르던 바로 그날 발견할 수 있었다. 윈도우 부팅화면을 보자마자 ‘무의식적으로’ 클릭한 바탕화면의 아이콘은 다름 아닌 ‘리그오브레전드’(LoL)였다.

물론 PC 게임이 살아날 수 있는 해법에 대해 고찰하면서 얼마 전 PC방 점유율 40% 넘긴 그야말로 초대박 게임, LoL을 예로 드는 것 자체가 의미 없는 결과론적 해석일 수 있다. 그러나 시간이 갈수록 모바일에 밀려 경쟁력을 잃어가는 PC 게임시장에서 사상 유례없는 성공작이 나왔다는 사실을 단지 행운 혹은 유행의 결과나 ‘잘 만들었으니 떴겠지’라는 허무개그로 수긍하고 지나치기에는 뭔가 찝찝함이 남는다.

퇴근 후 나의 여가 시간 점유율을 두고 펼쳐지는 치열한 한판 승부에서 높은 확률로 패배를 기록하던 PC가 그날 갑자기 승리한 이유가 도대체 뭘까. ‘할 게 없어서’라던가 1위 게임을 해야 한다는 의무감 따위는 아니었다. 나는 실시간 전략 게임의 젬병이라 즐거움보다는 스트레스를 더 받는 편이며 이미 내 아이패드와 PC 하드디스크에는 엔딩을 제발 봐달라고 애원하는 명작 게임들이 줄지어 러브콜을 보내는 중이었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이유는 단 하나. 나는 집에서 PC를 켰던 그날 퇴근길에 스마트폰으로 롤챔스 경기를 시청했을 뿐이었다.

언제나 멘붕이 가득한 2호선 지옥철의 압박을 이겨내고자 스마트폰으로 유흥거리를 찾다 선택한 SK텔레콤 T1 2팀과 MVP 블루의 12강 경기는 갑자기 심봉사가 눈을 뜬 듯 아직 만레벨도 못찍은 LoL 초보에게 이른바 신세계를 열어주었다. 그때 머릿속에 각인된 페이커(Faker) 선수의 능수능란한 르블랑 플레이는 무의식 속에서 ‘나도 직접 해보고 싶다’는 욕구를 마구마구 분출시키면서 만원 지하철에 선 채로 커뮤니티 사이트의 자게글과 공략, 그리고 댓글까지 모두 정독하게 했고 귀가 후 밥 먹고 샤워를 마치자마자 PC 앞에 앉게 만드는 괴력을 이끌어냈다.




[ ▲ 이 남자의 플레이를 보고 어찌 손이 근질거리지 않을 수가 ]



모바일 게임이 위협적인 근본적인 이유는 ‘접근성’과 ‘연속성’이라는 살벌한 무기를 앞세워 출퇴근 시간, 점심시간, 업무 중 농땡이 시간 등 게이머의 하루 24시간 중 모바일 게임을 플레이하는 비중을 지속적으로 높여간다는 데 있다. 더 나아가 PC 게임은 플레이하는 게이머가 오직 PC 앞에 앉아있는 그 시간에만 직접적인 재미를 제공받도록 고립시킨다.

출시 직전에 호평을 받았던 PC 게임, 특히 PC 온라인 게임 대부분이 시간이 지날수록 급격한 하향 곡선을 그리게 되는 것은 흔히 이야기하는 ‘콘텐츠 부족' 도 한가지 원인이겠지만 모바일 플랫폼의 등장으로 PC 게임이 예전만큼 게이머의 시간을 장악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특히, 게이머가 시간과 노력을 투입하면 할수록 더 많은 재미를 느끼게 되는 일반적인 PC 온라인 게임에서 이런 현상은 더욱 두드러진다.

모바일에 토막 난 여가 시간 중 온라인 게임을 하는 비중은 점점 줄어들어 겉핥기 수준의 재미만 즐기게 되고 고레벨 유저와의 격차는 점점 커지다 보니 결국 흥미를 잃고 게임을 중간에 포기해버리는 과정의 악순환이다.


하지만 e스포츠는에 기반을 둔 PC 온라인 게임은 여가 시간 점유율이라는 관점에서 볼 때 다른 PC 게임과는 뚜렷이 구분되는 특장점을 지니고 있다.

e스포츠 경기가 매일매일 만들어내는 각본 없는 영웅들의 스토리는 게이머에게 일상에 지친 몸을 일으켜 PC 앞에 앉도록 만들 정도의 ‘플레이에 대한 강력한 동기 부여’를 제공하는 한편, 커뮤니티에는 프로선수의 경기력에 관한 토론과 각종 화젯거리, 그리고 코스프레, 팬아트, 소설, 칼럼 등의 2차 콘텐츠 등 게임 외적인 콘텐츠를 끊임없이 생산해 낸다.

MMORPG의 공성전 같은 ‘열린 콘텐츠’와 비교할 수도 있겠지만, e스포츠는 본인이 원할 때 누구나 같은 조건에서 공정한 경쟁을 펼칠 수 있다는 점에서 드라마틱한 연출 가능성의 폭도 훨씬 넓고 이런 과정에서 폭발적인 유저 커뮤니티의 핵심재료가 되는 이른바 ‘떡밥'이 무한하게 제공된다.

시대에 흐름에 따라 이 모든 게임 외적 활동이 PC가 아닌 스마트폰, 태블릿 등의 모바일 디바이스에서 훨씬 더 많이 소비, 재생산될 수도 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결국 마지막에 이르면 전체가 하나로 합쳐져 게이머를 ‘플레이를 위해’ PC 앞으로 강하게 이끄는 역할을 수행한다는 점이다.




[ ▲ 2차 콘텐츠는 어떤 플랫폼으로 소비되든지 결국 플레이를 위한 PC로 견인할 수 있다. ]



즉, 직접적인 게임플레이를 통한, e스포츠 경기 관람을 통한, 다양한 커뮤니티 활동을 통한 재미와 즐거움의 견고한 순환고리는 게이머의 시간에 대한 지배력, 장악력을 다시 높은 수준으로 끌어올리고 모바일 게임이 웬만해서는 게이머의 여가 시간에 침입할 수 없도록 하는 일종의 면역력까지 만들어낸다.

게다가 공식 e스포츠 대회는 물론 별도로 매일매일 진행되는 아마추어 대회와 인터넷 방송까지 더해지면 유저 커뮤니티와 2차 콘텐츠 생산의 효과가 더욱 증폭되어 더는 어떤 방법을 써도 공략이 힘든 철옹성을 쌓게 되는데 내가 볼 땐 현재의 리그오브레전드가 가장 이 위치에 근접해 있다.

만약 시간이 좀 더 흘러 모바일 플랫폼이 PC를 압도해 손과 발을 완전히 끊어버린다고 해도 나는 앞으로 수년 동안은 e스포츠 게임만은 독립적인 생존이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터치 인터페이스, 더 나아가서는 구글글래스 같은 혁신적인 플랫폼이 보편적으로 도입돼도 1초 단위의 순간적인 판단과 콘트롤이 게임의 승패를 좌우하고 팬들을 열광케 하는 e스포츠 게임에서 PC와 키보드, 마우스라는 전통적인 게이밍 환경은 앞으로도 당분간은 가장 최적화된 수단일 게 분명하기 때문이다.

즉, PC가 우리집 만능기계는 더는 아닐지라도 e스포츠 게임을 ‘플레이하기 위한 도구’로서의 지위는 여전히 확고하다. PC 하드웨어 산업이 서서히 몰락하는 반면 고가의 PC 게이밍 기어가 점차 영역을 확장해 나가는 것도 같은 이치다. 또한, e스포츠 게임 특성 상 비주얼 보다는 밸런스에 초점을 맞추기에 저사양 PC 유저까지 쉽게 포용할 수 있다는 탁월한 이점도 있다.




[ ▲ 저사양 PC는 물론 슬림형 노트북에서 무리 없이 구동되는 LoL ]



작년 말부터 올해까지 게임업계 관계자를 만나면 가장 많이 듣는 질문이 있다. “앞으로 게임시장 어떻게 될까요?” 이 짧은 질문에 담긴 속내를 풀이해 보면 아래와 비슷하다. “모바일 게임이 뜨고 있는 것은 맞지만, 지금까지 해왔던 PC 게임을 접으면서까지 모바일 게임을 만들어야 할까요? 우리 회사 규모에서 사실 모바일 게임만으로는 (수익에 대한) 견적이 나오지 않습니다. 그러나 모바일 게임으로의 전환이 너무 늦어 큰 리스크를 입게 될까 봐 걱정도 됩니다.”

그렇다고 이 글을 통해 ‘e스포츠가 킹왕짱입니다. e스포츠 게임을 만들기만 하면 LoL처럼 바로 대박이 날 겁니다.’라는 답변을 하려는 것은 아니다. 사실 e스포츠 활성화는 말처럼 쉽지 않은 문제다. 밑 빠진 독에 물 붓기 마냥 끊임없이 투자해야 하는 반면 눈앞에 바로 보이는 성과를 측정하기도 힘들다. e스포츠 이전에 가장 중요한 목표, 즉 유저의 선택을 받는 재미있는 게임을 만드는 것이 최우선 진리다.

그러나 게임과 e스포츠가 강한 응집력을 가지는 본 궤도에 올릴 수만 있다면 그 후에 e스포츠는 급변하는 환경 속에서 모바일 게임의 역습에 저항할 수 있는 효과적인 수단이 될 수 있다.

이미 PC 게임 시장의 선두주자들은 e스포츠 분야에서 발 빠른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리그오브레전드를 개발한 라이엇게임즈는 사내 e스포츠팀의 규모를 끊임없이 확대하고 있으며 블리자드는 예상 밖의 부진에도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스타크래프트2 e스포츠 활성화를 위해 고군분투하고 있다. 월드오브탱크의 워게이밍이 한국에 지사를 설립하고 정식 서비스 후 바로 큰 상금과 함께 공식 대회를 개최한 것도 e스포츠 종주국에서 인기가 전 세계 e스포츠에 끼치는 파급력을 충분히 이해하고 있기 때문이다.

국내 게임업체도 마찬가지다. 올해 넥슨의 가장 중요한 사업 중 하나가 e스포츠다. 도타2 국내 서비스를 두고 LoL에 빼앗긴 점유율을 다시 찾아 오려는 시도로 해석할 수 있지만, 서든어택, 던전앤파이터, 사이퍼즈, 카운터 스트라이크, 워페이스까지 이어지는 핵심 라인업 각각의 청사진을 들여다보면 거대한 e스포츠 생태계를 만들려는 넥슨의 야심 찬 목표를 관측할 수 있다. 하물며, 골수 유저들의 비난까지 감수하면서 ‘마비노기2: 아레나'라는 MMO에 e스포츠 양념을 첨가한 신작을 발표하지 않았던가.

벼랑 끝에 선 네오위즈가 AOS 사업팀이라는 별도의 조직을 만들어 코어 마스터즈와 에이지오브스톰이라는 국산 AOS 신작을 동시에 출격시키는 것도 같은 맥락에서 해석할 수 있다.




[ ▲ 이 시점, 넥슨에게 도타2가 가지는 의미는 각별하다. ]



참으로 어려운 선택의 시기다. 이제 PC는 게이머들이 언제나 접하는 일상적이고 보편적인 플랫폼에서 뚜렷한 목적의식을 가지고 접근하는 특화된 플랫폼으로의 변화과정을 겪고 있다.

PC 게임이 모바일 플랫폼과의 치열한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PC 뿐 아니라 모바일을 비롯한 그외 플랫폼까지 자신의 도구로 적극 활용해야 한다. 그래야 게이머의 여가 시간 점유율을 높이고 단단한 생태계를 구축해 게이머를 다시 PC로 견인하는 전략을 꾀할 수 있다.

급변하는 환경 속에서 정답이란 없다. 하지만 PC 게임을 개발하겠다는 결단을 이미 내렸다면 지금이 바로 가장 효율적이면서도 현실적인 대안,’e스포츠’에 대한 진지한 고민이 필요한 시점이다.




[ ▲ 넥슨 서든어택 섬머 챔피언스 리그, 4월 22일 개막전 현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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