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안 봐도 알 것 같은데? 게임 속 익숙한 설정들

기획기사 | 허재민 기자 | 댓글: 37개 |



게임이 매력적인 이유는 무엇이든지 될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인간에서 요정, 동물, 무생물, 심지어 여자 친구까지 유저는 어떤 것이든, 어떤 상황이든 경험해볼 수 있다. 그리고 게임은 유저가 몰입해 플레이할 수 있는 매력적이고 신기한 상황을 만들기 위해서 디테일한 세계와 스토리를 구성한다. 이 게임 속에서 나는 어떤 역할인지, 어떤 행동을 해서 무엇을 이루어야 하는지 유저는 게임의 모든 요소를 통해서 이해하고, 몰입한다.

이렇게 개발자가 구성해둔 게임 속의 여러 가지 요소들은 배경에 대해 빠르게 이해하고 게임 플레이를 진행할 수 있도록 유저를 돕는다. 아무리 흥미로운 설정이 있다고 하더라도 게임은 소설이 아닌 이상 길고 긴 설명을 즐길 유저는 없을 테니까. 그래서 그렇게 된 걸까? 게임에 보다 빠르게 몰입할 수 있도록 하겠다는 목표하에 게임의 많은 부분들이 정형화되어왔다.

유행을 너도나도 따르는 데에는 분명 이유가 있고, 많은 사람들이 좋아하는 것을 따르는 것은 안전한 선택이다. 정형화된 방식은 목적을 이루기 위한 해결책 중 많은 사람들이 인정한 가장 최선의 방식이라는 뜻일 테니까. 그렇게 패션에서도, 영화에서도, 건축에서도, 그리고 게임에서도 익숙하게 느껴지는 '스테레오타입(Stereotype)' 요소가 만들어져왔다. 스토리를 안 봐도 알 수 있는 흔한 게임 속 설정에서 의문을 가지지 않고 받아들이게 되는 게임의 흔한 요소들까지 게임의 다양한 '스테레오타입' 요소들을 모아보았다.

주의, 다 보고 나면 게임 하나를 다 하고 난 것 같은 후유증이 남을지도 모른다.


신족과 마족의 치열한 전투가 일어난 뒤, 1만 년 후...

(비장한 음악이 울린다)
(어렴풋이 보이는 웅장한 성, 혼란스러운 전투의 모습, 고통받는 민간인들)

테르그란데(고풍스러운 이름) 대륙의 종말이 도래했다. 신족들은 세계의 평화와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마족과 싸웠으나, 오랜 시간 동안 평화롭게 살아왔던 그들은 그동안 정복을 위해 칼을 갈아온 마족들을 상대로 속수무책으로 스러졌다.
대 마법사 붉은 노을빛 아벤달레이아는 자신을 희생해 마족을 봉인했고...


벌써 스킵 버튼을 찾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되는 스토리의 도입부. 무엇이든지 될 수 있는 게임 속에서 우리는 좀 더 멋지고, 중요하고, 특별한 존재가 되길 바란다. 그렇기 때문에 세계를 결정짓는, 우주의 운명을 손에 쥔 주인공이 자주 등장하는 것 또한 특이한 일이 아니다. 주인공을 특별하게 만들기 위해서 게임의 스토리는 점점 더 범 우주적으로, 아주 시-리어스하게 구성된다. 주인공이 될 유저를 위한 밑밥을 깔고 병풍을 치는 거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세계관에 따라서 구성은 조금 달라질 수 있지만, 꼭 이름들이 아주 고풍스러워야 한다는 점이다. ~이아, ~델 등 이름부터 열심히 이건 '판타지'라고 분위기 메이킹에 열중한다. 라틴어나 스와힐리어 같은걸 좀 섞어주면 효과는 두 배.

물론 중세 판타지 설정만이 우리에게 익숙한 것은 아니다. 좀 더 과묵하고 비장한 느낌을 주는 것은 세기말이나 아포칼립스 이후의 세계. 자연이나 알 수 없는 힘에 속수무책으로 당해버린 인간의 싸움. 그 속에서 인류의 생존을 위해 싸워야하는 주인공까지. 끝까지 저항하는 소수의 인류, 폐허가 되어버린 문명, 생명이 살아가기 어려워진 세상도 우리가 자주 마주하게 되는 설정 중 하나다. 초자연적인 현상 외에도 자본이나 기술에 잠식된 디스토피아의 세계관도 익숙하다. 주인공이 조금 펑키한 스타일이거나 무섭도록 과묵한 스타일이면 금상첨화. 유저는 굳이 설명을 읽지 않아도 다 이해하게 된다.


이 세계를 구할 수 있는 건, 특별하신 주인공님 뿐이에요!




(눈을 뜨자 보인 것은 귀여운 얼굴의 소녀)

나: 으윽... 여기가 어디지. 난 이름밖에 기억이 안나...
귀여운 소녀: 드디어 눈을 뜨셨군요! 빨리 일어나요! 세계를 구할 수 있는 건 당신뿐이라고요!

(튜토리얼 시작)(아이디 입력)


주인공을 특별하게 만들 배경이 준비되면, 이제 유저가 등장한다. 생긴 게 어떻든, 어떤 세계관에 존재하든, 평범하든 비범하든 주인공은 언제나 '특별'하다. 특별한 사람이 주인공이 되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할지도 모르겠지만, 우리의 주인공은 언제나 특별한 상황에 놓여있다. 일반적인 인물이라도, 주인공의 상황에 놓여있다는 것만으로도 특별해진다. 좀비의 세계 속에 혼자서면 면역이 되어있거나, 가장 강력한 어떤(불, 물, 빛, 신, 어둠, 아무거나 원하는 것을 넣어보길) 힘을 타고났다던가. 세계에 이렇게 인재가 없어서야. 망해가는 세계에 이유가 없는 것은 아닌가 보다.

평범한 주인공이라도 그가 처한 상황은 전혀 평범하지 않다. 평균의 외모에 어느 구석 하나 잘난 게 없지만 이상하게 미소녀들은 주인공과 사랑에 빠진다. 왜 선택받았는지는 알 수 없지만, 세계를 구할 역할을 맡은 주인공이 되기도 한다. 게임은 굳이 평범한 주인공을 선택하고, 특별하게 만든다. 게임 속 평범한 주인공은 그렇게, 큰 노력 없이도 어쩔 수 없이, 자연스럽게 사랑받고, 선택되고, 주목받는다.

평범한데도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주인공. 굳이 평범한 주인공을 특별하게 만드는 이유는 유저들의 대부분이 지극히 평범한 사람들이기 때문일 것이다. 특별한 상황 덕분에 평범함을 벗고 대단한 존재가 되는 주인공은 현실에서보다 자유롭고, 특별하고, 대단한 존재가 되기를 원하는 사람들의 마음을 반영하고 있다. 판타지 소설에서 평범한 주인공이 이세계로 가서 특별해지는 설정이 많이 나오는 이유기도 하다.

잠시 진지해졌지만, 게임이기 때문에 가능한 설정이자, 많은 사람들이 게임을 하는 이유기도 하다. 누구보다도 강한 사람이 되기 위해서 캐릭터를 성장시키고, 그 세계에 중요한 선택을 하는 사람으로서 운명을 결정짓기도 하고, 현실 속 자신과는 다른 사람이 되어보기도 한다.


넌 나만 바라봐, 빠지지 않는 '조력자'




앞서 나온 나를 깨우는 귀여운 소녀처럼, 게임 속에는 꼭 나를 도와주는 조력자가 등장한다. 기왕이면 다홍치마라고, 예쁜 여캐가 자주 등장한다. 친절하게 튜토리얼을 진행해주는 것에서부터, RPG에서는 시작할 때 함께하는 '그나마' 좋은 캐릭터가 되어준다. 마법을 쓰는 귀여운 소꿉동창일 수도 있고, 활을 쏘는 엘프일 수도 있고, 딜과 힐이 둘 다 되는 만능 여캐일때도 있다.

RPG에서 가장 익숙한 요소지만, 그외의 게임에서도 조력자 캐릭터는 꼭 등장한다. 초반 퀘스트를 주는 NPC가 되거나, 세이브를 도맡아주는 포인트가 되기도. 꼭 다들 외모가 출중하고 별것도 없는 주인공을 무한하게 믿어준다는 것이 특징. 대단한 요소처럼 나를 치켜세우지만, 게임 플레이 튜토리얼을 진행할 때는 거의 미취학 아동을 가르치듯 하나하나 친절하게 안내해주는 존재다.

게임에 대해서 잘 아는 만큼 설명을 듣고 있자면 차라리 네가 세계를 구하는 게 쉽겠는걸, 이라고 반박하고 싶어지지만 그러려니 하고 넘기게 되는 그런 존재. 조력자는 시스템 문구로 게임 설명을 해서 게임 속의 세계에서 빠져나오게 되는 것을 막고 세계에 몰입한 그대로 대화하면서 룰을 배워나갈 수 있도록 해준다. 이제는 익숙해져서 시스템 문구와 같이 틀에 박힌 문장으로 받아들여지지만, 좀 더 게임에 몰입한 상태를 이어갈 수 있도록 한 설정이라고 할 수 있다.


엎친 데 덮친 격! 생존은 언제나 극한의 상황에서




[상황]
비행기를 타고 가다가 조난당했는데 먹을 것도 없고 마실 것도 없고 흉포한 동물들도 있는데 날씨는 왜 이렇게 눈보라가 치는 것인지 너무 춥고, 그 와중에 여기는 악의 소굴이 있어서 그걸 또 알아내야 하는 상황입니다. 아참, 여기는 좀비도 있고요, 참고로 당신은 좀비한테 물려서 빨리 구급약을 찾지 않으면 게임 오버 됩니다. 아시겠죠?
자, 그럼 투비컨티뉴드...


의식의 흐름으로 생존 게임의 요소들을 넣어놓고 보니 잊고 있었던 고전 시가가 떠올랐다. 나무도 바윗돌도 없는 산에 매에게 쫓긴 가토리 안과, 대천 바다 한가운데 곡식을 일천 석이나 실은 배가 노도 잃어버리고 닻도 잃고 돛 줄도 끊어지고 돛대도 꺾어지고 키도 빠지고 바람이 불어 물결치고 안개가 뒤섞여 자욱한 날에 갈 길은 천리만리 남았는데 사방이 어둑하게 저물고 천지가 적막한 가운데 해적을 만난 도사공의 안과....

생존이 중요한 게임은 꼭 유저를 극한의 상황으로 끌고 간다. 도대체 거기를 왜간 것인지 생각이 들 정도로 살기 어려운 상황. 역시 게임이라서 그런 것이지만, 마치 고문하듯이 유저가 생존하기를 바라면서도 생존할 수 없도록 트릭을 만들어낸다. 여기서도 살아남을 수 있어? 이 정도는? 이 정도는? 가끔 극단적인 생존 상황을 맞닥뜨리면 고통을 즐기는 것 같은 기분이 들기도.

하나의 파트로 뺄까 했던 스테레오 타입 중 하나가 '하지 말라면 하지마루요'였는데, 이런 위험한 상황에 처하게 되는 대부분의 원인은 주변에서 그렇게 하지 말라는데 하고, 가지 말라는 데를 가서 생겨난다. 주인공들이 주변의 목소리를 잘 들었어도 그런 일은 안 겪었을 거다. 물론 그런 주인공이기에 재미난 게임이 탄생한 것이지만. 그러니 실제 세계에서는 하지 말라면 하지 말자. 공포 영화에서도 혼자 막 나가는 사람들은 사망 플래그가 훤하지 않은가.



▲무서운데, 차 돌리자.

엎친 데 덮친 격, 극단의 상황은 유저로 하여금 생존을 위해 여러 가지 요소들을 사용해보도록 하고, 도전하고자 하는 욕망을 불러일으킨다. 우리가 경험하고 싶은 것은 판타지 세계 속의 사랑받는 주인공뿐만이 아니다. 게임의 어려움 속에서 우리는 극복하는 연습을 하고, 스스로를 위험에 빠트리지 않으면서도 값진 경험을 얻어갈 수 있다.


엄마, 아빠, 형, 공주님! 어디 갔어요? 사람 찾아 삼만리

집을 나와 아버지와 인연을 끊고 산 지 수십 년.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전보를 받았다. 그리고 내게 남겨진 거대한 저택. 어렸을 적 어렴풋한 기억이 나를 괴롭힌다. 아버지의 비밀, 그리고 저택의 비밀은 무엇일까.
나는 고향의 집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드라마에서 자주 보게 되는 출생의 비밀처럼, 게임 속의 인간관계도 복잡하기만 하다. 도대체 평범하지 않은 부모님, 비밀을 지닌 가족, 어디론가 떠나버린 형제자매, 지켜야 할 내 아이, 위험한 상황에 빠진 내 연인, 내가 구해야만 하는 납치된(심지어 여러 번) 공주님까지.




소중한 사람의 부재는 별다른 세계관에 대한 설명 없이도 게임에 대한 몰입도를 높인다. 내가 왜 이런 위험한 곳에 들어온 거지? 내가 왜 모험을 떠난 거지? 내가 왜 가업을 물려받아 일해야 하는 거지? 소중한 사람을 찾기 위해서, 그들의 뜻을 이어가기 위해서, 그들이 남긴 메시지를 이해하기 위해서.

주인공인 나를 움직이기 위해 게임 속 나의 지인들은 끊임없이 자신을 위험한 상황에 가져다 놓는다. 보물을 찾다가 실종된 아버지를 찾아 모험을 떠나기도 하고, 좀비 아포칼립스 속에서 만난 아이를 구하기 위해 끊임없이 투쟁하기도 한다. 갑자기 사라진 여자친구를 찾아 무서운 저택에 들어가기도 하고, 뿔난 거북이에게 끊임없이 납치당하는 공주님을 위해서 싸우기도 한다. 소중한 존재라는 이유만으로 우리는 게임의 설정을 쉽게 납득하게 된다.


NPC들은 손발이 없다




[NPC1]
와, 주인공님, 이야기 많이 들었어요. 우리는 모두 세계를 구할 영웅인 당신을 기다렸답니다!
그나저나 걱정이에요. 주변에 악령 거미들이 출몰한다는 소문이 있어서 양들을 풀어놓을 수가 없지 뭐에요.
하핫, 악령 거미 10마리만 잡아주신다면 사례를 하겠어요! 에이, 세계를 구하기 전에 시간 많으시잖아요?

퀘스트를 수락하시겠습니까? YES / NO


게임에서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알려주는 NPC들. 퀘스트와 보상을 주는 존재이자, 게임 스토리 진행에 등장하는 인물이기도 하고, 물약이나 장비를 파는 상인이기도 하다. 그들을 도와 세계의 평화를 가져오는 것은 나의 즐거움! 하지만 레벨업을 위해서 그들에게 말을 걸고 퀘스트를 수행하고 있노라면 아무래도 내가 영웅인지 심부름꾼인지 헷갈릴 때가 있다.

전단지를 벽에 5개 붙여달라는 것에서부터 뻔히 앞에 있는 약초를 구해달라고 하지 않나, 흉포한 몬스터를 잡아서 가죽이나 뼈 이빨을 가져달라고 하기도 하고, 사라진 아이를 찾아달라며 단서를 주기도 한다. 뿔뿔이 흩어진 닭들을 모아달라는 퀘스트를 얻고 지붕에 올라가기도 하고, 독에 쓰러진 사람들에게 약을 먹어달라는 퀘스트도 있다. 스토리에 중요한 퀘스트부터 이러한 잡다한 서브 퀘스트까지. NPC들은 손도 발도 없다.

그와중에 대화를 걸어보면 내게 대단한 인재라고 하거나, 세계를 구할 그 사람이라는 소문을 들었다고 말하기도 한다. 역시 세상을 구하는 것은 소소한 봉사에서부터 시작하는 것이라는 중요한 교훈을 주는 것 같다. 게임 속 영웅인 우리들은 가장 밑바닥의 가장 하찮은 잡일을 하면서 영웅이란 모두의 심부름꾼이 되는 것이라는 값진 메시지를 얻어간...

는 무슨, 영웅이 될 인재라고 해놓고 감히 내게 잡일을 시켜? 앗, 장비를 좋은 걸 주잖아? 다녀올게!


특별하지 않은, 그렇지만 특별한 경험을 위하여




영화에서도 그렇지만 게임 속 주인공들은 많은 '보정'을 거친다. 이미 게임 오버가 되어도 다시 시작할 수 있다는 점에서 사기적인 보정이 들어간 것이지만. 흔히 말하는 주인공 버프, 앞서 이야기한 정형화된 게임의 갖가지 요소들은 모두 좀 더 재밌는 경험을 선사하기 위함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틀에 박힌듯한 요소라는 인상을 주지만 그만큼 많은 유저들에게 쉽게 받아들여지고 사랑받은 부분이라는 뜻이기도 하다.

게임 속 스테레오타입은, 게이머라면 공유할 수 있는 게이머 포인트가 되기도 한다. '레디 플레이어 원'이나 '주먹왕 랄프'같이 게임을 소재로 한 영화나 애니메이션을 보면 조금씩 스며들어있는 게임의 요소들을 보면서 즐거워진다. 실제로 친구들에게 게임 속 뻔한 요소가 뭐가 있지? 하고 물어보니 다들 쉬지 않고 이야기를 풀어놓았다.

노출이 높아질수록 방어도가 높아진다든가, 오히려 적팀 버프가 있어서 우리 팀 캐릭터가 흑화하면 더 세지더라, 내가 필요한 건 꼭 안 나온다는 물욕 센서까지, 게임을 하는 사람이라면 공감할 수 있는 요소가 된다. 스테레오타입은 신선함을 줄 수는 없지만 그만큼 이해를 빨리 돕고 쉽게 받아들여진다는 점에서 장점이 있다. 스테레오타입과 신선함, 중요한 것은 이 모든 요소가 모여 만드는 하모니가 얼마나 효과적으로 즐거운 경험을 선사하는지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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