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한국 신화 게임이 되리 #7 땅끝 그 이상의 문화, 해남

기획기사 | 김수진 기자 | 댓글: 7개 |



많은 게임들이 나라별, 대륙별 유구한 역사의 신화를 다루고 있습니다. 한국도 땅은 좁지만 수많은 신화와 민담, 전설이 있는 나라입니다. 중국 삼국지나 북유럽, 그리스 신화처럼 스케일이 거대하진 않지만 아기자기한 맛이 살아 있는 민담과 전설이 많이 있죠. 인벤에서는 한국 신화의 게임이 많이 나오길 기원하며 지역별 설화를 소개해 드리는 코너를 마련했습니다.

  • 지역 : 해남군(Haenam-gun)
  • 현황 : 면적: 1,031.4㎢ / 인구: 67,410명
  • 설명 : 백제 때 해남에는 새금현(塞琴縣)·황술현(黃述縣)·고서이현(古西伊縣)이 설치되었으며, 신라 경덕왕 대 침명현(浸溟縣)·황원현(黃原縣)·고안현(固安縣)으로 바뀐다. 고려에 이르러 침명현이 해남현(海南縣)으로 개칭, 처음으로 해남이라는 지명이 등장했다. 조선 초 직촌화 과정에서 황원군(黃原郡)·죽산현(竹山縣)과 통합되면서 현재의 해남이 시작됐다.

  • [해남군 지역 설화] # 흔히 땅끝마을로만 알고 있는 해남은 우리가 너무나 존경하는 이순신 장군과 관련이 있는 곳입니다. 고작 13척의 배로 명량해협(울돌목)에서 일본 수군 133척을 대파한 명량대첩의 배경이 바로 이곳, 해남이죠. 전라 우수영이 있던 곳 역시 해남이고요. 뿐만 아닙니다. 대흥사와 미황사, 달마고도 등 아름다운 문화유산과 자연이 자리하고, 여기에 명량대첩축제, 초의문화제 등 의미있는 축제도 다수 즐길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번 답사를 통해 해남이 이런 수많은 문화유산을 아주 잘 관리하고, 또 알리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는 걸 느낄 수 있었습니다. 기사 내 활용된 역사와 설화는 직접 답사한 정보와 디지털해남문화대전, 국가문화유산포털,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서 인용한 내용을 혼합해 사용했습니다.




    우수영 사람들과 명량대첩의 민초 이야기

    ● 국가지정문화재 사적 해남 전라우수영
    ● 지역: 전라남도 해남군 남문길 25-2





    해남군 문내면 서상리에는 조선시대 전라우도 수군의 본영, 전라우수영 유적이 존재한다. 현재 전라우수영 유적 내에는 우리나라 수군진성 중 가장 큰 규모인 석축 성곽과 각종 군사 시설의 흔적이 남아 있다.

    국가지정문화재 사적 제535호로 지정된 해남 전라우수영은 군사적 요충지이자, 이순신 장군이 이끈 수군이 명량대첩에서 큰 승리를 거둔 곳이다. 그만큼 우수영 일대의 사람들은 임진왜란 당시 나라를 구한 충신들을 크게 존경하며, 그들에 대한 이야기를 입에서 입으로 전해오고 있다.

    우수영 주민들은 이순신 장군, 그리고 이억기 장군과 김억추 장군을 매우 존경하고 있는데, 이억기 장군은 임진왜란 당시 전라우도수사로, 이순신 장군을 도와 일본군과 싸운 인물이다. 그러나 칠천량해전에서 일본군에게 패하자, 패전한 장수는 살 수 없다며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김억추 장군은 명량해전에서 이순신 장군을 따라 대승을 거둔 장수다.




    전라우수영 및 명량대첩과 관련해 전해오는 이야기는 여기서 끝이 아니다. 나라를 구한 장군들 만큼이나 충과 효, 애향심을 가진 주민들에 대한 이야기도 함께 내려온다.

    문헌에는 명량대첩 당시 울돌목에서 이순신 장군이 열두 척의 배로 일본 수군을 대파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하지만 해남 주민들 사이에는 다른 이야기가 전해 온다. 명량대첩 당시 조선 각지에서 일본군과 싸우기 위해 모여든 배가 모두 4,000척이 넘었으며, 조선의 백성들은 무기가 없어 방망이를 깎아 적군과 싸웠다고 한다.




    다만, 문헌에 이순신 장군이 피난선 100여 척을 전선으로 위장해 뒤에서 성원하게 했다는 기록은 있지만 어선 4,000척이 함께 싸웠다는 기록은 없다. 결국 해남 주민들 사이에 내려오는 이야기는, 명량대첩의 승리에 민초들의 희생과 단결이 중요한 원동력이 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이라 볼 수 있다.

    한편 이순신 장군은 명량대첩에서 대승을 거둔 다음 날, 전열을 정비하기 위해 전라남도 무안의 다대포로 장소를 옮겼다. 그런데 장군이 우수영을 비운 사이, 남아 있던 일본군들이 들어와 우수영을 불바다로 만들어 버렸다. 이때 우수영 주민들도 많은 피해를 입었는데, 주민들은 슬픔을 이겨 내고 충과 효, 애향심으로 성을 복원하는 데 앞장섰다고 한다.


    땀 흘리는 이순신 비석

    ● 국가지정문화재 보물 해남 명량대첩비
    ● 지역: 전라남도 해남군 문내면 동외리 955-6





    해남군 문내면 동외리에는 명량대첩을 승리로 이끈 이순신 장군의 공을 기념하기 위해 세운 '명량대첩비'가 있다. 1685년부터 1688년까지 3년에 걸쳐 세워진 비로, 지금은 충무사 옆 해남 우수영문화마을 한 가운데 높은 바위 언덕에 위치하고 있다.

    이 명량대첩비는 1942년 3월 일본에 의해 강제 철거돼 경복궁 근정전 뒤뜰에 묻히는 수모를 겪었는데, 해남 주민들의 노력으로 해방 후인 1945년 11월 발견, 1947년 해남 해안 지역으로 옮겨 세울 수 있었다. 이후 2011년 3월 현재의 위치로 이전했다.




    명량대첩비가 이러한 수모를 겪은 데에는 일본과 관련된 전설이 관계되어 있다. 일제강점기, 해남 주민들 사이에서는 명량대첩비가 땀을 세 번 흘리면 일본이 망하고 조선이 독립한다는 이야기가 전해오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친정에 가던 여인이 명량대첩비에 땀이 흐르는 것을 발견하고 수건으로 비석을 깨끗이 닦았다. 이후 한 농부가 일을 마치고 집에 돌아가는 길에 비석에서 땀이 흐르는 것을 보고 젖은 수건으로 비석을 닦았다.

    비석이 두 번이나 땀을 흘렸다는 말을 들은 일본인들은 비석이 한 번만 더 땀을 흘리면 일본이 망할 수도 있다는 위기의식을 느껴 아무도 모르게 비석을 철거해 버렸다. 해남 주민들은 기금을 마련하여 비석의 행방을 찾았으며, 서울 경복궁에 묻혀 있던 것을 발견해 해남으로 가지고 와 제자리에 세워 두었다.


    강강술래로 왜군을 쫓아낸 이순신

    ● 국가무형문화재 강강술래
    ● 지역: 전라남도 해남군





    성인 여성 여럿이 손과 손을 맞잡고 원을 그리며 노래하고 춤을 추는 강강술래는 한국 사람이라면 너무나 잘 알고, 또 친근한 놀이이자 무형문화재다. 강강술래는 주로 해남·완도·무안·진도 등 전라남도 해안 일대에서 성행되어 왔다. 민요와 민속무용이 일체화된 부녀자들의 놀이로, 주로 추석날 밤과 정월대보름날 밤에 행해진다.

    강강술래는 노래, 무용, 음악이 삼위일체의 형태로 이루어진 원시종합예술이다. 춤을 추는 여성들 중에서 노래 잘하는 한 사람이 설소리(앞소리)를 하면 모든 사람들이 뒷소리를 받는 선후창의 형태로 노래되며, 노랫소리에 맞춰 많은 여성들이 손에 손을 잡고 둥글게 원을 그리며 춤을 춘다.

    이러한 강강술래의 기원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전해지고 있다. 그 가운데 가장 대표적인 것이 바로 이순신 장군과 관련된 이야기다.

    임진왜란 당시 이순신 장군이 해남 우수영에 진을 치고 있을 때, 적군에 비해 아군의 수가 매우 적었다. 이에 이순신 장군은 마을 부녀자들을 모아 남자 차림을 하게 한 뒤, 옥매산의 허리를 빙빙 돌도록 했다.

    바다에서 이를 본 왜병들은 이순신 장군의 군사가 한없이 계속해서 행군하는 것으로 착각, 미리 겁을 먹고 달아나버렸다고 한다. 이후 근처의 마을 부녀자들이 서로 손을 잡고 빙빙 돌면서 춤을 추던 관행이 강강술래로 정착되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 이순신 장군이 채택한 의병술, 강강술래

    다만 강강술래는 원시시대의 부족이 달밤에 축제를 벌여 노래하고 춤추던 풍습에서 비롯된 민속놀이라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고대로부터 우리나라 사람들은 달의 운행원리에 맞춰 자연의 흐름을 파악했기에 우리나라 세시풍속에서 보름달은 가장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다.

    이에 달이 가장 밝은 추석날이나 정월대보름날이면 고대인들은 축제를 벌여 춤과 노래를 즐겼고, 이것이 정형화되어 강강술래로 전승된 것으로 보인다. 이렇게 전승된 강강술래를 이순신 장군이 의병술로 채택해 승리를 거둠으로써 널리 보급되고 더욱 큰 의미를 부여받게 되었을 가능성도 있다.


    물에 빠져 죽은 처녀 귀신을 쫓은 쑥

    ● 울돌목 처녀골 설화
    ● 지역: 전라남도 해남군 문내면





    해남에는 명량대첩의 배경이자 아직도 엄청난 물살을 자랑하는 명량해협, 울돌목이 있다. 서해와 남해를 연결하는 좁은 수로인 울돌목의 가장 좁은 부분의 폭은 약 293m이며, 조류는 사리(大潮) 때의 유속이 약 11.5노트, 가장 깊은 곳의 수심은 약 19m이다.

    울돌목은 고유어로, 빠른 물살이 암초에 부딪히며 소용돌이치는 물 울음소리가 20리 밖에까지 들린다고 해 지어진 명칭이다. 실제로 그 근처에 가면 무시무시한 소리와 함께 빠르게 휘몰아치는 바다를 볼 수 있는데, 해남군은 이러한 울돌목을 좀 더 가까이서 체험할 수 있도록 2021년 스카이워크를 개설했다.



    ▲ 울돌목의 물살을 가까이서 볼 수 있는 스카이워크

    어마무시한 물살 때문일까, 울돌목에는 안타깝고도 무서운 이야기가 전해져 온다. 옛날 한 처녀가 울돌목에 있는 고랑에서 해초를 뜯다가 그만 바다에 빠져 죽고 말았다. 예로부터 물에 빠져 죽은 사람을 바다에서 꺼내 땅에 묻어 주지 않으면, 귀신이 좋은 곳으로 가기 위해 자신 대신 다른 사람을 바다로 끌어들인다는 말이 있다.

    하지만 아마 이 처녀는 울돌목의 거센 물살로 인해 땅에 묻히지 못했던 게 아닌가 싶다. 제삿밥을 가지고 고랑으로 찾아간 동생들의 발을 혼백이 된 언니가 잡고 바다로 끌고 가려 했던 것이다.

    언니에게 발을 잡힌 동생들은 귀신이 잡아가려고 할 때 쑥대를 잡으면 귀신이 도망간다는 이야기가 문득 생각이 났더랬다. 이에 동생들은 주변에 있는 쑥을 잡았다. 그러자 귀신이 깜짝 놀라 손을 놓고 바다로 도망갔다. 이후 처녀가 죽은 고랑을 처녀고랑 또는 처녀골이라 불렀으며, 누구든 절대 혼자서는 가지 못하게 했다고 한다.


    커다란 검은 소가 누운 자리에 세워진 미황사

    ● 해남 미황사 창건 설화
    ● 지역: 전라남도 해남군 송지면 미황사길 164





    해남에는 산세가 뛰어나 달마대사가 머물렀다고 전해지는 달마산이 있다. 그리고 이 달마산 가운데에는 마치 그려놓은 듯한 아름다운 절, 미황사가 있다. 오래된 절들이 그러하듯, 미황사 역시 신비로운 창건 설화를 가지고 있는데, 이는 1692년에 지은 미황사 사적비에 남아 있는 기록이다.

    신라 경덕왕 때인 749년 어느 날, 돌로 만든 배가 달마산 아래 포구에 닿았다. 배 안에서 범패 소리가 들려 어부가 살피려 다가갔지만 배는 번번이 멀어져 갔다. 이 말을 들은 의조화상이 정갈하게 목욕을 하고 스님들과 동네 사람 100여 명을 이끌고 포구로 나갔다.

    그러자 배가 바닷가에 다다랐는데 금인(金人)이 노를 젓고 있었다. 배 안에는 화엄경 80권, 법화경 7권, 비로자나불, 문수보살, 40성중, 십육 나한, 그리고 탱화, 금환, 검은 돌들이 실려 있었다. 이를 본 사람들이 불상과 경전을 모실 곳에 대해 의논하자, 갑자기 검은 돌이 갈라지며 그 안에서 검은 소 한 마리가 나왔다. 소는 순식간에 커다란 소로 변했다.

    그날 밤 의조 화상이 꿈을 꾸었는데, 금인이 "나는 본래 우전국(지금의 인도) 왕으로, 여러 나라를 다니며 부처님 모실 곳을 구하였소. 이곳에 이르러 달마산 꼭대기를 바라보니 1만불이 나타남으로 여기게 부처님을 모시려 하오. 소에 경전과 불상을 싣고 가다 소가 누웠다가 일어나지 않거든 그 자리에 모시도록 하시오"라고 말했다.

    이에 의조 화상이 소를 앞세우고 가던 중, 소가 한 번 땅바닥에 눕더니 일어났다. 그러더니 산골짜기에 이르러 이내 쓰러져 일어나지 않았다. 의조 화상은 소가 처음 누던 자리에 통교사를 짓고, 마지막 머문 자리에는 미황사를 창건했다. 미황사의 '미'는 소의 울음소리가 하도 아름다워서 따온 것이고, '황'은 금인의 황홀한 색에서 따와 붙인 것이다.




    한편 미황사가 위치한 달마산 역시 재미있는 이야기를 가지고 있다. 선종의 시조가 되는 달마대사는 인도의 향지국에서 셋째 왕자로 태어났다. 이후 인도에서 중국으로 건너온 달마대사는 소림국에서 9년간 벽을 보고 수행한 후, 법을 전해주고 갑자기 사라졌다. 그리고 사라졌던 달마대사가 와서 머물렀던 곳이 바로 해남의 달마산이라고 한다.

    고려 시대에는 중국 남송의 고관들이 해남으로 건너와 주민들에게 달마산에 대해 물었고, 달마산에서 나고자란 주민들을 부러워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이들은 달마산을 보며 "역시 달마대사가 머물 땅이다"라고 한 뒤, 그림으로 그려 돌아갔다고 한다.


    유배 길에 대흥사 현판을 새로 쓴 추사 김정희

    ● 국가지정문화재 사적 해남 대흥사
    ● 지역: 전남 해남군 삼산면 구림리 766번지 등




    ▲ 이광사가 쓴 대흥사 대웅보전 현판

    해남 두륜산에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어 있는 아름다운 산사, 대흥사가 있다. 깊이 펼쳐진 긴 숲길을 따라 찬찬히 걷다 보면, 어느새 산골짜기를 흐르는 시냇물을 끼고 자리 잡은 대흥사가 보인다.

    해남에서 절대 놓쳐서는 안 될 절, 대흥사는 신라 하대에 창건된 사찰로 서산대사와 초의선사 등 이름만 들어도 알 만한 고승들의 숨결도 느낄 수 있는 곳이다. 그런 대흥사에는 몇 가지 이야기가 전해 내려오는데, 그 중 두 가지를 소개할까 한다.

    먼저 우리가 너무나 잘 알고 있는 명필, 추사 김정희와 관련된 이야기다. 추사 김정희가 제주도로 유배를 가는 길에, 초의선사와 차를 마시기 위해 해남 대흥사에 들렀다. 당시 대흥사 대웅보전에는 조선을 대표하는 또 한 명의 서예가, 원교 이광사가 쓴 현판이 걸려있었다.

    그런데 이게 웬걸, 이광사가 쓴 대웅보전 현판을 본 김정희는 "어떻게 이런 부족한 글씨를 걸 수 있단 말인가?"라고 탄식했다. 그리고는 이광사의 현판을 내리고 자신이 직접 쓴 대웅보전 현판을 걸라고 말했다. 이때 김정희는 대흥사 무량수각의 현판 역시 함께 썼다.

    제주도에서의 8년 남짓한 유배 생활을 마친 후, 김정희는 돌아가는 길에 다시 대흥사에 들렸다. 유배 생활 동안 많은 깨달음을 얻었던 까닭에, 지난날 이광사의 현판을 내리게 했던 자신의 행동을 반성하며 이광사가 썼던 현판이 아직 보관되어 있는지 물었다. 이광사가 쓴 대웅보전 현판은 다행스럽게도 그대로 보관되어 있었고, 김정희는 자신의 행동에 사과하며 다시 이광사의 현판을 걸게 했다고 한다.

    물론 전해오는 이야기인 만큼, 현판과 관련된 이 에피소드가 진짜인지는 알 길이 없다. 다만 대흥사 대웅보전에 가면 지금도 이광사가 쓴 현판을 볼 수 있다. 동시에 김정희가 쓴 무량수각 현판 역시 확인할 수 있으니 이 이야기를 알고 간다면 훨씬 깊이 있게 현판을 볼 수 있지 않을까.



    ▲ 대흥사 천불상

    대흥사와 관련된 두 번째 이야기는 천불상을 모시고 있는 전각, 대흥사 천불전의 건립과 관련된 내용이다. 대흥사 승려가 천불전을 짓기 위해 한 목수를 불렀다. 그런데 목수는 몇 달 동안 건물은 짓지도 않고, 목침만 깎는 게 아닌가. 이에 승려는 '언제 건물을 올리려고 목침만 깎고 있나'라는 생각과 함께 목수 모르게 목침 두 개를 숨겨두었다.

    잠시 후 승려가 목수에게 가 보니, 목수는 짐을 싸고 있었다. 승려가 절을 짓지 않고 가는 이유를 묻자, 목수는 "이제까지 목침을 다 깎았는데, 두 개가 부족하다"며 이는 자신의 정성이 부족한 것이기에 부처를 모실 법당을 지을 자격이 없다고 말했다.

    깜짝 놀란 승려가 사과와 함께 숨겨 놓은 목침을 돌려주자, 목수는 못질 하나 없이 오직 나무로만 천불전을 지었다고 한다.



    ▲ 나무로만 지어졌다는 대흥사 천불전



    인물


    ● 충무공 이순신 (본관 덕수, 1545~1598)
    ● 지역: 해남 충무사





    이순신 장군은 조선시대 무신으로, 임진왜란 중 위기에 처한 나라를 구한 영웅이자, 지극한 충성심, 숭고한 인격, 위대한 통솔력 등을 갖춘 인물로 대한민국 국민에게 가장 존경받는 위인 중 한 명이다.

    이순신 장군은 1545년에 태어나 1598년에 사망했다. 1643년(인조 21) 충무라는 시호를 받았고, 1659년(효종 10)에는 남해의 전적지에 비석이 세워졌다. 1707년 아산에 세워진 이순신 장군의 사당에 ‘현충(顯忠)’이란 호가 내려졌으며, 1793년(정조 17)에는 영의정으로 추증되었다.

    4형제 중 셋째로 태어난 이순신 장군은 충효와 문학에 있어서 뛰어났을 뿐 아니라 시재에도 특출났으며, 정의감과 용감성을 겸비하였으면서도 인자한 성품을 지녔다. 유성룡의 징비록에 의하면, 이순신 장군은 어린 시절부터 큰 인물로 성장할 수 있는 자질을 갖추고 있었다.

    관직에 나간 이순신 장군은 47세가 되던 1591년, 전라좌도수군절도사가 되었다. 곧 왜의 침략이 있을 것으로 생각한 장군은 이에 대비해 전선을 제조하고 군비를 확충했다. 이듬해인 1592년 임진왜란이 발발한 뒤, 옥포·노량·당포·당항포에서 연전연승을 거듭했다.

    한산도 앞바다에서 학익진을 쳐 대승을 거둔 한산대첩과 적들이 요새화한 부산포에서도 대승을 거둔 이순신 장군은 남해안 일대의 적군을 완전히 소탕하고 1593년 삼도수군통제사가 되었다. 하지만 정유재란이 일어난 뒤 조정의 명령을 거역했다는 죄로 잡혀가 문초를 당했다. 이후 원균이 대패하자 통제사에 재임용된다.



    ▲ 울돌목을 바라보고 있는 이순신 장군

    당시 남은 군사는 120인에 병선은 12척이 고작이었다. 여기에 일반 백성들이 나중에 가져온 한 척이 더해져서 13척이 되었다. 그러나 이순신 장군은 실망하지 않고 적에게 맞서 싸우겠다 결심한다. 8월 15일, 13척의 전선과 적은 병력을 거느리고 명량에서 133척의 적군과 맞서 31척을 부수는 큰 전과를 올린다. 명량대첩이라 불리는 이 전투를 통해 제해권을 다시 찾고 조선 수군을 재건한다.

    그리고 운명의 1598년 11월 19일, 이순신 장군은 노량에서 퇴각하기 위해 집결한 500척의 적선을 발견, 명나라의 수군 제독을 설득해 공격에 나선다. 함대를 이끌고 물러가던 일본군은 맹공을 감당하지 못하고 많은 사상자를 내게 된다.

    하지만 선두에 나서 수군을 지휘하던 이순신 장군은 애통하게도 적의 유탄에 맞아 사망하게 된다. 죽음의 순간 "싸움이 바야흐로 급하니 내가 죽었다는 말을 삼가라"며 조용히 눈을 감았다. 부음이 전파되자 모든 백성들이 애통해했다고 한다.

    이순신 장군은 임진왜란에서 나라를 구한 영웅으로 숭배돼 통영 충렬사, 여수 충민사, 아산 현충사 등에 배향되어 있다. 해남에는 명량대첩의 승전을 기념하는 명량대첩비와 함께 우수영 충무사에 위패를 모시고 있으며, 해남 용정사에서도 이순신 장군을 배향하고 있다.



    ▲ 이순신 장군의 위패를 모신 우수영 충무사


    ● 서산대사 휴정 (본관 완산, 1520~1604)
    ● 지역: 해남 대흥사




    ▲ 서산대사를 기리는 대흥사 경내 표충사

    서산대사는 임진왜란 때 전국에 승첩을 돌려 승군을 조직하고 왜군과 싸워 큰 공을 세운 조선 후기의 승려다. 법명은 휴정으로, 오랫동안 묘향산에 살았기에 서산대사라는 별호를 얻었다. 1520년 평안도 안주에서 태어났으며, 진사과 낙방 후 지리산에서 숭인장로를 만나 출가했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관군이 패퇴하고 선조는 의주로 피난한다. 이때 선조는 묘향산으로 사신을 보내어 나라의 위급함을 알리고 서산대사를 불렀다. 나라를 구할 방법을 묻는 선조에게 73세의 서산대사는 "늙고 병들어 싸움에 나아가지 못할 승려는 절을 지키게 하면서 나라를 구할 수 있도록 부처에게 기원하도록 하고, 나머지는 자신이 통솔하여 전쟁터로 나아가 나라를 구하겠다"고 답했다.

    그리고 곧 전국에 격문을 돌려서 각처의 승려들이 구국에 앞장서도록 했다. 전국 각지에서 일어난 의승군이 5,000명이나 되었다. 서산대사는 직접 1,500명의 의승군을 통솔, 명나라 군사와 함께 평양성을 탈환하는 데 성공했다. 선조가 서울로 돌아오자, 묘향산으로 돌아가 나라의 평안을 기원했다.

    이후 서산대사는 1604년 1월 묘향산 원적암에서 설법을 마치고 "80년 전에는 네가 나이더니 80년 후에는 내가 너로구나[八十年前渠是我 八十年後我是渠]"라는 시를 적어 유정과 처영에게 전하게 하고 가부좌하여 앉은 채로 입적했다. 그의 나이 85세, 법랍 67세였다. 입적한 뒤 21일 동안 방 안에서는 기이한 향기가 가득했다고 한다.



    ▲ 서산대사의 행적을 기록한 서산대사 표충사 기적비

    해남 대흥사 경내에는 서산대사의 흔적을 느낄 수 있는 장소가 많다. 우선 임진왜란 당시 나라를 위해 헌신한 서산대사를 기리기 위해 정조의 명령으로 건립한 표충사가 있다. 이곳에는 서산대사의 행적을 기록한 서산대사 표충사 기적비도 위치하고 있다.

    또한 대흥사 내 성보박물관에는 서산대사의 유물을 전시하고 있는 서산관이 따로 있다. 유물관 안에는 서산대사가 쓰던 물품을 비롯해 승병을 이끌며 사용했던 승군단 표지, 소리나팔, 호패 등도 전시되어 있다.


    ● 초의선사 의순(본관 인동, 1786~1866)
    ● 지역: 해남 대흥사





    초의선사는 간신히 명맥만 유지하던 우리나라의 다도를 중흥시킨 인물로, '다성'이라고도 불린다. 대흥사 13대 종사의 한 사람인 대선사이며 법명은 의순, 초의는 호다. 강가에서 놀다가 물에 빠진 것을 지나가던 스님이 건져 준 일이 인연이 되어 6세 때 나주 운흥사에서 출가했다.

    초의선사는 선교의 학문뿐 아니라, 유학, 도교 등에도 조예가 깊었으며 범패와 서예, 시, 문장에도 능했다. 다산 정약용, 추사 김정희, 자하 신위 등 당대의 대학자나 사대부들과 폭넓게 사귀었고, 100여 명이 넘는 후학을 양성했다.




    하지만 그중에서도 초의선사의 가장 큰 업적은 바로 다도 중흥이다. 차는 삼국시대부터 우리나라에 전래돼 주로 불가의 학승들을 중심으로 발달했고, 지리산을 중심으로 하는 호남과 영남지방은 차나무가 자라는 데 풍토가 알맞았으므로 우리나라 차의 본고장이 되어 왔다. 그러나 조선시대 불교가 밀려나면서 다도도 쇠퇴해 겨우 명맥만 이어지고 있었다.

    초의선사는 차와 선이 한가지라는 다선일미(茶禪一味) 사상을 바탕으로 다도의 이론을 정리하고 차를 만들어 널리 펴면서 전래의 차 문화를 중흥시켰다. 정약용이나 김정희와의 사귐에서도 학문과 예술, 차의 향기가 함께 했음은 물론이다. 중년 이후에는 일지암을 짓고 40여 년간 은거하며 차와 더불어 지관에 전념하다 81세로 입적했다.

    한편, 초의선사의 다도 정신을 선양하고 계승·발전시키기 위해 1992년부터 초의선사 입적일인 음력 8월 2일에 초의문화제가 매년 개최되고 있다. 대흥사 일원에서 진행되며, 다도와 관련해 관광객들도 참여할 수 있는 다양한 이벤트가 열리니 다도에 관심이 있다면 꼭 한 번 문화제에 참여하는 걸 추천한다.


    ● 해남윤씨 가문의 대표적 인물, 윤선도와 윤두서
    ● 지역: 고산 윤선도 유적지




    ▲ 윤선도와 윤두서의 작품을 볼 수 있는 고산윤선도박물관

    윤선도와 윤두서는 해남윤씨 가문의 대표적 인물로, 윤선도의 증손자가 윤두서다. 고산 윤선도는 조선시대 여러 벼슬을 역임한 문신이자 국문학의 최고봉으로 평가받는 문인이다. 그의 증손자인 윤두서는 정선, 심사정과 함께 조선 후기 삼재로 손꼽힌 문인화가다.

    윤선도의 시문집으로는 정조 15년 왕의 명을 받아 전라감사 서유린이 간행한 고산유고가 있다. 정조 22년 전라감사 서정수가 윤선도 본가의 목판본을 참고해 개편, 간행한 것이 오늘날 전하는 고산유고다.

    고산유고는 6권 6책이며 어부사시사, 산중신곡, 산중속신곡, 몽천요, 우후요 등의 시조를 포함해 병진소와 국시소 등 시정에 관한 상소문, 논예소, 예설 등 예학에 관한 논의 등 역사적, 국문학적으로 귀중한 자료들이 담겨 있다. 특히 윤선도가 73세에 쓴 논예소는 조선조 예학논쟁의 발단이 된 글로, 효종의 죽음에 계모후 자의대비 조씨가 상복을 몇년 입어야 하느냐에 대한 논의를 담고 있다.



    ▲ 해남윤씨 가문의 고산 윤선도 유적지

    윤두서는 벼슬을 포기하고 일생 전체를 학문과 시서화로 보낸 인물이다. 18세기로의 전환기에 활동하면서 그의 작품세계는 대체로 조선중기의 화풍을 바탕으로 하여 전통성을 지니는 동시에 18세기에 등장하는 새로운 경향의 선구자적 자리에 위치한다.

    윤두서는 산수화, 도석인물화, 풍속화, 동물화, 화조화 등 다양한 화목의 작품을 제작했고, 특히 말과 인물화를 잘 그렸다고 전해진다. 또한 농민들의 노동을 주제로 다수의 풍속화를 그리면서 실학이라는 새로운 사상과 시대의 개막을 알리기도 했다.

    두 사람의 정취는 해남에 위치한 고산 윤선도 유적지에서 느껴볼 수 있다. 유적지에는 고산윤선도박물관이 함께 자리하며, 이곳에는 해남윤씨 가문의 역사와 함께 윤선도 및 윤두서의 작품들도 전시되어 있다. 다만 아쉽게도 이번 답사 때는 가장 유명한 윤두서 자화상을 비롯해 윤씨 가문의 작품들은 관람이 막혀있어 아예 확인할 수 없었다.



    아이템


    ● 대흥사와 성보박물관
    ● 소재지: 해남 대흥사




    ▲ 수많은 문화재가 있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대흥사

    해남 대흥사는 그 자체만으로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이지만, 그 내부 역시 수많은 보물과 문화재로 이루어져 있다. 뿐만 아니다. 서산대사와 초의선사, 13대종사와 13대강사 등 고승대덕들의 유산들도 가득하다.

    이에 대흥사 내에는 아예 이런 중요 문화재와 서산대사, 초의선사의 유품들을 한데 모아볼 수 있는 성보박물관이 존재한다. 하나를 꼽기에는 대흥사 내에 너무나 빛나는 문화유산들이 가득하기에, 해남의 첫 번째 '아이템'으로 '대흥사', 그리고 그 내부의 '성보박물관'을 선택했다.



    ▲ 대흥사 내 다양한 문화재를 볼 수 있는 성보박물관

    대흥사 내에는 국보로 지정된 북미륵암 마애여래좌상을 시작으로, 천불전의 천불상, 대웅보전의 석가여래삼불좌상, 서산대사를 기리는 표충사, 초의선사를 기리는 초의탑 등 수많은 문화재가 존재한다.

    또한 6개 관으로 분류된 성보박물관에는 국가지정문화재인 보물 7종, 금동여래좌상, 탑산사동종, 묘법연화경목판, 영산회상괘불도, 사가록정선, 화상당명병서, 교지가 전시되어 있다. 성보박물관 내에서 서산관과 초의관 역시 만나볼 수 있다.


    ● 달마산 미황사
    ● 소재지: 해남 미황사




    ▲ 3년간 해체보수공사에 들어간 미황사 대웅전

    해남의 또 다른 아름다운 산사, 달마산 기슭에 자리한 미황사 역시 절 그 자체가 해남 불교문화의 핵심을 이루는 문화재다. 미황사는 우리나라 육지 가장 남쪽에 있는 사찰로, 통일신라 때인 749년 처음 지었다고 한다.

    미황사 대웅전, 응진당, 미황사 괘불탱이 보물로 지정되어 있으며, 미황사 일원이 명승으로, 대웅전 목조석가여래삼불좌상, 명부전 목조 지장보살삼존상 및 시왕상, 응진당 목조 석가여래삼존상 및 나한상이 전라남도 유형문화재로 등록되어 있다.

    미황사 전체가 매우 아름답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멋들어진 건 108 계단을 오르면 마주할 수 있는 천왕문, 그리고 그 뒤로 보이는 자하루다. 누각과 함께 달마산이 마치 한 폭의 그림처럼 펼쳐진다.

    다만 아쉬운 건, 현재 미황사 대웅전이 3년간 해체보수공사에 들어가서 그 모습을 볼 수 없다는 점이다. 미황사 대웅전은 조선건축의 걸작으로 평가받는 건물로, 보물로 지정되어 있다. 하지만 대웅전 벽화 및 단청에 대한 보존처리가 필요해 2022년 3월부터 해체보수공사를 시작했다.


    ● 윤두서 자화상
    ● 소재지: 해남 고산윤선도박물관




    ▲ 고산윤선도박물관에서 찍을 수 있는 윤두서 자화상

    윤두서가 직접 그린 자화상으로, 크기는 가로 20.5cm, 세로 38.5cm다. 전신사조의 이념을 구현한 작품으로, 비장미를 통해 현실과 괴리감에서 나오는 지식인의 내면적 갈등을 표현했다. 동시에 마치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는 것처럼 세밀하고 정교하다.

    종이에 옅게 채색하여 그린 자화상에서 윤두서는 윗부분을 생략한 탕건을 쓰고 눈은 마치 자신과 대결하듯 앞면을 보고 있다. 두툼한 입술에 수염은 터럭 한올 한올까지 섬세하게 표현되어 있다. 또한 음영과 혈색을 통해 얼굴 전체를 매우 입체적으로 그려냈다.

    조선시대 초상화 대부분이 주인공의 복식에 많은 부분을 할애해 그의 지위가 나타내는 풍모를 드러내려 했다면, 윤두서의 자화상은 얼굴을 부각하여 그의 내면을 적극적으로 표현하고자 했다.

    상반신이나 전신을 그린 초상화가 일반적이었던 조선시대에, 윤두서의 자화상은 그림의 구도나 표현형식, 기법 등에서 매우 독창적인 양식을 보이는 걸작으로 평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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