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P를 찾아서#22] "내가 이 던전의 CEO로소이다" - 던전 키퍼

기획기사 | 양영석 기자 | 댓글: 7개 |



'던전'이란 판타지 세계관에서도, RPG에서도 꽤나 중요한 위치를 차지합니다. 모험가들의 발길을 이끌고, 숨겨진 보물을 찾고 각종 함정과 고난, 시련을 이겨내면서 보스를 물리치면 커다란 보상이 있으니까요. 무엇보다도 성취감이 뛰어난 콘텐츠입니다.

여기서 역지사지로, 입장을 바꿔 생각해봅시다. 던전 관리자 입장에서는 이렇게 시도 때도 쳐들어오는 용사 파티는 아주 골칫덩이입니다. 우린 그냥 얌전히 땅 파면서 잘 살고 있는데 와서 못살게 구는 거잖아요. 아주 눈엣가시입니다. 내가 비록 세계 정복이라는 의도를 갖고 있었지만, 아직 실행조차 하지 않았는데 집에 쳐들어와서 생떼 부리는 셈입니다.

하지만 권선징악적인 소재가 많던 시절에는 이런 생각조차 하기 힘들었죠. 마치 고길동이 악마처럼 보였지만 어른이 된 후에는 성인군자처럼 보이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그런 시기에 이런 용감한 도전을 한 게임이 있었습니다. 그것도 꽤(?) 선진적인 마인드를 가져야만 클리어할 수 있던 게임이죠.

던전을 만들고 크리처를 소환해서 운영하며, 그리고 이들까지 잘 달래줘야 하는 던전 CEO가 되는 게임. 오늘 IP를 찾아서를 통해 조명해볼 게임은 바로 피터 몰리뉴의 역작, '던전 키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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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던전 키퍼'는 어떤 게임인가?
권악징선, 던전 운영의 전략 게임




'던전 키퍼'는 1997년 출시된 불프로그 프로덕션의 전략 게임입니다. EA에서 퍼블리싱을 진행했고, MS-DOS 및 Windows95 용으로 출시된 PC 게임이죠. 지금도 많이 회자되고 있는 게임 크리에이터 '피터 몰리뉴'를 대표하는 게임이기도 합니다.

이 게임은 당시에는 없던 '악'을 메인 테마로 내세웠습니다. 플레이어는 던전을 만들고, 미니언(주로 악마)을 모집하고 선택하면서 '용사'들을 막아내야 합니다. 자꾸 쳐들어와서 괴롭히는 용사들을 막아내고, 악마들과 함께 던전 하트를 지키면서 세계를 정복하는 '던전 운영' 게임입니다. 일종의 전략 시뮬레이션인데,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전략 시뮬레이션과는 조금 다른 느낌이죠. '던전 메이커'와 같은 분류로 구분할 수 있는 게임의 원조격 게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왜 이 게임이 '운영 게임'이느냐 하면, 바로 관리가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소환된 괴물들을 훈련도 시켜야 하고, 만족도를 위해 급료를 줘야 하죠. 게다가 편의시설도 마련해야 합니다. 악마니까 당연히 나쁘게 해줘야 하는 게 아닌가 싶기도 한데 반대입니다. 당신은 완벽한 경영자가 되어야 하죠. 던전도 쳐들어오는 용사들에 맞춰 구조를 바꿔나가야 합니다. 때로는 직접 개입해서 용사들을 물리치기도 해야 하고요.




사원을 짓고, 던전을 확장하면서 소환된 악마들을 관리해야 합니다. 악덕 사장으로 운영하다간 악마들이 화나서 던전을 박살 내고 도망가 버립니다. 이러면 쳐들어오는 용자만 좋아하게 됩니다. 이 게임을 하다 보면, 그동안 왜 이리 악마들이 마왕에게 충성하는지를 절실히 깨달을 수 있으며 마왕은 얼마나 훌륭한 경영자인지 알게 되는 신기한 게임이죠.

여기서 끝이 아닙니다. 제압한 용사들을 그냥 처단하지 않고 고문실에 가둡시다. 고문과 치료를 반복하면서 살살 구슬리거나, 적절한 보상(돈)을 주면 용자들도 타락합니다. 사실 거의 무료 봉사급으로 세계를 구해주세요 하는 강요보다 좋은 급료와 복지 환경을 제공하는 악마 편에 서는 게 더 낫겠죠. 이해합니다. 아무튼 이렇게 침략한 용사들도 써먹는 경우도 많았을 겁니다. 그게 재밌거든요.

던전 키퍼의 가장 큰 특징 중 하나는 바로 플레이 방식의 전환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포세션'이라는 시스템인데, 일종의 '빙의'입니다. 부하에게 빙의해서 시점이 1인칭으로 바뀌고 직접 제어할 수 있는 거죠. 답답하니까 내가 직접 한다는 느낌으로 전장에 개입하는 거라고 보시면 됩니다.

이렇게 '권악징선'이라는 컨셉과 함께 나름대로 탄탄하면서도 개성적인 시스템을 갖춘 던전 키퍼는 당시 많은 충격을 주었습니다. 게임이 그렇게 마냥 쉽지는 않았는데, 플레이에 빠져들면 끝도 없이 탐닉하게 마력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많은 인기를 끌었죠.




이러한 인기를 토대로 후속작인 '던전 키퍼2'가 1999년 7월 출시됩니다. 비록 전작의 메인 개발자인 피터 몰리뉴가 참여하지는 않았지만, 그가 만들어둔 시스템과 기획은 던전 키퍼2에서도 많이 계승되었죠. 기본적으로 게임의 골자를 같지만 풀 3D 그래픽을 도입해서 큰 변화가 있었습니다.

플레이어는 역시 악마의 대군주이며, 다양한 악마와 크리처들을 소환해서 던전은 운영하는 골자는 같습니다. 이를 통해 세계를 정복하면서 왕국의 모든 지하를 정복하고, 포탈 젬을 확보해야 합니다. 이 포탈 젬은 그동안 악마들이 쳐들어오는 것을 막고 있던 강력한 억제기였거든요.

이렇게 20여 개의 포탈 젬을 확보하고, 최종적으로 레지날드 왕을 물리치는 게 주요 캠페인입니다. 재미있는 건, 이 일부 미션에는 플레이어 외에도 다른 경쟁자가 있다는 점입니다. 다른 경쟁자가 포탈 젬을 먼저 획득하면 패배하므로 일종의 시간제한을 둔 미션인 셈이죠.

2편에 이르러 생긴 또 다른 큰 변화는, '샌드박스' 형식의 모드인 '마이 펫 던전'이 추가됐다는 점입니다. 자유롭게 던전은 기획하고 운영하면서, 끝없이 놀 수 있는 도구를 마련해둔 셈이죠. '스커미시'라는 모드는 일종의 도전이었고, 멀티플레이를 통해서도 대전이 가능한 게임이었습니다. 이렇게 플레이의 다양함을 만들어냈고, 좀 더 '던전'에 집중하는 구조로 만들어져 평가는 좋았지만, 상업적인 성공을 거둔 타이틀은 아닙니다. 2004년 4월까지 약 7만 장을 판매하는데 그쳤습니다.




그래도 '던전 키퍼'는 불프로그, EA에서는 상징적인 타이틀이었습니다. 비록 2편이 상업적인 성공을 거두었다고 하긴 힘들었어도, 게임의 평가는 매우 좋았던 편이었고요. 그래서 3편의 제작도 시작됩니다. 하지만 던전 키퍼 2가 나온 지 1년이 지난 2000년 8월, 공식 중단됐다는 소식이 전해지면서 공식적인 '불프로그 프로덕션'의 던전 키퍼는 막을 내립니다.

그런데 전 편이 나온 지 약 15년이 흐른 지난 2014년 1월 말, '던전 키퍼'가 모바일 게임으로 출시됩니다. 제작사는 '다크에이지 오브 카멜롯'과 '워해머 온라인'을 제작한 '미씩 엔터테인먼트'가 담당했습니다. 모바일 버전 던전 키퍼는 지나친 과금 요소로 엄청난 혹평을 받게 되죠. 워해머 온라인도 썩 좋은 성과를 거두지 못했던 미씩 엔터테인먼트는 결국 이후 해산의 길을 걷습니다. 이렇게 '던전 키퍼'의 역사는 애매하게 부활한 채 미묘한 역사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지금도 구글플레이와 앱스토어에서 찾아볼 수 있는 던전키퍼.



'던전 키퍼'는 IP의 소유자는?
EA, '일렉트로닉아츠'의 소유

'던전 키퍼'를 개발한 불프로그 프로덕션은 레 에드가(Les Edgar)와 피터 몰리뉴(Peter Molyneux)가 1987년 설립한 영국의 비디오 게임 개발사입니다. 1980년대 말, 오늘날 '갓 게임'이라고 부르는 컨셉의 게임의 시초라고 할 수 있는 '파퓰러스'로 유명한 회사입니다.

불프로그 프로덕션은 1989년 출시한 파퓰러스 이후 신디케이트, 테마파크 등의 다양한 게임과 함께 '파퓰러스2'도 내놓았고 승승장구하며 1990년대 최고의 개발사이자 시대를 풍미하는 개발사로 이름을 날렸습니다. 피터 몰리뉴의 이름을 본격적으로 알리기 시작한 작품도 '파퓰러스'고, 불프로그의 또 하나의 대표작이기도 하죠.

그런데 불프로그 프로덕션은 1995년, 거대 게임사에게 인수됩니다. 일렉트로닉아츠, EA가 불프로그 프로덕션의 모회사가 되죠. 이 당시 EA는 크게 성장하는 시기였고, 이 과정에서 불프로그 뿐 아니라 울티마 시리즈의 '오리진 시스템'과 심즈 시리즈의 맥시스 등 다수의 개발사가 EA 산하로 들어갔죠. 이 과정에서 피터 몰리뉴는 EA 부사장으로 취임합니다. 이 당시가 바로 '던전 키퍼'가 개발되던 시기였습니다.



던전 키퍼는 현재 EA오리진을 통해서 플레이할 수 있습니다.

안타깝게도 피터 몰리뉴는 던전 키퍼의 개발을 끝마치고, 이듬해인 1996년 EA 부사장직을 사임하고 불프로그를 떠납니다. 이후에도 불프로그는 게임의 개발을 계속 이어갔고 던전 키퍼2, 테마 파크 시리즈 등의 게임을 내놓았지만 상업적으로는 괜찮은 성과를 거두지 못했죠. 결국 2001년, 불프로그 프로덕션은 해산되었고 잔류 인원은 EA에 흡수되면서 '불프로그 프로덕션'은 역사 속으로 사라집니다.

재미있는 건, 앞서 소개했듯이 2014년 모바일 버전의 '던전 키퍼'를 출시했던 미씩 엔터테인먼트도 결국 해산됐다는 점입니다. 던전 키퍼를 거쳐간 개발사들은 해체되었다고 할까요. 많이 나온 작품은 아니지만 결국 거쳐간 개발사들을 대부분 해산시킨 타이틀이라고도 할 수 있겠네요.

일단 '던전 키퍼'의 저작권을 갖고 있는 건 EA입니다. 불프로그 프로덕션은 인수하면서 저작권도 확보했고, 모바일 버전도 타 개발에 맡길 수 있는 전체적인 개발 권리까지 모든 권리를 갖고 있습니다. 또한 현재 '던전 키퍼'는 GOG.com이나 오리진에서 제공하는 게임이기도 합니다.



판권은 EA가 가지고 있습니다. EA가 소유한 고전 명작이 참 많네요...


'던전 키퍼'가 갖는 의미
독특함과 확실한 시스템으로 많은 영감을 준 '피터몰리뉴의 역작'




던전 키퍼는 상당히 역사가 오래된 게임이고, 그 역사도 생각보다는 빨리 끝난 게임입니다. 지금은 "고전 명작"정도로 부르기 딱 좋은 포지션이죠. 하지만 던전 키퍼가 던져준 임팩트는 지금도 이곳저곳에 남아있습니다. 던전을 운영하는 게임에 있어서 시초격인 게임이라고도 할 수 있고, 독특한 '권악징선'의 컨셉은 수많은 게임들이 받은 영향이기도 합니다.

일단 가장 큰 영향으로 볼 수 있는 건 '전략 게임' 장르에서 큰 하나의 줄기를 만든 게임이라는 점입니다. 전략 게임의 장르는 수도 없이 많겠지만, 그중에서도 하나의 축인 '던전 운영'이라는 독특한 소재를 확실히 만들어냈죠. 단순히 적재적소에 유닛을 배치하고 전투를 수행하는 것에서 지나지 않고, '운영'을 통해서 만들어간다는 점입니다.

이러한 던전 키퍼의 특성은 때로는 전략 게임으로서, 때로는 '갓 게임'으로서, 때로는 '운영' 게임까지 섭렵합니다. 제각각의 특징을 갖고 있는 게임 장르들을 하나로 합쳐서, 확실한 정체성을 만들어냈죠. 그것도 1994년에 말입니다. 그만큼 피터 몰리뉴가 계획했던 기본적인 틀과 기반이 훌륭하다고 할 수 있는 게임이죠.

다른 영향은 '권악징선'입니다. 권선징악적인 주제가 가득한 RPG를 비웃기라도 하듯, 악마가 돼서 세계를 정복하는 게임 컨셉 자체가 당시에 매우 독특했습니다. 악마가 되어 쓸데없이 던전에 쳐들어오는 용사들을 비웃고, 세뇌하고, 고용해서 되려 침략에도 써먹죠. 이러한 권악징선의 컨셉은 다른 게임에서도 이제 꽤 자주 찾아볼 수 있고, 블랙 유머로 가득한 풍자적인 게임으로 등장하기도 합니다.




이러한 독특한 '던전 키퍼'의 정체성은 많은 게임들에게 강력한 영향과 영감을 준 동시에, 확고한 팬층을 만들어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게임 자체도 원래 쉽지 않았으나 탐닉하고 빠져들면 정말 시간 가는 줄 모르고 하게 되는 매력이 있었습니다. 타임머신이라고 할 수 있을 마력이죠.

그렇기 때문에 나름대로 '던전 키퍼'는 정신적 계승을 이야기하는 게임이 제법 등장한 편입니다. 대표적으로는 2011년 발표되어 현재 3편까지 등장한 '던전스'가 있고, 2015년에는 '워 포 더 오버월드'라는 게임도 출시되었습니다. 굳이 던전 키퍼의 계승작이 아니더라도, 이에 영향을 받은 게임이나 시스템은 꽤나 자주 찾아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저는 매우 좋아하는 게임입니다만, 안타깝게도 던전 키퍼가 리부트 되거나 후속작이 등장할 가능성은 높지 않습니다. 이미 한차례 모바일로 리부트 했다가 별로 좋지 못한 결과를 얻은 이유도 있고, 이미 3편도 취소된 지 어느덧 20년이 넘어갑니다. 세월이 흐르는 동안 게임을 소비하는 유저층도 매우 달라졌고, 세대교체가 이뤄져 '고전 명작' 정도로 취급받을 수 있는 게임이니까요.

게다가 원작자이자 게임 디자인을 설계한 핵심 개발자인 '피터 몰리뉴'는 현재 22Cans 스튜디오를 설립하고 신작 '레거시'를 개발하고 있죠. 이미 불프로그 프로덕션을 퇴사하면서 던전 키퍼와는 거의 인연이 없어진 것으로 판단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피터 몰리뉴는 또 다른 갓 게임인 '블랙앤화이트'를 제작했고, '페이블' 시리즈의 제작도 맡으면서 점점 더 많은 게임을 만들면서 던전 키퍼와는 다소 멀어졌습니다. 현재는 '레거시'라는 게임을 제작하고 있습니다. 그의 작품들 속에서는 '던전 키퍼'에서 만들어두었던 개념과 디자인이 어느 정도 엿보이는 부분도 있긴 하죠. 하지만 새롭게 작품을 시작할 것 같지는 않습니다. 애초에 EA가 저작권과 개발권을 모두 갖고 있는 상황에서, 아무리 원작을 디자인한 개발자라고 한들 접근하기는 쉽지 않죠. 어마어마한 애정이 있어도 쉽게 시작하기 힘든 일입니다.



피터 몰리뉴는 현재 '레거시'라는 게임 제작에 매진하고 있습니다.

그래도 '던전'을 운영하고, 침략자를 막아내는 게임의 형태는 앞서 언급했듯이 영향을 받은 게임들이 많습니다. 권악징선의 컨셉도 이제는 꽤 자주 찾아볼 수 있죠. 던전 키퍼는 이러한 영감을 많은 유저들과 개발자들에게 줄 수 있는 기념비적인 게임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이미 안 좋은 리부트의 경험도 있었던 데다가 앞서 언급했듯이 원작자 피터 몰리뉴도 던전 키퍼와는 매우 멀어진 상태라, 리메이크나 리부트의 가능성은 적습니다. 그래도 던전 키퍼를 그리워하는 개발자들과 유저들이 있고, 정신적 계승작도 있었으니 가능성이 없다고는 보지 않습니다. 15년 만에 새 시리즈가 나오는 게임도 있잖아요?

대부분의 명작 게임들과 마찬가지로 던전 키퍼는 애초에 잡아둔 컨셉도 명확하고 시스템도 잘 정립되어 있습니다. 억지로 BM를 추가하면서 괴롭게 만들었던 모바일 버전을 반면교사 삼는다면, 과거처럼 끝없이 탐닉하고 사람을 끌어들이는 마력적인 플레이를 살려낼 수 있다고 봅니다.

물론 EA가 이런 리메이크와 리부트에 있어서는 적극적인 행보를 보이지는 않는 편입니다. 확실하게 집중하고 있는 게임도 있고, 꽉 잡고 있는 분야도 있으므로 이런 리부트는 꽤 큰 도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도 꾸준히 인디 게임 등의 분야도 지원하고 있는 만큼, 가능성은 열어둡시다. 지금도 꾸준히 '과거의 IP'가 주목받고 있는 시대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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