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 "스타가 인생을 바꿔놔..." 미국에서 만난 한국인 개발자 피터 리

김경범 기자 | 댓글: 27개 |
“스타크래프트가 제 인생을 바꿔놨죠.”


자리에 있던 모두가 “블심(?)으로 대동단결”한 골수 블리자드 팬이었기 때문이었을까? ‘블리자드 입사를 꿈꾸게 된 계기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돌아온 답변은 간단명료하면서도 공감을 할 수 밖에 없는 것이었다.

답변의 주인공은 한국인 출신의 블리자드 컨셉 아티스트 피터 리(Peter Lee). 블리자드 게임을 좋아하는 팬이더라도 익숙하지만은 않은 이름이지만, 일러스트를 보면 ‘아, 저거!’하고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 다양한 배경 원화가 그의 손을 거쳐 나온 작품들이다.






▲ 디아블로3의 신 트리스트람. WOW, 스타2, 디아3 등 주요 게임의 배경 원화 대다수가 그의 작품



그를 만나게 된 곳은 블리자드 본사 인근에 위치하고 있는 한 BBQ 하우스로, 판다리아의 안개 프레스 투어를 하루 앞두고 디아블로3 관련으로 알려진 아티스트 겸 개발자 제프 강, 본사 웹 팀에 근무 중인 사이먼 리 등 다른 한국인 출신 블리자드 직원들과의 자리를 가질 수 있었다.

사실 블리즈컨이나 공식적인 인터뷰를 통해 블리자드 본사에서 일 하는 한국인들을 만날 기회는 많았지만, 대부분 빡빡한 일정과 제한된 인터뷰 시간 때문에 게임과 관련한 질문을 하기도 힘들었던 게 사실이다. 그렇기에 평소 궁금했던 것들에 대해 다양하게 질문이 쏟아진 것은 당연지사.

주문한 식사를 기다리며 기자는 그동안 잘 알려지지 않았던 피터 리 개인에 대한 이야기와 블리자드와 관련한 다양한 에피소드를 들을 수 있었다.






▲ 미국에서 만난 피터 리. 인벤 이벤트였던 판다팬 1등 당선작을 들고 찰칵!




#1. 인생을 바꿔놓은 게임, 스타크래프트


피터 리가 블리자드에 입사한 것은 2005년도. 햇수로만 쳐도 7년이라는 긴 기간 동안 블리자드의 컨셉 아티스트로 활동했다. 참여한 작품만 놓고 봐도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 스타크래프트2 등 쟁쟁한 것들이고, 블리자드의 신작 MMORPG인 프로젝트 타이탄에도 벌써 3년째 참여해 작업 중이라고 한다.

입사하게 된 계기에 대해서 묻자 그는 입사 이전부터 블리자드 게임에 푹 빠져 있었던 골수팬이라고 고백하면서 학창 시절 있었던 이야기를 우리에게 소개했다.


“스타크래프트1이 발매 됐을 때 일인데, 학생 시절이라 가지고 있는 용돈이 적었지만 게임 패키지가 너무 갖고 싶었어요. 그래서 돈을 모아 용산에 있는 게임샵에 갔는데 패키지 가격이 딱 들고 간 돈 만큼이라 그걸 샀다간 차비도 안 남을 상황이었죠. 게임샵 아저씨한테 차비만큼만 깎아달라고 사정했지만 안 먹혀서 어떻게 할까 고민하다가 결국 돈을 다 써서 게임을 사게 됐습니다. 덕분에 집까지 두 시간이나 되는 거리를 걸어서 와야 했지만요.”


발품을 파는 수고 끝에 스타크래프트 게임 패키지를 손에 넣은 피터 리. 하지만 이 이야기에는 반전이 있었으니 막상 패키지가 있어도 집에 PC가 없어서 플레이를 할 수 없었다고.






▲ "패키지를 사왔건만 왜 하질 못해!". 게임은 샀지만 정작 집에 PC가 없었다는 피터 리의 이야기였다.



“결국 주말마다 친구 집에 패키지 들고 가서 걔네 컴퓨터로 게임을 했죠. 그러면서 친구한테 나중에 나도 이런 게임 만드는 회사에 들어갈 거다 하면서 얘기 했는데 지금 이렇게 블리자드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그야말로 스타크래프트가 제 인생을 바꿔놨죠.”


학창 시절 재미있게 즐겼던 게임 덕에 진로를 결정하게 되었다는 얘기에 기자 역시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2~30대 게임 개발자나 게임 업계 관계자 상당수가 ― 심지어는 기자 본인도! ― 학창시절 스타크래프트, 디아블로2, 워크래프트 시리즈 등 블리자드 게임의 마수에 빠져 정신을 차리고 보니 게임 관련 일을 하게 되었다는 것을 생각해보면 블리자드는 참 업보가 많은 회사가 아닐 수 없다.

이런 역사가 있다 보니 스타크래프트2가 나오자마자 피터 리가 빠져든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피터 리도, 제프 강도 그야말로 ‘애증관계’라고 표현할 정도로 게임을 좋아하는 만큼 실력이 늘지 않는다고.


“그래서 요샌 프로들 경기 위주로 보고 있어요. GSL 같은 건 경기 있을 때마다 직원들이랑 함께 꼬박꼬박 챙겨볼 정도고요. MLG 같은 해외대회와 GSL 중계하는 걸 보면 확실히 중계 스타일이 다른 게 느껴지는데, 같은 GSL 중계도 해외 중계진은 교전이 벌어져도 차분하게 설명하는 식인데 한국 중계진은 자기들이 먼저 흥분해서 분위기를 띄우거든요. 다른 직원들도 영어 중계 버전으로 보다가 한국 중계진 쪽에서 갑자기 함성이 들리면 무슨 일 있나 싶어서 궁금하게 생각하는데 해외 중계랑 한국 중계는 그 차이가 있는 것 같아요. 그래서 더 재미있고요.”






▲ 차분한 해외 중계와 달리 관중과 함께 폭발하는 한국 중계가 재미있다고...
(이미지 출처 : GOM TV GSL2012 S2)




#2. 든든한 동료, 블리자드 사람들 이야기


이야기가 진행되다보니 자연스럽게 블리자드 직원들에 대한 얘기로 화제가 옮겨갔다. 블리자드 아트에 대한 이야기도 나오긴 했지만 중점적으로 언급된 사람은 현 블리자드 크리에이티브 개발팀 부사장 크리스 멧젠이었다.

크리스 멧젠은 블리자드 초창기부터 컨셉 아트를 그리거나 각 게임들의 큰 시나리오를 잡는는 등 블리자드에서 히트한 모든 게임은 그에게서 시작이 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데, 프로젝트의 규모가 커지면서 그가 담당하던 컨셉 아트라는 일을 맡길 사람으로 자신이 ‘픽업’되었다고.






▲ 블리자드 게임의 어머니라고 할 수 있는 크리스 멧젠 크리에이티브 개발팀 부사장



지금은 샘와이즈 디디에를 중심으로 블리자드의 아트팀이 굴러가고 있지만, 피터리나 글렌 레인, 웨이 왕 등 친한 아티스트의 모임인 'Sons of the Storm'에 같이 소속되어 있을 정도로 블리자드 아트에서 크리스 멧젠의 비중은 아직 상당 부분 존재하고 있다고 한다.


☞ 블리자드의 쟁쟁한 아티스트들로 구성된 소모임 Sons of the Storm 홈페이지(링크)


“멋진 분이죠. 얼마 전에 회사 건물 밖에 서 있는데 그분이 차를 타고 지나치다 절 발견하고는 후진으로 돌아와서 ‘Hey, Peter, I love you!’ 하는 거예요. (순간 주변이 조용) 아, 이상한 의미가 아니라 그렇게 짧은 순간순간마다 직원들과 교감하면서 챙겨주시는 편이에요.”






▲ 블리자드의 쟁쟁한 아티스트들이 모인 Sons of the Storm에 속한 크리스 멧젠
피터 리 역시 드라군(Drawgoon)이라는 닉네임으로 한 축을 차지하고 있다.




그래서일까? 특유의 카리스마와 인덕을 갖춘 크리스 멧젠을 회사에서 많은 사람들이 따르고 있고, 그가 있기 때문에 블리자드에서 일을 하는 직원도 있다고 한다. 이야기를 하던 피터 리 자신도 우스갯소리로 ‘만약 그분이 블리자드를 나가서 새로운 시작을 한다면 함께 할 수 있을 것 같다’라고 할 정도였으니, 게임뿐만 아니라 블리자드라는 회사에서 크리스 멧젠이라는 인물이 갖는 위치를 짐작할 수 있었다.

개인적인 친분은 함께 자리한 제프 강도 만만치 않다고 하는데, 평소 ‘조리사들의 엄청난 실험정신이 돋보이는’ 회사 식당을 피해 같이 점심을 먹으러 다닐 정도로 돈독한 관계라는데, 주변에 있는 웬만한 가게는 다 가봤다고 이야기 하는 모습에서 왠지 모를 회사원의 비애(?)가 느껴지기도 했다.






▲ 팬아트 작가인 노동8호님의 캐리커처를 들고 있는 피터 리와 제프 강




#3. 개발자이기 전에 한 명의 게이머!


앞서 스타크래프트와 관련한 에피소드도 있었지만,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와 관련한 이야기도 있었다. 피터 리는 한때 북미 서버의 KPNS(Korean People Never Sleep)이라는 길드에서 활동한 적이 있다고 하는데, 그 서버 얼라이언스에게는 악명 높던 한국인 호드 길드였다고.

벌써 결혼 10년차에 아이까지 있는 유부남이라는 얘기를 들었기에 혹시 부인이 게임을 하는 걸 싫어하지 않느냐라고 묻자,

"집사람도 같이 WOW 했어요. 시작하게 된 건 알고 지내던 선배가 같이 하자고 해서였는데 다짜고짜 호드로 와서 오크로 하라는 거예요. 얼라이언스는 사람처럼 생겼는데 괴물처럼 생긴 호드가 마음에 안들어서 다른 종족 하면 안되냐고 했더니 ‘그러면 언데드를 해’라고 하더군요. 그래도 나중엔 그런 괴물들이 멋지다고 느꼈으니 이게 호드의 매력인 것 같아요.

집사람은 WOW를 배우는데 꽤 고생을 한 편인데, 예전에 버섯구름 봉우리 쪽인가에서 저랑 집사람, WOW를 하자던 선배 셋이서 퀘스트를 할 때 몬스터가 우르르 나오는 퀘스트 오브젝트를 건드려서 파티 중에 전멸을 한 적이 있었어요. 그때 화난 선배가 음성 채팅으로 잔뜩 혼내는 바람에 집사람이 화장실로 뛰어가서 엉엉 울기도 했고……. 그런데도 다시 하고……. 정작 끌어들인 선배가 접고도 계속 할 정도로 WOW에 대한 추억도 많은 편입니다."


라며 많은 와우저들이 바라는 이상 ― 여친이 와우저 ― 을 실제 이뤄낸 걸 자랑해 염장을 지르기도 했다.





▲ 기자에게 와우하는 여친은 영혼의 치유사 같은 존재입니다. 죽기 전엔 안보이거든요.




"레이드를 뛸 때는 크리스 멧젠이 직접 저와 동료인 글렌에게 '일 끝내기 전엔 퇴근 못한다!'라고 할 정도로 WOW에 빠졌으니까요."


부사장이 직접 나서서 이런 소리를 할 정도였으니 그야말로 골수 와우저. 문제는 야근을 하지 않기 위해서 미칠듯한 작업량을 업무시간에 뽑아내고 칼퇴근 후에 레이드에 참여할 정도라고 하니……나름 Win-Win?

옆자리에 앉은 제프 강에게도 혹시 WOW를 좋아하느냐에 대해 묻자 ‘……사실 저는 WOW는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라면서 자신의 WOW 경험에 대한 '썰'을 풀기 시작했다. 처음 게임을 시작했을 때 갓 생성한 저레벨 캐릭터로 주변 경치에 감탄했지만, 안타깝게도 오그리마의 비행선을 타면서 불행이 시작됐다고.


“완전 쪼렙인데 가시덤불골짜기에 떨어진 거예요. 마을을 나가려고 하는데 그때마다 악어가 물어죽이고, 부활해서 가는데 또 죽고. 계속 죽다보니 화가 나서 오그리마로 돌아가려고 했는데 그때는 귀환석이고 비행선이고 잘 몰랐거든요. 헤엄이라도 쳐서 칼림도어로 가려고 했는데 물속에 웬 물고기가 쫓아와서 절 물어죽이지 뭡니까.

근데 더 서러운 게 뭔지 아세요? 제가 그렇게 맞아죽는데도 다른 유저들이 안도와주고 멀뚱멀뚱 보기만 하는 거예요. 아마 10렙도 안된 캐릭이 40렙 지역에 와서 죽어대니 무슨 이벤트 같은건가 싶었겠죠. 결국 '내가 이 나이 먹고 뭐하는 짓인가' 싶어서 와우를 지웠는데 좀 지나고 나니까 또 하고 싶어지긴 하더라고요.“



결국 MMORPG와는 안 맞는다고 생각해서 선택한 것이 FPS인 배틀필드 시리즈. 아무 것도 모르던 시절 멀티 플레이를 하다가 매복에 걸려 죽은 자신을 부활하기 위해 포격이 쏟아지는 곳에서 농성하는 분대원에 감동해 푹 빠지게 되었고, 지금은 제법 알아주는 실력을 보여준다는 얘기에서 정말 게임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모인 곳이 블리자드라는 것을 새삼 깨달을 수 있었다.




#4. 게임계의 랄프 맥쿼리를 꿈꾸며

맛있는 식사와 재미있는 이야기가 오가는 사이 어느덧 밤은 깊어가고, 아쉽게도 헤어져야 할 시간이 찾아왔다.

헤어지기 전 마지막으로 던진 ‘언제까지 이 일을 하고 있을 것 같나’라는 질문에 대한 그의 답변은 '지난 3월 3일 타계한 스타워즈의 컨셉 아티스트 랄프 맥쿼리처럼 죽을 때까지 일을 하고 싶다'라는 것. 자신이 하는 일에 긍지를 가지고 있고, 그 일을 정말 좋아하지 않으면 쉽게 하기 힘든 말이다.






▲ 랄프 맥쿼리처럼 죽는 날까지 그림을 그리고 싶다는 피터 리와 제프 강




앞으로 한 달 반 남짓이면 디아블로3가 정식 출시된다. 그리고 계속해서 WOW 판다리아의 안개 확장팩이나 블리자드 도타, 군단의 심장, 그리고 신작 MMORPG인 프로젝트 타이탄 등의 공개될 것이다.

올해만도 우르르 몰려나오는 블리자드 게임에 내심 '어차피 WOW 확장팩이 나와봐야 레이드 돌고 장비 맞추면 또 지겨워서 말걸, 게다가 디아블로3는 디아블로2와 크게 다를 게 없잖아?'라고 이번에는 게임에 빠져 '생활이 없는 자' 업적을 찍지 않겠다고 다짐하는 기자.

하지만 보름 전에 만난, 자신이 즐기기 위해 재미있는 게임을 만들고 있다는 블리자드의 한국인 개발자들을 떠올리면서 오늘도 기자는 브통령의 벽을 넘기 위해 스타크래프트2를 실행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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