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수첩] 판을 키우는 양분은 진심과 공정입니다

칼럼 | 박태균 기자 | 댓글: 19개 |
e스포츠 각 종목마다 떠오르는 아이콘이 있다. 스타크래프트는 임요환, LoL은 '페이커' 이상혁, 카트라이더는 문호준, 철권은 '무릎' 배재민. 각 분야에서 전설을 쓴 이들은 본인이 플레이하는 게임의 판을 키우기 위해 많은 것을 희생하고 각고의 노력을 기울였다. 게임을 대하는 그들의 모습에서 진심과 사랑을 느끼는 건 전혀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최근 격투 게임계에서 발생한 일련의 사건은 위 관점에서 한참 벗어났다. 스트리트 파이터의 아이콘인 '인생은잠입' 이선우가 쏘아낸 한 발의 화살은 수많은 격투 게이머에게 크나큰 실망을 안겼다. 이선우가 사랑하는 건 스트리트 파이터 그 자체가 아니라, 스트리트 파이터를 통해 얻은 인기인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21일(일) 아프리카TV가 후원하고 이선우가 주최한 스트리트 파이터5 대회가 진행됐다. 공지에 주최 의도가 정확히 적혀 있지는 않았으나, '새싹 대회'라는 대회명과 랭크 최하위인 루키부터 울트라 브론즈 이하의 유저만 참가 가능하다는 조건은 누가 봐도 격투 게임 초보자들을 위한 대회임이 분명했다.

초보 대회가 늘 그렇듯 우승을 비롯한 최상위 입상은 결코 초보자로 보이지 않는 참가자들이 싹쓸이했다. 다른 격투 게임을 즐기던 유저들이 스트리트 파이터5를 잠시 연습한 후 대회에 참가했기 때문이다. 이는 분명 상도(常道)에 어긋나는 행위지만, 여기까지는 최소한의 이해가 가능했다. 분명 '타 격투 게임 고수 참가 금지'라는 규정은 없었고, '고인물'들의 거짓 참가는 초보 대회 특성상 완전히 뿌리 뽑을 수 없는 문제점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대회 종료 후 공개된 사실들로 인해 격투 게임 커뮤니티는 전례 없이 크게 불타올랐다. 우승자를 비롯한 '새싹 대회' 일부 참가자와 이선우가 디스코드 채널에서 나눈 대화 내용과 정황 때문이다.

'새싹 대회' 우승을 차지한 A와 준우승자 B는 이선우와 같은 KFGC 소속으로 그랑블루 판타지 Versus에서 마스터 계급을 달성한 유저들이다. 이선우는 이들에게 '루키인데 누가 봐도 골드 이상 실력이면 커버를 못 친다', '그랑블루 대회가 아니기 때문에 스파는 울트라 브론즈 이하면 상관없다'라는 등 대회에 참가하라는 뉘앙스의 메시지를 전달했다.

더군다나 A는 스트리트 파이터5 고수 유저와 경기를 치러 승리한 이력이 있었고, 이선우가 '랭크 매치를 돌리면 실버가 될 것 같다'라고 이야기한 B에게 '새싹 나가고 나서 랭매에 집중해라'라고 답한 사실도 공개됐다. 실버 랭크가 되면 참가 자격에 맞지 않게 되니 울트라 브론즈 랭크에 '주차'하는 걸 권유한 것이다.

이선우가 15일(월) 대회 관련 문의에 단 댓글도 도화선이 됐다. '위장 계급이나 부계정 등을 어떻게 판별할 것이냐'는 한 유저의 질문에 이선우는 '참가 선수들의 명단, 리플레이 등의 자료를 총합해 운영진의 재량 하에 판별하겠다'라고 확실히 못 박았었다. 그런데 대회 운영진인 이선우는 A, B의 참가를 자제시키기는커녕 참가를 부추겼다. 왜? 이선우 본인이 만든 '규정에 의하면' 그들의 대회 참가는 아무 문제가 없으니까.

A, B가 위장 계급이나 부계정이 아니란 건 확실하다. 하지만, 타 격투 게임 고수들의 참가는 '새싹 대회'의 취지와는 거리가 너무 먼 것 아닌가. 실제로 친구에게 스트리트 파이터5를 가르치다가 새싹 대회에 참가시켰다고 밝힌 한 유저는 "친구가 대회 경기를 치르는 것을 바로 옆에서 지켜봤는데, 2라운드에 계급에 어울리지 않는 실력자가 나오더라. 친구가 무기력하게 패배하는 모습을 보며 너무 안타까웠다"라며 아쉬움을 표했다.

이번 '새싹 대회' 사건의 일차적 문제는 대회 취지에 어긋난 유저들의 참가가 맞다. 그러나 모든 이력을 알면서도 그들의 참가를 허용하고, 아무 문제가 없다는 듯 대회를 마무리 지은 이선우의 행보는 결코 이해할 수 없다. 제멋대로 해석 가능한 규정을 만들고 본인만의 기준을 적용해 진짜 초보 유저들을 기만하는 얄팍한 술수를 부린 것이 아닌가. 심지어 A, B가 이선우와 같은 KFGC 소속이라는 점에도 눈살이 찌푸려졌다.

점입가경은 이선우의 사후 대처였다. 대회 종료 후 있었던 개인 방송에서 이선우는 거친 욕설을 내뱉으며 현재 본인이 처한 입장에 대한 불쾌감을 드러냈다. 또한 디스코드 채널과 SNS를 통해 자신을 비판하는 격투 게이머들을 비난하고 깎아내리기도 했다.

해당 발언들로 커뮤니티가 더욱 불타오르자 사건의 심각성을 알아챈 이선우는 급하게 입장문을 올렸다. 그러나 입장문의 내용은 본인의 행위에 대한 사과와 반성이 아닌 변명과 합리화 뿐이었다. 이후로도 격투 게이머들의 공분이 사그라들지 않자 이선우는 마침내 본인의 유튜브 채널에 사과 영상을 게시했다.

이선우는 분명 스트리트 파이터를 대표하는 아이콘이며, 격투 게임계에 영향력도 크다. 행동에 책임이 따르는 위치에 있는 인물로서 지난 이틀 간 보인 그가 행보는 다소 부적절했다. 이선우가 정말 스트리트 파이터를 사랑한다면 실수를 인정하고 문제점들을 보완해 더 발전적인 방향으로 나아가는 모습을 보여야 할 것이다. 격투 게임을 사랑하는 기존 유저들을 위해, 앞으로 격투 게임을 사랑할 새싹 유저들을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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