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슈] 드러누운 '거상'들

게임뉴스 | 정재훈 기자 | 댓글: 91개 |



5월 26일 오전, 하나의 제보를 받았다. 그는 18년 넘게 서비스되고 있는 온라인 게임 '천하제일상 거상(이하 거상)'의 게이머들이 운영 주체인 AK인터렉티브에 집단으로 반발하고 있으며, 관련된 가장 큰 커뮤니티인 네이버 카페 '파란만장 거상'이 폐쇄 조치에 들어갔다고 말했다.

여기까지는, 사실 흔한 일이었다. 라이브 서비스가 이어지는 게임에서 게이머와 운영 주체간의 갈등은 굉장히 흔하게 벌어지는 일이고, 이 와중 게이머들이 드러눕는 사례도 그리 드물지 않다. '거상'의 경우 서비스 기간이 오래된 만큼, 당연히 일어날 수 있는 일이다. 그래도 제보가 왔다면 일단은 조사를 하는 것이 인지상정. 카페를 둘러보면서 게이머들이 드러눕기 시작한 징후와 사건의 전개 과정을 파악하다 보니 생각보다 복잡한 상황이었다.



▲ 카페 '파란만장 거상' 내 'AK에 요청한다' 게시판의 모습

그리고, 일반적으로 게이머들이 운영 주체에 반발하는 과정과는 그 성격 또한 조금 달랐다.

먼저, 이번 사태의 상황을 간략히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 게임 내에 오토프로그램 유저와 작업장이 만연하면서, 게임 내 재화 가치가 교란되었다.

- 막대한 재산을 손에 쥔 이들은 게임 내 핵심 시스템인 상단과 물품의 시세 조정에도 개입했고, 극심한 인플레이션이 일어나는 등 일반적인 게이머들이 점점 게임을 하기 어려운 환경이 되었다.

- AK인터렉티브에 대한 게이머의 신뢰는 거의 없는 수준이며, 운영에 대한 말도 안 되는 음모론(불법 프로그램 유저가 프로그램을 반납하자 정지를 풀어줬다는 등) 또한 'AK라면 그럴 수도 있다'라고 생각할 정도로 불신하고 있었다.

- AK인터렉티브의 주 소통 수단은 공지 뿐으로, 게이머들과 직접적인 대화 등 적극적 소통은 수개월 간 이뤄지지 않았다. 또한, 문의에 대한 답변은 대부분 매크로로 이뤄졌다.

- 이에 카페 매니저가 더 이상 AK인터렉티브의 관리 소홀을 지켜볼 수 없으며, 게이머의 목소리에 대한 답을 달라는 성명문을 발표했고, 이 글이 곧 게이머 민심을 자극하는 촉매가 되어 '드러눕기'의 시작이 되었다.

해당 성명문: '이번 오토사태 관련하여 유저분들께 드리는 말씀' 바로가기(회원가입 필요)


여러모로, 다른 게임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특이한 부분들이 보였다. 가장 눈에 도드라지는 건 이 모든 것이 일어나고 있는 공간이 게임의 공식 홈페이지가 아닌, 게이머층이 자발적으로 만든 커뮤니티에서 벌어진다는 것이다. 이는 이 상황이 일어나기 이전에, 공식 홈페이지의 공신력이 얼마나 떨어지는지를 보여주는 방증이다. 실제로 거상을 오래 플레이해온 한 유저는 "공식 홈페이지는 몇 년째 공지 외 업데이트가 없다"라고 말했다.

일반적으로, 게이머들의 반발은 규모에 관계 없이 공식 홈페이지나 공식 커뮤니티에서 일어나기 마련이다. 운영 주체가 모니터링할 것이 분명한 곳들이고, 가장 쉽게 운영 주체와 접촉할 수 있는 공간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거상은 이 드러눕기조차 공식 홈페이지가 아닌 게이머가 주관하는 카페에서 진행되었다.



▲ 거상 공식 홈페이지에도 커뮤니티 기능은 존재한다.

어차피 공식 홈페이지에 글을 남겨 봐야, AK인터렉티브가 보거나 답변을 할리 없다는 것을 안 게이머들이 공론화라도 되게끔 사람이 많은 곳에서 드러눕는게 낫다는 것을 알고 있다는 뜻이다. 그리고, 실제로 공론화가 되었다. 내가 받은 제보가 그 증거일 것이다.

또 한 가지 거상 사태가 다른 게임들의 비슷한 사례와 다른 점은 민심이 폭발한 촉매의 성격이다. 일반적으로 '드러눕기'가 벌어졌던 상황들을 돌아보면, 대개 운영사의 실수가 시발점이 된다. GM이 망언을 했거나, 게임사 내부에서 비리가 있었다거나, 게이머 민심에 이반하는 업데이트가 강행되었다거나 하는 식이다.

하지만 거상의 경우 카페 매니저의 성명문이 민심을 폭발시켰고, 이 성명문에 게이머들이 그간 모르던 특별한 내용이 담겨 있는 것은 아니다. 앞서 다른 게임의 사례들이 흐르는 용암에 큰 칼을 푹 꽂아넣어 터지는 것과 비슷하다면, 이번 사태는 깃털 하나 내려앉았을 뿐인데 터졌다. 사태 이전에 게이머들의 민심이 이미 임계점에 이르러 있었다는 뜻이다.





이 모든 것은 AK인터렉티브의 '불통'이 빚어낸 결과다.

취재 중 이야기를 나누게 된 한 거상 게이머는 "몇 년 전 카페에 운영자가 앞으로의 운영 청사진을 발표한 적 있었고, 그때는 민심이 우호적인 방향으로 폭발했었다"라고 말했다. 비교적 최근인 2019년 7월 경에도, 개발진 중 한 명이 카페에서 게이머들과 적극적으로 소통하는 모습을 보인 바 있는데, 당시 댓글도 매우 우호적인 편이다. 하지만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모르지만, 2019년 여름 이후 AK인터렉티브는 유저와의 소통을 중지했다.

이후 민심은 지속적으로 나빠졌다. 지난 4월 경에는 게이머들이 AK인터렉티브의 재무재표를 파고들며 자본 구조를 파악하는 일도 일어났는데, 이 과정에서 AK인터렉티브가 게임 운영보다 부동산 사업에 주력하고 있으며, '거상'의 개발 및 유지보수를 하청업체에 위탁하고 있다는 의혹을 제시할 정도였다.

일반적으로, 회사의 사업 방향에 게이머가 왈가왈부하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엔씨소프트만 해도 야구단을 운영하고 있지만 게이머 중 이를 문제삼는 이는 거의 없다. 오죽하면 거상의 게이머들이 이런 부분까지 찾아낸 건 AK인터렉티브의 서비스 품질에 불만족을 느끼고, 이에 대한 나름의 이유를 찾는 과정에서 나온 부산물 중 하나일 것이다.



▲ AK인터렉티브의 재무재표를 분석하는 게이머들의 모습(출처: 유튜브 채널 '광말구')

그럼에도, AK인터렉티브는 사태가 터지기 전까지 공지와 매크로 답변 외의 입장 표명을 하지 않았다. 최초 사태의 촉매가 되었던 카페 메니저의 성명문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담겨 있다.

1. AK는 최근 공론화되고 있는 오토 사태에 대해서 어떻게 대처할지에 대한 명확한 청사진을 제시하길 바랍니다.

2. AK는 납득이 되지않는 태도로 유저분들에게 불편함을 준 부분에 대해서 확실한 사과를 바랍니다.


그리고 사태 발발 2일이 지난 지금까지, AK인터렉티브는 아무런 공식 입장도 내놓지 않고 있다.


AK 인터렉티브의 전략은 일관된 침묵이었지만, '침묵했다'라고 쓸 수는 없었다. 억지로나마 AK인터렉티브의 의견을 들어보고자 전화 통화를 시도했고, AK인터렉티브에 세 가지 질문을 남겼다.

Q. 커뮤니티 '파란만장 거상'에 올라온 카페 매니저의 성명문을 확인했는가? 확인했다면 이에 대한 답변은 준비하고 있는가?

AK인터렉티브: 파란만장 거상 까페는 30만 명이 넘는 회원을 보유한 거상 최대 팬 커뮤니티로 항상 모니터링하고 있기 때문에 폐쇄 당시부터 상황에 대하여 알고 있습니다. 조속한 시일내에 까페가 정상화 될 수 있도록 해당 까페 운영자와 직접 대면을 통한 이슈해소가 성명문 보다 빠를 것으로 판단하고 있습니다.


Q. 모든 사태의 원인이 된 오토 프로그램과 작업장에 대한 대응을 어떻게 해나갈 것인지 명확한 청사진을 제시할 수 있는가?

AK인터렉티브: 근본적인 오토 근절은 오토 프로그램에 지속적인 업그레이드로 사실상 어려운 것이 사실입니다. 회사는 오토 근절을 위해 작년 18년 11월에 '자동사냥 방지문자 입력 시스템', 20년 2월에는 다른 버전의 '자동사냥 방지 시스템'을 도입하였으며, 주기적으로 이를 업데이트 하였습니다. 또한 그 외 버전의 오토방지 시스템을 준비중에 있습니다. 회사는 지금까지 오토 근절을 위한 노력을 멈추지 않고 꾸준히 계속해 왔으며, 유저분들께서 만족하실 수 있는 수준에 다다를 때까지 개발적인 능력을 강화하여 오토가 사라질 때까지 노력을 계속할 것을 약속 드립니다.


Q. 지금까지의 불통을 해소하고, 보다 적극적이며 게이머 본위의 소통을 수행할 계획이 있는가?

AK인터렉티브: 26일 시행한 약관 변경은 2020년 6월 1일 적용될 예정입니다. 오토사용자에 대한 제제 역시 진행하여 왔으나 이를 적극적으로 유저분들과 소통하지 않았기에, 공식홈페이지를 통해 유저분들께서 오토 제제에 대한 소식을 빠르게 접하실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아울러, 현재 진행 중인 고객센터를 통한 소통 외에도 유저분들께서 원하는 소통이 될 수 있도록 이 외에도 다양한 소통 방법을 늘리는 방안을 강구하고 있습니다.

AK인터렉티브는 즉답을 미뤘고, 역시 하루가 지난 지금까지 '기다려달라'는 말 외에는 답변이 없다.
27일 17:50분, AK인터렉티브의 답변을 받을 수 있었고, 해당 내용은 본문에 추가되었다.

명백한 위기이지만 결코 타파가 어려운 상황이 아니다. 촉매가 된 카페 매니저의 글을 보면, 어느 곳에서도 "지금 당장 오토를 잡고 작업장을 박살내라"와 같은 내용은 없다.

게이머들은 그저 말을 듣고 싶어한다. '이런 점이 어려워서 늦어지고 있다', '우리가 이런 식의 계획을 짜고 있다'와 같이, 적어도 게임 운영에 신경을 쓰고 있다는 내색이라도 하길 바랄 뿐이다.

AK인터렉티브가 입만 열면 이 사태는 진정될 수 있다. 이후 어떻게 해나갈지가 더 중요하겠지만, 조금의 실수가 있다 한들 꾸준히 노력하며 소통하는 모습만 보인다면 지금과 같이 민심이 폭발하고 불신의 골이 멘틀에 닿는 일은 없을 것이다. 거상의 게이머들은 꽤 인내심이 강하며, 거상이라는 게임을 사랑하는 이들이다. 게시판에 글만 봐도 그들의 애정을 충분히 느낄 정도였다.

결국 모든 것은, AK인터렉티브가 어떤 태도를 보이냐에 따라 달라질 것이다. 모든 게이머가 그들의 입을 주목하고 있다. '불통의 끝에서 빚어진 분기점'. 앞으로 거상에 대한 게이머 민심이 결정될 순간이며, 이번 사태의 본질이다.

설령 개발력이 부족하다 해도, 게이머들과 적극적으로 소통한다면 게이머는 참고 기다려줄 수 있다. 혹은 손을 잡아끌고 더 나은 길로 인도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개발사와 게이머는 양립할 수 없다. 느릴지언정, 예정된 결별을 향해 나아갈 뿐이다.

댓글

새로고침
새로고침

기사 목록

1 2 3 4 5
검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