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닌텐도의 '라보'가 단순한 골판지 따위가 아닌 이유

기획기사 | 정필권 기자 | 댓글: 139개 |

조금은 난데없는 발표였다. 신작 라인업을 기대하던 사람들은 실망감을 감추지는 못했을 테지만, 미리 언급했던 그대로 '아이들이 좋아할 만한' 물건에 대한 소식이었다. 게임 소프트웨어 자체가 아닌 '놀이'라는 컨셉에 집중한 골판지 '라보(Labo)'는 닌텐도가 보여주는 방향성에 대한 제시이기도 했다.

닌텐도 스위치의 VR/AR 지원 여부는 그간 많은 관심을 받았다. 새로운 기술에 대한 도전, 그리고 버추얼 보이라는 실패작 사이에서 닌텐도가 재차 도전할 것인지도 말이다. 하지만 라보는 오히려 정 반대의 결과물로 탄생했다. 게임 외부에 있는 사용자를 게임으로 끌어오는 형태가 아니라, 게임 내부의 것이 현실의 물건으로 구현되는 형태로 말이다. 시장에 골판지를 활용한 제품은 이미 여럿 출시되었지만, 닌텐도 스위치의 기능과 소프트웨어를 접목하면서 자신들만의 아이디어 제품으로 승화시켰다.

▲ 겨우 골판지 따위에 즐거워하는 날이 올 줄이야


라보라는 '제품'이 가지는 의미
싸고 재미있는 놀이기구이자, 주변기기

라보가 게임을 밖으로 꺼내면서 내놓은 컨셉은 세 가지. 이러한 컨셉이 없었다면 라보는 단순한 골판지 제작품이 될 수 있었던 제품이 되었을 것이다. '만들고(MAKE)', '놀고(PLAY)', '발견하고(DISCOVER)'라는 단순한 골판지가 아니라 저가형으로 제작된 새로운 주변기기가 된 셈이다. 만드는 것에서 시작하여, 소프트웨어를 제작한 제품과 연동시켜서 놀며, 기기와 게임의 구조를 알게 되는 것이 목표다.

전적으로 아동층을 대상으로 하는 제품임에는 분명하나, 의외의 방향성은 인정해야만 한다. 동봉된 소프트웨어가 단순한 게임이라고 할지라도 아이디어 자체에 의미가 있다고 하겠다. 실제로 라보 공개 이후의 반응도 긍정적이다. 게임을 외적으로 활용한다는 방향은 자녀가 있는 게이머들이 긍정적인 시선을 보내는 계기가 되었으며, 사업적으로도 적은 기초 비용으로 추가적인 수익을 만들어내는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란 전망이 가능하다.



▲ 닌텐도는 라보를 골판지와 스위치로 만든 '놀이기구'로 정의한다.

"겨우 골판지 가지고 이렇게 호들갑을 떨 필요가 있나?"라고 반문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겨우 골판지 따위'를 어떻게 써먹느냐에 따라 시장 점유율이 변화되는 상황이 오기도 한다. 라보와 마찬가지로 골판지로 만들던 VR HMD '구글 카드 보드'를 생각해보자. 단순한 형태였지만 저렴한 가격으로 금세 점유율 60%(2016년 기준)를 넘는 기록을 세우기도 했다. 무언가를 체험하고자 했을 때, 타사 대비 저렴한 가격은 그 자체로도 무기가 된다.

특히, 골판지라는 소재의 특성상 추가적인 구매가 이루어질 수 있다는 점. 그리고 트레일러에 보여줬듯이, 다른 게임에도 적용할 수 있다는 점에서 골판지 이상의 의미가 있다. 즉, 한번 사면 끝인 제품이 아니라 다시 구매할 계기가 생기는 소모품의 성격을 띄며, 동시에 닌텐도가 아닌 다른 서드파티에서도 자사의 게임과 어울리는 라보들을 제작하여, 게임과 함께 판매할 가능성이 생겼다.



▲ 메뚜기, 뱀, 자동차 등등 이런저런 창작물들도 나오는 중이다 (트위터, @odonger2)


게임 콘텐츠를 현실로 끌고 나오기
경험을 제공해 줄 때의 방향성

시장 분석이나 제품 측면이 아니더라도 '라보'가 보여준 방향성은 의미가 있다. 최근 게이밍 경험의 전달은 '현실에서 게임으로'로 정리할 수 있다. 보다 현실감 있는 체험, 몰입도 있는 콘텐츠들을 제공하기 위해서 많은 시도가 있었고, 현재도 계속해서 새로운 기기들이 개발되고 있다. 하지만 '라보'는 사용자를 게임 속으로 끌어오는 경험보다, 게임이 사용자의 현실로 다가가는 방법을 택했다.

단순히 게임의 진행을 도와주는 것이 아니라, 게임과 외부 주변 기기와의 상호작용 자체가 하나의 놀이가 된다는 점이다. 라보 패키지에 동봉되는 소프트웨어는 라보를 이용한 게임이기도 하며, 라보 자체를 조립하는 설명서의 역할도 하고 있다. 즉, 주변기기의 조립부터 게임을 즐기기까지의 과정 전부가 놀이가 되는 셈이다.



▲ 조립부터 플레이까지 모든 과정이 '라보'를 통한 놀이가 된다.

이러한 놀이 과정을 통해서 라보는 스위치 화면 너머에서 현실로 구현된다. 그리고 동시에 게임은 현실과 접점이 생기게 된다. 가상과 현실의 중첩, 혼재를 의미하는 '파타포(Pataphor)'라는 개념에서 보자면, 별다른 기기 없이도 일상환경에서 게임으로 들어갈 수 있었던 Wii의 연장선이기도 하다. 사람이 기기를 통해 게임으로 몰입하는 것이 아니라, 도구를 '만들어내는 것'을 통해 게임이 현실에 구현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다만, 라보는 Wii 보다는 조금 더 발전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위모콘을 휘둘러서 가상의 공을 받아치거나, 펀치를 날리는 수준에서 벗어나, IR 카메라를 이용하여 파타포를 정교하게 구현했다. 바이크의 조작 그대로 우측 핸들을 당겨야만 가속이 되는 것과, 피아노 조작을 보면 Wii 시절보다 발전한 모습을 볼 수 있다.

주로 시각적인 요소를 통해 가상과 현실의 융합을 노리는 기술들과는 달리, 닌텐도는 간단한 소재를 통해 행동 자체를 가상과 현실의 경계를 무너뜨리고자 하고 있다. 살짝 과장되게 표현하자면, 현실에 가까운 가상과 가상에 가까운 현실의 차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기에 라보의 방향성은 기존과는 궤를 달리하고 있고, 나름의 충격을 준 것이다.



▲ 기술은 새로운 것이 아니지만, 화두는 새롭게 던졌다


'닌텐도 스위치' 그리고 '라보'의 미래
라보의 기반은 결국 '닌텐도 스위치'다

라보의 등장으로 닌텐도 스위치 이후 기기에도 현재의 조이콘 방식을 사용할 가능성이 늘었다. 라보의 패키지는 모델명 '토이콘' 뒤에 숫자가 부여되는 형태다. 즉, 이후로도 계속 시리즈를 출시할 예정으로 보인다. 트레일러에서 보여줬던 라보들도 있지만, 현재는 판매되지 않고 있다. 제품이 생산되는 기간은 판매량에 따라 달라지겠지만, 적어도 단기간에 끝날 프로젝트는 아니다.

또한, 라보를 장기적으로 활용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닌텐도 스위치의 수명 오래 유지되어야만 한다는 전제 조건이 붙는다. 후속 콘솔 기기나 나오더라도 조이콘과 본체로 나뉘는 형태를 유지해야만 한다. 매번 새로운 콘솔 기기를 선보일 때마다 조작계를 바꿨던 닌텐도가 처음으로 변화를 주지 않을 것이란 전망도 해볼 수 있다.



▲ 라보는 닌텐도 스위치라는 형태가 있었기에 가능한 제품이다

라보의 출시조차 이루어지지 않은 상황에서 성공 가능성과 이후의 전망을 예상하기는 성급한 면도 있다. 하지만 어찌 됐든 간에, 라보가 보여준 화두들은 모두 닌텐도 스위치의 기기적인 특성에 기반을 두고 있다. 그렇기에 두 제품은 서로에게 긴밀한 영향을 줄 수밖에 없다.

'버츄얼 보이', '파워 글러브'로 만들어진 주변기기 흑역사. 하지만 매번 독특한 아이디어를 선보였던 닌텐도는 골판지를 통한 '라보'로 우리를 다시금 놀라게 할 수 있을까? 그리고 단순한 골판지라고 하기에는 사업적, 기획적으로 의미가 큰 라보는 시장에서 어떤 의미를 만들어 낼까. 오는 4월, 닌텐도의 행보에 따라 골판지가 새로운 놀이기구로 자리 잡는 시기가 올지도 모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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