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수첩] 컴퓨터가 알아서 스토리를 만들어준다면? '섀도우 오브 워'

기획기사 | 강승진 기자 | 댓글: 17개 |


▲ 그저 참수 중독자라고 하기에는 주인공 탈리온의 칼질은 너무나 아름다웠다.

아마 대부분 플레이어가 칼질 몇 번에 폭죽 터지듯 튀어 오르는 우루크-하이의 머리통을 보며 환호했으리라. AAA급 대작들의 시원찮은 모습에 그 어느 해보다 시시한 한 해가 될 것으로 보였던 2014년. 별다른 기대감 없이 등장해 최다 GOTY 2위를 깜짝 수상한 '미들 어스: 섀도우 오브 모르도르'의 이야기다.

'섀도우 오브 모르도르'는 호빗-반지의 제왕으로 이어지는 성공한 영화 대신 소설 실마릴리온의 주인공인 절대 반지의 제작자, 켈리브림보르의 이야기와 스크린에서는 볼 수 없었던 암흑 시절을 다루며 상업적으로도 성공했다. 하지만 게임 성공의 5할은 스토리가 아니라 플레이만으로 액션 시퀀스를 보는듯한 전투에 있다. 공격, 반격의 간단한 버튼 입력과 몇 개의 조합으로 펼쳐지는 칼질 액션은 절륜한 타격감과 통쾌함을 선사했다. 다른 게임들이 죽부인으로 나무토막을 때리고 있었다면 혼자 전기톱으로 통나무를 썰어버리는 느낌이랄까? 이런 액션은 배트맨 아캄 시리즈의 격투와 함께 게임씬 최고 중 하나로 꼽힐 정도다.

그런 미들어스 시리즈의 신작 영상이 예고됐던 대로 지난주 공개됐다. 방대해진 전장 스케일과 공성전. J.R.R. 톨킨의 판타지 세계관에 등장하는 다양한 괴물들. 그리고 전작에는 없던 다양한 기술들은 팬들의 가슴을 설레게 하기 충분했다.

하지만 일부에서는 기대하던 후속작의 영상에 아쉬움을 드러내기도 했다. 전작이 워낙 뛰어났기 때문일까? 그다지 큰 발전이 없어 보이는 그래픽을 지적하는 의견도 있고 모션도 비슷한 것들이 다시 쓰였다고 평하기도 했다. 눈에 확 띄는 액션은 드레이크를 타고 플레이하는 공중 액션 정도라나. 후속작보다는 마치 확장팩 정도를 대하는 모양새다.

하지만 이번 영상의 핵심은 개선된 액션이 아니었다. 주목할 점은 통렬한 칼질과 함께 '섀도우 오브 모르도르' 성공의 나머지 5할을 차지하는, 한층 진일보한 '네미시스 시스템'에 있다.



게임 역사상 최고의 액션

그것을 빛나게 한 조연, 네미시스

네미시스 시스템이라니. 게임은 해봤지만 영 귀에 박히지 않은 이름이라고? 좀 다르게 이야기하면 '아하!'하고 무릎탁이 시전될 테니 일단 한 번 읽어보시라.

적의 대장은 졸개와 달리 다양한 접두사가 붙은, 각자의 이름을 가진다. 이 이름은 단순히 적을 구분하는 용도가 아니라 적의 성격, 특성을 결정짓는 요소다. 강점과 약점도 명확하게 구분된다. 누구는 겁이 많아 개처럼 생긴 카라고르를 보면 뒤도 안 보고 도망가기 바쁘다. 또 다른 녀석은 강력한 무기를 가지고 주인공의 공격을 다 튕겨내는 검술의 장인이지만 거만한 성격 탓에 주의를 게을리해 은신 공격 한 번에 죽기도 한다.



▲ 우리 대장님들 옷 입는 센스 하나만큼은 다들 기가 막힌다.

또한, 대장들은 일반 졸개들과 달리 서로 다른 생김새를 가진다. 이게 커스터마이징에서 파츠 몇 개를 교체하는 수준이 아니라 '누구세요'라는 질문이 절로 나올 정도로 개성 넘치는 외견을 자랑한다. 적 대장의 외모, 특성은 주인공과의 대화, 각자의 출세욕과 버무려지며 매번 다양한 이벤트를 만들어낸다.

아무리 맛난 횟집에 가도 매일 광어만 먹으면 없던 비린내도 느껴질 터. 마찬가지로 흔히 말해 '절어주는' 액션도 반복하다 보면 질리게 마련이다. 하지만 네미시스 시스템 덕에 플레이어는 똑같은 액션만을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적의 약점에 따라 다양한 전술을 유저 스스로 연구하게 되는 셈이다.

아. 물론 극 후반 가면 그런 거 없긴 하지만.



▲ 대장 하나가 죽으면 다른 녀석들이 대장 자리를 두고 싸우기도 한다.



네미시스 시스템의 진화

다시 한번 가운데땅을 살아 숨 쉬게 하다

이제 네미시스 시스템이 무엇인지 기억했는가? 이번 '미들 어스: 섀도우 오브 워'에서는 놀라움을 보여줬던 시스템이 한층 성장했다. 아니. 격변이라는 표현이 더 어울릴 정도다. 다양한 성격, 강점과 약점의 조합으로 이루어진 대장들은 이제는 하나의 인격을 가지게 됐다. 이는 영상에서 적으로 등장한 적 전쟁 군주, '쓰락 스톰-브링어'와 '투고그 플레임 오브 워'의 관계에서 잘 드러난다.

쓰락은 주인공의 절대 반지 힘을 억제하는 '저주 능력'을 갖추고 있는 전쟁군주다. 이런 특성은 전작에서도 볼 수 있던 부분이지만, 그는 여기에 더해 주인공에 대한 개인적인 원한까지 숨기지 않고 드러낸다. 여기에는 쓰락에게 '아군이었지만 배반당했다고 여기고 있다.'라는 배경 스토리가 깔려있기 때문이다.

또 다른 전쟁 군주인 투고그는 더 극적이다. 그는 쓰락의 죽음에 분노를 느끼고 주인공에게 불의 복수를 가하며 희열을 느끼는 인물이다. 하지만 이게 '우리 편을 죽였어!' 따위의 피 끓는 전우애는 아니다. 그의 분노는 라이벌 의식을 느끼고 있었던 쓰락을 주인공이 죽였다는 데에 화풀이일 뿐이다. 또한, 아군 우르크-하이인 '모주 데드아이'는 쓰락에 대해 개인적인 악감정을 가지고 있다. 모주는 스파이가 되어 적 성채에 잠입해 기회만 엿보다 주인공이 위험한 순간, 쓰락의 미간에 화살을 꽂아넣으며 복수에 성공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 다 끓인 라면에 달걀까지 풀어놨는데 누가 뺏어 먹으면 기분 나쁘지.

주인공에 대한 쓰락의 적개심. 쓰락에게 복수의 칼날을 갈고 있던 모주. 라이벌을 잃은 분노를 주인공에게 표출하는 투고그. 충성심으로 지역 군주인 우르하콘에게 용감히 돌진하는 아군 '라그듀그 아이언 마운트'. 그리고 영상 막바지에 대군주 우르-하콘과의 전투가 펼쳐지는 알현실의 디자인까지. 이들의 이야기와 전장 디자인은 개발사가 미리 만들어 둔 스토리가 아니라 플레이어의 그간 행동이나 적들의 상호 관계에 의해 알아서 만들어진 것이다.

이 모든 것을 만드는 시스템이 바로 진화한 네미시스다. 이제 네미시스는 단순히 적의 특성과 외모를 구분해주는 데에 그치지 않고 적 대장들의 출세욕, 충성, 배반, 그리고 동료와의 우정까지 다채롭게 만들어준다. 성채의 주인을 누구로 설정했는지, 아군이 누구에게 당했는지, 어떤 이벤트를 거쳤는지 모두 기억하고 다음에 만날 때는 이를 기반으로 새로운 이야기가 생성되는 방식이다.



▲ 인테리어가 왜 이러냐고요? 여기 대장 취향입니다. 존중 좀....



나만을 위해 만들어지는 이야기

파밍도, 노가다도 매번 색다르다

개발사인 모노리스는 인터뷰를 통해 '이번 작품은 RPG적인 요소를 다수 넣어 꾸준히 플레이할 수 있는 게임이 되길 바란다.'고 이야기했다. 그들의 말대로 신작에는 전작에 없던 장비 요소가 생겼고 암흑 군주 사우론과의 '가운데땅'을 두고 펼쳐지는 공성전과 방어전이 끊임없이 일어난다. 적 전쟁군주를 반지의 힘으로 아군으로 만들 수도 있으니 반복 플레이는 거의 필수가 될 듯하다.

하지만 반복 플레이에는 필연적으로 지루함이 따른다. 개발자가 미리 만들어둔 것이 고갈되면 이벤트는 귀찮은 문자의 조합일 뿐이며 멋진 컷신도 스킵 버튼이 언제 쓰이는지 알려주는 안내 영상에 그치고 만다. 그런데 만약 모든 이야기에 흥미로운 캐릭터의 대화와 새로운 이벤트가 일어난다면 어떨까?


화염 마법을 다루는 'A'는 중간계 최전선을 지키는 대군주 'B'의 사랑을 받는 직속 수하다. 하지만 출세욕이 강한 'C'는 그를 질투하고 호시탐탐 'A'를 제압하고 'B'에게 인정받고 싶어 한다. 'C'의 출세욕은 결국 몰래 'A'를 암살하게 한다. 그런데 'A'와의 전투에서 한쪽 팔을 잃었던 'D'는 갈 곳 잃은 복수의 칼날을 'C'에게로 들이댄다. 결국, 다음 공성전에서 선봉에 나선 'D'는 'C'와 만나....


이 정도면 글로 읽어도 선뜻 이해가 가지 않는 TV 속 '막장 드라마'의 이야기급. 이런 스토리를 개발자가 적 대장마다 수십, 수백 개씩 직접 만들려 한다면 개발 기간도 길어지고 창의적인 주제 생성에도 어려움을 겪게 될 것이다. 그 과정을 개발자가 아닌, 게임이 알아서 메워주는 것이 네미시스가 보여줄 가능성이다. 시스템에 의해 스스로 만들어진 이야기는 유저가 플레이할 때마다 변화한다. 이는 갈수록 무덤덤해지고 지루해지는 파밍이 나의 행동에 맞게 설정된 나만의 이야기로 채워진다는 뜻이다.




'모르도르: 섀도우 오브 워'가 한창 개발 중인 게임인 만큼 가능성을 보여준 네미시스가 얼마나 완성되어 등장할지는 모른다. 하지만 흔히 '노가다'라는 이름의 반복 플레이가 주는 노동의 이미지는 충분히 벗겨낼 수 있지 않을까? 이름만 바꾼 비슷비슷한 콘텐츠를 업데이트라며 배포하는 대다수의 개발사들에도 좋은 본보기가 될 테고 말이다.

참. 혹시 전작을 즐겼다면 세이브 파일은 꼭 가지고 있길 바란다. '섀도우 오브 워'에 전작 세이브파일을 연동시키면 등장한 적의 정보와 주인공과의 관계 등 다양한 설정들을 그대로 불러와 즐길 수 있다. 아직 출시일까지는 시간이 충분히 남았으니 지금부터 새로 시작해 그 느낌 그대로 '미들 어스' 시리즈가 성장하는 모습을 시간의 흐름과 함께 몸소 체험해도 좋고 말이다.

어찌 됐든 8월 22일 햔국어화되어 출시될 게임이 기대될 뿐이다.



댓글

새로고침
새로고침

기사 목록

1 2 3 4 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