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룰러' 박재혁, "잊히지 않음에 감사해"

인터뷰 | 신연재 기자 | 댓글: 49개 |



국제 대회 취재가 즐거운 이유 중 하나는 해외 리그에서 뛰고 있는 한국인 선수를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경기장 안에서뿐만 아니라 경기장 밖에서도. 이번 MSI가 열리는 런던에서는 LCK를 떠난 지 얼마 되지 않아 더 반가운 얼굴, '룰러' 박재혁을 만났다.

징동 게이밍으로 이적한 이후 처음 만나는 '룰러'는 여전히 밝고 쾌활했다. 데뷔 이래 첫 MSI의 첫 번째 경기를 하루 앞두고 있었지만, 긴장감보다는 설렘과 기대가 느껴졌다. 친정 팀 젠지와의 대결 가능성에 대해 이야기할 때는 결과와 관계없이 몰아칠 감정을 걱정하는 인간적인 모습도 보였다.

이적 당시의 심경부터 징동에서의 봄, 처음 맞는 MSI, 친정 팀에 대한 생각, 한국 팬들의 여전한 구애에 대한 답장까지. 짧은 시간이지만, 알차게 담아본 '룰러'와의 인터뷰를 지금 바로 공개한다.


Q. 처음으로 친정 팀을 떠나 새로운 팀으로 이적했다. 스토브 리그 경험은 어땠나.

젠지를 나기로 결정하면서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는 상태라 불안한 게 많긴 했다. 예전부터 FA로 나가보고 싶다는 생각이 있었는데, '아무도 날 안 불러주면 어떡하지' 그런 걱정도 한켠에 있었다. 실제로 FA가 되니까 그게 더 심해지더라. 다행히 나를 원하는 팀들이 있었고, 내 실력을 인정받는 것 같아서 좋았다. 그 중 징동을 택한 이유는 멤버도, 조건도 굉장히 좋았기 때문이다. 결정 자체는 편하게 할 수 있었다.


Q. 징동이라는 새로운 팀, LPL이라는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는데 어려움은 없었나.

확실히 환경적인 부분에서는 태어나고 자란 한국이 좀 더 좋다는 걸 많이 느꼈다. 중국어는 아직 멀었지만, 그래도 게임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알고 플레이를 맞춰갈 수 있는 정도다. 그리고, 예전부터 LPL을 한 번 가보고 싶다는 생각이 많았다. 근데, 막상 와보니 내가 원하는 예전 LPL 스타일은 많이 사라졌더라. 전에는 합류도 되게 빠르고, 정돈되지 않은 한타도 많았는데, 지금은 LCK 같은 느낌이 많이 난다.


Q. 가자마자 정규 시즌 1위, 우승, 그리고 파이널 MVP까지 많은 것을 이뤘다.

잘 될 것 같다는 느낌은 있었지만, 가자마자 우승을 하게 될 줄은 몰랐다. 해도 서머 즘으로 봤다. 작년에 우승을 경험했던 게 정말 많은 도움이 됐다고 생각한다. 우승하는 법을 깨달은 것 같다. 실패를 많이 하면서 배운 것들을 토대로 성공을 한 번 하니까 그 성공을 통해 배운 건 훨씬 많더라. 또, 인게임적으로 어떻게 해야 챔피언 활용을 극대화할 수 있는지, 후반에 어떤 챔피언이 더 좋은지 많이 생각하면서 플레이를 하다 보니까 더 잘 됐던 것 같다.

파이널 MVP는 진짜 예상 못했다. 당연히 미드나 정글이겠다 싶어서 그냥 빨리 끝나길 기다리고 있었다. 근데, 갑자기 '미씽' 선수랑 '나이트' 선수가 'AD, 룰러, 룰러' 이러더라. 뭔 소리지 싶었는데, 파이널 MVP가 나였다. 다들 순수하게 엄청 축하해줬고, 그래서 되게 고마웠다.


Q. 그렇게 데뷔 8년 차에 처음 MSI를 진출하게 됐는데, 어떤가.

일단, 너무 아쉬운 건 내가 오자마자 MSI 방식이 바뀌었다. 이전에는 단판 경기를 많이 치른 다음 8강, 4강 이렇게 진행된 걸로 기억하는데, 이제는 다전제부터 시작해서 경기 수가 적다. 개인적으로 많은 경기를 통해서 경험치 먹는 걸 좋아하기도 하고, 경기를 계속 하면서 MSI 메타에 맞춰 성장을 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는 게 아쉽다.


Q. 대진이 좀 흥미롭다. LCK-LEC, LPL-LCS가 한쪽으로 몰리면서 한국 팀을 꽤 늦게 만나게 됐다.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했던 게, 우리 일정이 자칫 잘못하면 하루 연습하고 경기를 할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오도암네' 씨가 대진표를 너무 잘 뽑아줘서 연습을 더 하고 대회를 할 수 있게 됐다. 심지어 LCK 팀도 나중에 만날 수 있어서 너무 다행이고, 좋았다.





Q. 첫 상대는 골든 가디언즈다. 이전까지의 흐름으로 보면, 아무래도 징동의 낙승이 예상되는데.

나는 어느 팀을 상대로도 질 수도 있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 때문에 골든 가디언즈전도 어떻게 될 지 모르겠다. 1, 2일 차 경기만 봐도 LCK 팀이 승리하긴 했지만, LEC 팀이 진짜 이길 만한 세트도 나왔다. 확실히 모든 팀이 잘한다고 많이 느꼈다. 또, 개인적으로 언제나 라인전을 1순위로 놓고 있는데, 요즘 라인전이 조금 잘 안 되는 것 같다. 또, 상대 라인전 실력이 어느 정도인지도 잘 모르겠다. 그래서 이번엔 후반에 좋은 챔피언을 많이 뽑을 생각이다.


Q. 친정팀 젠지와의 대결이 성사될 것인지가 장안의 화제다.

젠지는 빨리 만나고 싶다. 만약 결승에서 만나서 이기게 되면 기분이 조금 많이 그럴 것 같다. 최대한 빠르게 만나서 이기는 게 내 마음이 덜 아프지 않을까 싶다. (그건 반대로 집에 빨리 보내게 되는 거지 않나.) 그렇긴 한데, 결승은 또 다른 문제다. 당연히 그 전에 이겨도 그렇겠지만, 결승 무대에서는 이기든 지든 뭔가 알 수 없는 감정들이 크게 느껴질 것 같다.


Q. 후임자 '페이즈' 선수와의 맞라인전은 어떨 것 같나. 트래쉬 토크서 자주 언급하더라.

그게 되게 억울한 부분이 있다(웃음). 내가 영상을 아예 안 봐서 이게 자막에 나왔는지 안 나왔는지 모르겠는데, 항상 관련된 질문이 먼저 있었다. 재미있게 포장하려고 그렇게 답변을 한 건데, 사람들은 이유 없이 '페이즈' 선수 이야기를 꺼냈다고 오해를 하더라. 억울하다고 먼저 말씀드리고 싶다.

그리고 '페이즈' 선수를 보면, 그냥 되게 신기하지 않나. 데뷔를 한 지 얼마 안 된 선수가 어떻게 그렇게 잘할 수 있는지. 되게 신기하고 놀랍게 봤다. 그래도 맞붙게 된다면 내가 충분히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한다. 또, 경기를 통해서 그 선수의 잘하는 플레이를 배우고 흡수하고 싶은 느낌도 있다.


Q. 세계 최상위권에 위치한 원딜 입장에서 '페이즈' 선수의 약점 같은 것도 보일까.

보인다. '페이즈' 선수가 한타 때 자기 몸을 먼저 밀어 넣어서 이니시에이팅을 걸거나, 상대를 밀어내는 스타일인데, 그러다가 가끔 넘어지는 그림이 좀 있었다. 대부분 너무 유리하다 보니까 그런 게 단순 실수에 그쳤는데, 국제 대회, 특히 4강이나 결승 같이 큰 무대에서는 그런 실수 한 번으로 이후 플레이가 위축되거나 심하면 경기가 넘어갈 수도 있다. 그런 부분을 좀 유심히 봐야 될 것 같다.


Q. LPL 콘텐츠 영상에서 '이제 오른손은 필요 없다. 왼손이 있으니까'라는 대사를 한 게 재미있었다. 오른손이 '쵸비', 왼손이 '나이트' 선수를 가리킨다고 알고 있는데, 두 월드 클래스 미드라이너를 모두 경험한 입장에서 공통점과 차이점은 뭐라고 생각하나.

'쵸비' 지훈이나 '나이트' 선수가 라인전을 잘하고, 라인전에 집중을 많이 한다는 인식이 있다. 근데, 둘 다 팀플레이도 굉장히 잘한다. 그런 게 공통점이고 차이점은 그 안에서도 '나이트' 선수는 팀을 도와주려는 움직임이 더 많이 있다. 반면에 지훈이는 선이 있는 것 같다. 이건 내가 가줘야 하고, 이건 내가 안 가줘도 되고. '나이트' 선수는 라인을 우선시해도 되는 상황에서도 더 팀을 도와주려고 한다. 그 정도의 차이가 있다.





Q. 이제 '룰러' 선수는 LCK를 떠나 LPL에서 뛰고 있지만, 여전히 많은 팬들이 '룰러' 선수를 애정하고 그리워한다. 이런 반응을 예상했나.

진짜 예상 못했다. 이게 되게 좀 기분이 그런 게, 해외에 나가면 잊힐 수도 있지 않나. 그런데, 나를 계속 그리워해 주시는 분도 있고, 다시 한국에서 보고 싶다는 분도 있고, 돌아오길 바라는 분들도 계시더라. 정말 감사한 마음이다. 제목에는 내가 생각 안 난다고 하고, 본문에는 그립다는 장문의 글을 남기는 밈도 몇 번 봤다. 재미있기도 했고, 진심으로 그리워하신다는 게 느껴서 좋았다.

많은 프로게이머들이 '어떤 선수로 남고 싶느냐'는 질문에 '잊히지 않는 선수가 되고 싶다'고 답하곤 한다. 어떻게 보면 나는 그런 프로게이머가 되고 있는 거다. 그게 진짜 감사하고, 더 잘하고 싶다는 마음이 생긴다. 내년에 어디로 가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계속해서 잊히지 않고 싶다는 생각이 많이 든다. 너무 감사하다.


Q. 이 자리를 빌려 팬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나.

내가 말을 잘 못하는데, 예전부터 궁금했던 게 있다. 팬분들이 왜 나를 이렇게까지 좋아해 주시고, 응원해 주시는지 항상 궁금했다. 단순히 게임을 잘하기 때문에 응원하기에는 뭔가 부족하지 않나. 나의 어떤 모습을 보고 응원해주시는 걸까.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이유 없이 응원해 주시는 거라는 생각이 들어서 더 감사하다고 느끼고 있다.

또, 중국에 오면서 SNS를 거의 안 하게 됐다. 일과가 끝나면 그냥 유튜브 좀 보다 잠들고 그런다. 그러면서 팬분들이 보내주시는 DM 같은 것도 잘 안 읽게 되더라. 죄송한 마음이 컸다. 일부러 읽지 않는 게 아니라는 걸 한번쯤 이야기하고 싶었다.


Q. 새로운 무대에서 새로운 도전을 하고 있는 올해, 특별히 이루고 싶은 목표가 있다면 뭘까.

예전에는 그냥 막연히 우승하고 싶다는 정도였는데, 지금은 조금 다르다. 팬분들이 나를 그리워하는 만큼 나 역시 팬분들을 뵙고 싶은 마음이 크기 때문에 모든 대회에 다 출전하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이번 MSI로 한 3~40% 정도 왔다고 생각하고, 남은 국제 대회도 모두 진출해서 우승하고 싶다. 그리고, 성적과 별개로 어떻게 하면 스스로 성장할 수 있는지, 어떻게 하면 팬분들이 나를 보고 행복할 수 있는 지를 끊임없이 생각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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