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전 격투 게임', 살아남으려면?

기획기사 | 정재훈 기자 | 댓글: 34개 |
사람이 적다
한때, 타워 디펜스류를 무척 좋아했다. 그나마 살아남은 '랜타디'류가 아닌, 유즈맵 시절에 유행하던 타워 디펜스 계열. 몇 시간이고 앉아서 자세를 풀지 않고 플레이했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녹스'도 좋아했다. 지금도 가끔은 녹스 멀티플레이를 하고 싶다. 비교적 최근으로 오면 '이볼브'도, '스타워즈 배틀프론트'도 좋아했다. 결과적으로 지금은 다시 느끼기 어려운 추억들이다.

생로병사의 흐름은 비단 생물에게만 적용되지 않는다. 모든 산업, 문화, 콘텐츠와 미디어가 모두 생로병사를 겪는다. 병에 걸린 게임은 인기가 사라지고, 인기가 사라지며 늙은 게임은 어느 순간 사멸한다. 자연스러운 흐름이다. 작게는 게임 하나에서, 크게는 장르, 혹은 플랫폼 전체가 그렇게 될 때도 있다.

같은 맥락에서, 나는 '대전 격투 게임'도 좋아한다. 모탈컴뱃으로 처음을 겪었고, 지금도 철권8을 플레이하고 있다. 게임 산업의 여명기부터 지금까지 이어져오고 있는, 확고한 영역을 구축한 장르. 하지만, 산업 전체를 두고 볼 때 대전 격투 게임의 미래는 영 빛이 보이지 않는다. 가끔은 그런 생각을 한다. 타워 디펜스처럼, 혹은 이볼브와 녹스처럼, 대전 격투 게임도 수명이 그리 오래 남진 않았을지 모른다는 생각 말이다.

판매량이, 그리고 플레이어 수가 이를 뒷받치는 근거가 된다. 2022년을 기준으로 '스트리트 파이터' 전 시리즈의 총 판매량은 4,900만 장. 철권 시리즈가 5,400만 장이었다. 스트리트 파이터6와 철권8이 출시되기 이전이니 지금은 좀 다른 숫자가 나오겠지만, 두 시리즈에 속한 수많은 넘버링 작품들의 판매량을 전부 합쳐도 GTA5의 판매량을 조금 웃돌 뿐이다.

동시 접속자의 수도 이를 방증한다. 스팀 기준 스트리트 파이터 시리즈의 최고 동접이 7만 언저리, 철권은 5만 남짓이다. 다른 격투 게임을 모두 살펴봐도 최고 동시접속 10만을 넘긴 게임이 없다. 배틀그라운드가 3백만을 달성하고, 팰월드가 2백만을 뚫었으며, 지금도 상위권 게임은 최소 수십만을 기록하는 지표다. 콘솔 플레이어의 수를 합치면 좀 더 나아지겠지만, 장르를 뒤엎을 정도의 수치는 아닐 거다.



▲ 어떻게 봐도 대세라 보기엔 모자라다


어렵게 만드는 것이 아니다. 쉬울 수가 없다
이유야 너무나 명백하다. 나도 알고, 게이머도 알며, 개발사와 퍼블리셔들도 다 안다. 대전 격투 게임은 어렵다. 게다가 복합적으로 어렵다. 쌓아야 할 지식, 다른 게임의 수 배로 몰려오는 패배감을 받아들일 수 있는 마음가짐, 눈을 감아도 쓸 수 있을 정도로 숙달해야 할 기술들, 그리고 오랜 세월 묵으며 쌓인 그들만의 문화와 감성까지 이 모든 것들이 신규 게이머에겐 어렵기만 하다.

그렇다고, 게임을 쉽게 만들 수도 없다. 캐릭터 상성이나 밸런스를 제외한 어떤 특전도 없이 공평한 환경에서의 1:1대전이라는 노골적인 게임 디자인 상, 실력의 우위를 가를 수 있는 기준은 늘 명명백백히 존재해야 한다. 게임의 디자인 핵심 요소가 진입 장벽이 되버리는 상황이니, 신작이 발표되어도 이 장르에 적응하는 극소수의 신규 유저를 제외하고는 늘 비슷한 게이머들만 남는다. 수많은 게이머 계층에서도 가장 투쟁적인 사람들 말이다.

수준이 높아질수록, 그 격차는 아득히 벌어진다. 이세돌의 착수에 담긴 의미를 일반인과 프로 바둑 기사가 서로 다르게 느끼는 것 처럼, 대전 격투 게이머들은 고수가 될 수록 수많은 것들을 읽고 대비하며 좁혀지기 어려운 격차를 만들어낸다. 더 무서운 건, 이들이 이를 의식적으로 생각하지 않아도 경험과 연습에 따른 본능으로 인지한다는 거다. 예시 영상을 보면 어떤 건지 이해할 수 있을 거다.

▲ 유튜버 'oyo'의 철권 대전 분석 영상, 최상위권 게이머들이 본능적으로 어떤 것들을 계산하는지 엿볼 수 있다.

당연히 개발사도 이를 알고 있고, 차기작은 마치 약속한 것처럼 더 쉬운 게임을 만드는 것을 지상과제로 삼았다. 도움은 좀 된 것 같지만, 결과적으로 크게 바뀐 건 없다. 이전엔 신규 유저가 어떤 게임인지 알기도 전에 접었다면, 이제는 알고 나서 접는 정도다. 보조 시스템이 유저의 실력을 뛰어넘어버리면 게임의 근본 자체가 흔들리니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결국, 이대로는 미래가 뻔하다. 격투 게임을 즐기는 유저들의 나이대는 시간이 갈수록 높아지고 있다. 오락실의 전성기 시절, 동네 형들에게 돈 좀 뜯기고 의자가 날아다니던 아비규환을 보던 소년들이 하나둘씩 애아빠가 되고 있는 지금까지도 게임을 하고 있다. 다른 게임은 10대 프로게이머가 흔하지만, 격투 게임계에서 10대는 고수만 등장해도 판 전체가 떠들썩해지는 빅뉴스다.



▲ 게임도, 유저도 다 같이 늙어가는 상황

이쯤에서, 이런 생각을 해 봤다. 대전 격투 게임을 즐기는 이들은 점점 줄어들고, 판매량도 이름값에 비해 높은 편이 아니다. 하지만, 굳이 많이 팔리고 많이 해야만 명맥이 이어지는 걸까?


그 어떤 게임과 비교해도, 나은 점이 있다
UFC로 유명한 MMA(종합격투기, Mixed Martial Arts)는 꽤 인기 있는 스포츠 산업이다. 직접적인 폭력을 다룬다는 점에서 생활 체육이라 할 수는 없고, 도장형 무술이 스포츠화 된 산업에 가깝지만, 어쨌거나 전통에 가까운 구기 종목에는 밀리지만 확실한 팬층이 존재한다. 아마, MMA만큼 직관적인 스포츠가 없기 때문일 거다. 관객들은 실시간으로 선수들의 펀치와 킥 교환을 볼 수 있으며, 표정과 움직임에서 선수들의 상황을 파악할 수 있다. 누가 유리하고 누가 불리한지, 어떻게 승리했고 패배했는지를 확실히 볼 수 있는 만큼, 그냥 채널을 돌리다 우연찮게 보게 된 이도 한동안 경기를 볼 수 있을 정도로 MMA의 흐름은 빠르고 확실하다.

물론, MMA가 단순하고 쉽다는 뜻은 아니다. 깊게 파고들면 이 또한 다른 스포츠 못지않게 복잡하며, 고차원적인 전술이 오간다. 견제와 움직임으로 만들어내는 심리전, 교묘한 셋업과 피니시 블로로 이어지는 콤비네이션, 그리고 수준 높은 그래플링 공방과 방어 기술들은 왜 저 선수들이 프로로서 활동하는지를 명확하게 보여주는 부분이다. 모든 스포츠가 그렇듯, MMA또한 아는 만큼 더 재미있다. 약간의 차이라면 MMA는 전혀 모르고 봐도 꽤 재미있다는 점이다.



▲ 아는 만큼 더 보이지만, 전혀 모르고 봐도 볼 만한 MMA

과거, 가끔 오락실에서 플레이하던 내가 본격적으로 대전 격투에 빠져들게 된 계기도 이 때문이다. 재밋거리가 너무 없었던 2000년대 말을 군대에서 보낸 내가 유일하게 즐길만 했던 취미가 사이버지식정보방에서 철권6 대회를 보는 거였다. 솔직히 기술도 잘 몰랐고, 캐릭터도 잘 몰랐으며, 선수들의 고차원적인 심리 공방도 전혀 알 길이 없었지만, 그냥 보는 그 자체가 재밌었다. 호쾌했으며, 누가 이기는지도 확실했고, 어떻게 이겼는지도 보였으니까.

대전 격투 게임이 다른 어떤 게임과 비교해도 나은 부분이 바로 이 점이다. 이 장르는, 직접 플레이하고 적응하기까지 굉장히 어렵지만, 보고 즐기는 건 너무나 쉽다. 그냥 별 생각 없이 봐도 시작부터 승패가 갈리는 순간까지 명확하게 인지할 수 있으며, 그 과정이 지나치게 길지도 않다. 현존하는 대부분의 격투 게임 대회가 본선부터 결승까지 짧으면 하루, 길어 봐야 이틀이면 우승자가 가려진다.

당연히 개발사와 게임 산업도 이를 알고 있고, 대전 격투 게임은 이를 향유하는 유저에 비해 대회 횟수가 꽤 많은 편이다. 오랜 전통의 EVO, 철권의 TWT(테켄 월드 투어)와 스트리트파이터의 캡콤 프로 투어가 대표적이며, 그 외 작은 대회는 셀 수 없이 많다. 국내에서도 유명한 격투 게임 프로게이머들이 활동할 수 있는 이유는, 각각 상금 규모는 작아도 대회 자체가 상당히 많기 때문일 거다.



▲ 플레이하긴 어렵지만, 보고 즐기기엔 찰떡같이 어울리는 장르


누구나 쉽게 할 수는 없지만, 쉽게 볼 수는 있으려면?
하지만, 이 또한 갇혀 있다. 대전 격투 게임의 대회도 아직까진 그들에 의해 소비된다. 대회를 보는 대부분이 격투 게임의 팬층이며, 한때 게임 좀 했던, 혹은 지금도 그 게임을 하는 이들이다. 누구나 쉽게 보고 즐길 수 있다는 게 대전 격투 게임이 지닌 몇 안되는 강점 중 하나인데 말이다. 이 관객의 폭만 충분히 넓혀도, 대전 격투 게임이 명맥을 이어가는 건 그리 어렵지 않을 거다. 정부 주도의 엘리트 체육이 계속 명맥을 이어가고, 올림픽에서나 볼 수 있는 상대적 저인기 종목들이 꾸준히 선수를 배출하듯 말이다. 물론 그러기 위해서는 몇 가지 노력이 필요하긴 하다.

일단, 개념의 변화가 필요하다. '어차피 우리만 하니 보는 것도 우리뿐이다'라는 관점을 깨고, 하는 건 우리지만 같이 보며 즐기기엔 나쁘지 않은 게임이라는 내적 인식이 필요하다. 이는 게이머들이 각성해야 하는 것이 아니며, 선수들이 해야 할 일도 아니다. 개발사와 대회 주최측이 더 많은 이들에게 대회를 알리고 게임을 보는 재미가 어떤지를 알려야 한다.



▲ 알고 보는게 더 재밌다면, 보면서도 알 수 있는 장치가 있다면 더 좋지 않을까?

당장의 대전 격투 게임 e스포츠는 외부로 좀처럼 알려지지 않는다. 격투 게임 팬들이나 알음알음 알고 볼 뿐, 홍보가 너무나 부족하다. 게임 산업의 흐름을 가장 앞서 바라보는 기자들도 특별히 관심을 가지지 않으면 대회 개최 소식을 알기 어렵다. 딱히 알아달라는 제스쳐도 없으니, 당연히 취재 중요도도 떨어진다.

선수들의 서사나, 기술의 명칭에 대한 정돈, 대회 시스템 등도 보다 많은 이들이 접할 수 있게 정비가 필요하다. 오랜 세월 과정이 농축되며 쌓여온 문화와 전통은 마땅히 존중해야 하지만, 지금처럼 보는 이들만 보는 대회에서 더 많은 이들이 즐길 수 있는 무언가가 되려면 전체적인 시스템의 개선은 선택이 아닌 필수다.

아무것도 모르는 이라도 어느 정도는 공감할 수 있는 간단한 서사, 빠른 공방을 간추려 설명할 수 있는 중계 기술이나 관전 시스템의 구축 등 한 번에 전부 바꿀 수는 없더라도 조금씩 더 나아질 수는 있을 거다. 조기축구도 안 나가는 아저씨가 챔스 결승과 월드컵은 즐기는 것처럼, 직접 스틱을 돌리진 않아도 대회 자체는 즐길 수 있는 콘텐츠가 될 수 있을지 누가 알겠나.


아쉬워서 하는 말이다
솔직히 말하자면, 강력하게 주장하긴 어렵다. 대전 격투 게임이 가끔 비 올 때나 물이 들어오는 저수지가 되어 버린 건 하루이틀의 문제가 아니다. 다른 장르, 다른 게임들이 강을 이루고 바다로 나아갈 때 대전 격투는 언제나 고정된 팬층에 의해 소비되었고, 아무도 이를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하는 이들만 하는 게임, 재미있지만 굳이 남한테 권하고 싶진 않은 게임. 이 정도가 아마 현실적인 대전 격투 게임의 위치일 거다.

때문에, "대전 격투 게임이 살아남기 위해 이런 걸 해보면 어떨까요?"라는 이 기사의 주장 또한 그리 설득력이 없을 지도 모른다. 막상 개발사가 딱히 아쉽지 않은 상황일 수도 있고, 게이머들도 굳이 더 많은 게이머들과 이 재미를 공유하는데 관심이 없을 수도 있다.

하지만, 저수지도 가끔은 말라서 그 바닥을 드러낸다. 아직은 수심이 충분히 깊고, 큰 문제도 없어 보이지만 1년에 몇 cm씩이라도 꾸준히 줄어드는 저수지는 결국 물이 마르는 순간 그냥 흔한 분지가 되어버릴 뿐이다. 그리고, 난 이미 수많은 분지를 보았다. 이제는 더 이상 할 수 없는 게임, 추억 속 이미지로만 남아있는, 한 때 헤엄도 칠 수 있었던 저수지들을 아직 기억하고 있다.



▲ 한 때 잠도 안 자고 했지만 이제 하기 어려운 녹스 멀티플레이

그래서 한 번 쯤은, 이런 생각을 드러내고 싶었다. 대전 격투 게임이 말라가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에서, 앞으로 수십 년은 더 내게 즐거움을 주길 바라서, 그럼에도 아무 대책 없이 "이대론 망하니 대책을 마련하라"라고 호소만 할 수는 없었기에 최대한 가능성 있다 판단한 아이디어를 함께 말했다. 물론, 더 나은 해결책도 분명히 있을 거고, 어쩌면 멀지 않아 그걸 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 다른 장르와의 융합이라던가, 새로운 플랫폼 혹은 입력 체계의 등장이 그 열쇠가 될 수도 있을 거다.

다만, 계속 이어지길 바란다. 머나먼 과거지만, 게임 산업의 시작을 함께 한 원로격에 해당하는 장르로서, 그리고 지금껏 수많은 이들에게 즐거움을 주었던 장르로서 계속 남아 이어지길 바라는 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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