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수첩] 게임 속 '한국'을 보고 싶다

칼럼 | 정재훈 기자 | 댓글: 138개 |
지난밤, `고스트 오브 쓰시마`를 플레이했다. 이미 리뷰는 다른 기자가 작성한 만큼 아무 부담 없이 개인적인 즐거움을 위한 플레이였지만, 굳이 분석적 시선을 곁들이지 않아도 개발사가 무엇을 의도했는지는 알 수 있었다. `고스트 오브 쓰시마`는 일본 영화의 거장이자, 세계적으로 영향을 끼친 감독인 `구로사와 아키라`에 대한 찬가다.

게임 시스템이나 비주얼은 현대의 기준에 맞춰져 있지만, 게임 속 연출에서 보이는 미장센은 구로사와 아키라의 영화와 매우 닮았다. 주인공은 누가 봐도 당시 일본인의 모습 그대로이며, 여몽 연합군의 대마도 정벌을 일본의 관점에서 조명하며 게임을 풀어냈다. 흥미로운 사실은, 이 게임을 만든 `서커 펀치 프로덕션`이 미국 워싱턴에 본사를 둔 개발사라는 점이다.



▲ 고스트 오브 쓰시마

얼핏 부러운 일이지만, 상상도 못 할 정도의 일은 아니다. 구로사와 아키라의 영화, 도쿄 버블 시기의 명작 애니메이션, 그리고 최근까지 이어진 일본 문화의 수출은 세계의 미디어 전반에 큰 영향을 주었다. 간혹 유튜브 채널을 돌아다니다 보면, 미국 국적의 흑인 청년이 일본 애니메이션 주인공 분장을 하는 장면도 볼 수 있다. 일본 문화에 대한 호불호를 떠나 솔직하게 현실만 얘기하자면, 일본 문화가 세계에 주는 영향은 부정할 수가 없다.

게임을 끄고 침대에 누워 잠시 생각에 잠겨 보았다. `고스트 오브 쓰시마`는 서기 1274년 있었던 쓰시마 섬 코모다 해변 전투에 나선 80인의 사무라이 중 한 명이 살아남았다는 가정하에 진행되는 가상의 이야기다. 문득 임진왜란 때 있었던 탄금대 전투가 생각났다.

임진왜란의 향방을 가른 탄금대 전투는 신립 장군이 이끌던 조선군이 배수진을 친 끝에 대패한 전투다. 이 전투에서 어떻게 운이 좋게 살아난 조선 군관이 충청도 전역을 돌아다니며 민병을 규합하고, 왜군에 대항하는 식으로 플롯을 짜고, 사명대사나 고경명, 곽재우 등 의병장들도 등장하면 적당히 비슷한 이야기가 되지 않을까 싶었다.

그쯤 생각하다 `고스트 오브 쓰시마는 되는데 고스트 오브 탄금대는 왜 안 나올까?`라는 생각을 해 보니 나도 모르게 몸이 오글거렸다. 문득, 나 스스로가 이상하게 느껴졌다. 대마도의 80 사무라이나 탄금대의 조선군이나 둘 다 극적인 소재다. 그런데 왜 난 나도 모르게 `고스트 오브 탄금대`라는 워딩에 껄끄러움을 느낀 걸까?


아무도 게임 속에 '한국'을 담지 않는다

기실, 한국 문화는 세계에서 퍽 인상적인 활약을 보인다. BTS는 팝 음악에서 세계를 주무르고 있으며,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은 한국 영화로는 전무후무한 성과를 거두며 세계 평단의 극찬을 받았다. 드라마 `킹덤`은 또 어떤가? 전쟁 국가로만 알고 한국을 찾은 관광객들이 종로에서 `갓`을 기념품으로 사 가는 시대다.

하지만 이는 최근 몇 년간 급격히 터진 성과일 뿐, 얼마 전만 해도 세계 미디어에 비치는 한국의 모습은 영 별로였다. `클라우드 아틀라스`의 왜색 짙은 대도시 서울이나 미드 `하와이 파이브 오` 속 파주의 모습이 그들이 바라보던 한국의 모습일 거다. 수염 빽빽한 정글 레인저가 즉석에서 뱀의 모가지를 따 파주 전통주 뱀술을 만들어주는 그 모습 맞다.



▲ '하와이 파이브 오' 속 파주의 모습

한국이 꽤 활약하고 있는 게임 씬으로 넘어가도 별반 다를 바가 없다. 게임 속에서 한국인들에 대한 묘사는 태권도맨 혹은 해커라는 두 가지 스테레오 타입 속에서 정해진다. 문화 수출액의 절반이 게임인 한국이 게임 강국이 아닐 수는 없다. 하지만, `게임 속 문화`의 면에서 한국이 강국인지 생각하면 고개를 갸웃거리게 된다. 아니, 오히려 한국 게임사들도 굳이 게임에 한국적인 무언가를 넣으려는 시도를 잘 하지 않는다. 그렇게 한다고 딱히 나을 게 없기 때문이다.

심지어 한국 내수시장을 대상으로 하는 게임에서도 한국적 코드를 바탕에 깔고 들어가는 게임은 거의 없다. 물론, 이유는 여러 가지다. 70~80년대만 해도 한국은 민족주의적 성향이 강했고, 90년대에도 `신토불이`가 당연히 받아들여졌다. 하지만 정보화 시대가 펼쳐지면서 기존의 민족주의와 국수주의적 성향에 대한 반발 심리가 일어났고, 지금에 이르러 무절제한 자국 찬양은 `국뽕`이라는 이름으로 멸시당한다.

완성도는 떨어지면서 애국심에 빌붙는 애국 마케팅도 눈살을 찌푸리게 하였다. 한국 내에서도 일부는 좋아하지 않는 김치를 억지로 들이대는 초창기의 한식 세계화, 한국 문화를 알리랬더니 예산만 타 먹고 날아버린 `김치 워리어` 등등 한국 문화를 알리려는 과정에서 벌어진 추태들은 `국뽕 멸시`의 풍조에 한 몫을 더했다.

게임 개발자들이 세계를 시장으로 삼는 게임에서 굳이 한국적 코드를 다룰 이유가 없어졌다. 로우 코스트의 게임에 잘못 썼다간 `애국 마케팅`이 되고, 세계 시장을 노리고 하이 퀄리티로 만들자니 지금껏 성공한 사례가 없다. 해외 게임사가 한국 문화나 역사를 소재로 게임을 만들어주길 바라는 건 솔직히 말도 안 되는 욕심이다. 한국에서도 안 만드는 걸 만들 이유가 없다.



▲ 드물게 꾸준히 한국적 색채를 넣는 '검은사막'

그리고 그 모든 것에 앞서 우리는 모른다. 세계가 한국 문화, 한국 역사의 어떤 부분을 좋아하는지, 어떤 부분에 매력을 느낄지 아무것도 아는 게 없다. `닌자`는 팔리고, `사무라이`도 통한다. `삼국지`도 동아시아권에서 엄청나게 소비된다.

그런데 한국적 요소 중 세계에서 이렇게 통하는 게 하나라도 있던가?


'코드'와 '완성도', 문화 수출의 시작

가장 많이 비교될 일본을 생각해 보면, 솔직히 운이 좋았던 부분도 있다. 개항 시기 즈음 일제강점기를 맞아 식민지로 전락한 한국이나 문화대혁명으로 자국 역사를 박살 낸 중국과 달리, 일본은 메이지 유신을 통해 빠르게 서구화되었고, 문화 역수출도 이뤄냈다. `자포니즘`이라는 이름으로 일본 문화는 빠르게 서구에 번졌고, 이는 `자포네스크`라는 예술 사조로 재해석되었다. 우리가 익히 아는 서양화가들인 `클로드 모네`나 `빈센트 반 고흐`도 일본풍 그림을 남긴 바 있을 정도다.



▲ 클로드 모네, '기모노를 입은 카미유'

2차 대전 이후엔 구로사와 아키라의 영화와 80~90년대를 수놓은 양질의 애니메이션, 만화들이 서구 시장으로 수출되었고, 이 과정에서 세계에서 통할 충분한 문화적 코드를 찾아낼 수 있었다. 그 시기에 한국은 신토불이를 외치고 있었으며, 중국은 천안문 사태가 일어나고 있었다.

하지만 단순히 시기적, 환경적으로 운이 좋아 일본 문화가 앞서 전파될 수 있었던 것은 아니다. 일본의 문화를 알렸던 다양한 미디어들은, 세계에서 통할 만한 코드를 품었음과 동시에 높은 완성도를 보여주었다. 구로사와 아키라의 대표작 `7인의 사무라이`는 메타크리틱 98점에 로튼 토마토 지수 100%를 기록한 명작이었으며, `나루토`는 월마트 전 서적 판매 순위 3위를 기록하기도 했다.

`사무라이`와 `닌자`라는 통하는 코드, 그리고 그 코드조차 몰라도 알아가게끔 만들 작품의 완성도. 지금은 다양하게 왜곡되어 `와패니즈`로 통하는 현대판 자포네스크는 그 덕분에 만들어졌다. 그 결과, 오늘날 일본의 게임사들은 세계를 노리기 참 쉽다. 만들면 일단 반응은 오니까. 우리는 농담 삼아 갈라파고스니 뭐니 하면서 발전 없는 일본 게임 산업을 조롱하지만, 실상 세계 시장에서의 영향력은 한국 게임보다 일본 게임이 월등히 강하다.

과거에도 그랬고, 지금까지도 그렇다. 하지만 한국 게이머라면, 앞으로 조금은 달라지길 바랄 거다. 억지로 문화 자긍심을 끌어올려 `국뽕` 소리를 듣는 것보다 자연스럽게 한국의 문화와 역사가 세계 게임 시장에 녹아들기를 바랄 것이고, 해외 게임사가 한국 역사를 소재로 게임을 만들어 주길 바라고 있을 것이다. 지금의 이 마음이 뭔가 오글거리고 말도 안 된다고 생각한다면, `고스트 오브 쓰시마`를 다시 생각해보자. `토탈워: 쇼군`, `고스트 오브 쓰시마`. 전부 다 서양권에서 만든 일본 역사 소재 게임이다.

우리에게 필요한 건 두 가지, `코드``완성도`다. 지금보다 훨씬 다각적으로 한국의 역사를 바라보고, 소재를 뽑아내야 한다. 일본에서는 지금도 해마다 `전국시대`를 배경으로 하는 게임들이 쏟아져 나온다. `전국시대`라는 역사적 코드가 일본에서 통하기 때문이다. 한국 게임 씬에 현재 한국적 소재를 다루는 게임이 얼마나 있던가. 늘 보던 대로, 비슷비슷한 판타지 세계관에서 예쁘장한 캐릭터들이 아크로바틱 액션을 선보일 뿐이다.

삼국시대의 개마무사와 화랑, 싸울아비, 고려의 대몽항쟁기와 삼별초, 임진왜란과 민병 봉기, 삼전도의 굴욕과 남한산성, 나아가 일제강점기와 6.25 전쟁에 이르기까지, 한국의 역사 속에서 드라마틱한 격동의 시기는 너무나 많다. 2천 년 동안 침공받아온 민족이니 적을 리가 없다.

`국뽕`이라는 거부감은 잠시 넣어두고 상상해보자 `어쌔신 크리드`의 해상전 스케일로 한산도 대첩을 바라보고, `배틀필드`의 연출력으로 꾸며진 청산리 대첩. 문화적 영향력을 구축하면 수십 년 후엔 볼 수 있을 것이다. 지금 이대로라면 백 년 후에도 힘들겠지만 말이다.

`코드`를 찾으려면 끊임없이 시도해야 한다. 일제강점기 소재의 오픈월드도 만들어 보고, 화랑과 개마무사가 등장하는 액션물도 만들어보고, 지나가던 선비가 부채와 환도로 도깨비를 때려잡는 어드벤처 게임도 만들어 봐야 한다. 물론, 퀄리티는 유지하면서 말이다. 그러다 보면 통하는 코드가 나온다. `킹덤`에서 우리는 생각지도 못했던 `갓`이 흥행의 코드가 되었듯, 무언가 하나는 잡히기 마련이다.



▲ 한국을 뜻밖의 모자 강국으로 만든 '킹덤'의 갓

당연히, `완성도`도 뒤따라야 한다. 이럴 때야말로 개발력 하나는 인정한다는 한국 게임업계의 저력을 보여줄 때 아닌가? 개발비가 많이 들긴 하겠지만, 정부 지원 사업에서 덧없이 흩어지는 기금만 모아도 충분하다. 2020년 문체부 집행예산 중 콘텐츠 항목에 배정된 예산이 총 9,650억 원이다. 세계 최고의 게임 중 하나로 평가받는 GTA5는 총 2,800억가량이 들었고, 5년간 개발했으니 연평균 500~600억 정도다. GTA5 급 게임을 뽑아낼 필요는 없다. 게임성에서 실망할 정도로는 안 되겠지만.


국뽕이 아닌 '국격'을 위한 백년지대계

무엇이 `글로벌 코드`인지를 진지하게 고민해야 할 시기다. 그간, 국내 개발사들이 개발한 `글로벌 타겟`의 게임들은 대부분 세계 보편적 정서에 가깝게 만들어졌다. 누구나 이해할 수 있는 가상의 세계, 글로벌 스탠다드에 맞추기 위한 시스템까지, 한국에서 개발된 게임이지만, 한국적인 색은 없다. 그냥 누구나 받아들이기 쉬운 게임일 뿐이다. 하지만 글로벌에서는 `스탠다드`만큼 `엑조틱(이국적인)`도 파괴력을 지닌다. 이제, 한국적이면서도 파괴력을 갖춘 글로벌 코드를 찾아내야 할 때다.

하루 이틀로 되는 일은 결코 아니다. 창작자들은 꾸준히 우리 문화의 색을 보여주면서도, 세계에서 통할 수 있는 코드를 찾아내야 하고, 핵심이 될 이 `코드`를 갈고 닦아 새로운 미디어로 재생산하는 순환 과정을 꾸준히 만들어야 한다. 그렇게 문화적 영향력이 생긴다. 이렇게 천천히 만들어진 문화적 영향력은 단순히 한국 국민의 자긍심으로 끝나지 않는다. 그리스와 이집트는 기원전에 쌓아올린 문화적 영향력으로 지금도 막대한 경제적 이득을 얻고 있다.

참 좋은 시기다. 구로사와 아키라는 없지만, 봉준호 감독이 있으며, `나루토`는 없지만 `BTS`가 있고, `7인의 사무라이`는 없지만 `킹덤`이 있다. 비디오테이프로 알음알음 미디어가 퍼지던 시기와 달리, 지금은 3일이면 하나의 밈이 전 세계를 달굴 정도로 미디어 유통 속도도 빨라졌다. 세계에서 통할 코드만 잘 찾아내 완성도 높게 뽑아낸다면 국가의 문화적 영향력을 함양하는 과정은 이전보다 훨씬 빠를 것이다.

프랑스 기업인 유비 소프트는 게임 내에서 세계 각국의 도시를 놀랍도록 멋지게 만들었다. 런던, 샌프란시스코, 시카고, 로마에 이르기까지, 자국 역사가 아님에도 공을 들여 만들어냈고, 아무도 이를 이상하게 여기지 않았다. 해당 도시들이 충분히 강력한 문화적 영향력을 가지고 있어서이다. 반면, 다른 게임에서는 실존 국가인 `볼리비아`를 마약 카르텔이 장악한 범죄국가로 그려냈다. 볼리비아 정부는 항의했지만, 게이머들은 그냥 그러려니 했다. 볼리비아의 문화 영향력은 강하지 않기 때문이다.



▲ 볼리비아 전역을 무법지대로 그려낸 '고스트 리콘 와일드랜드'

우리가 아닌 누구도, 우리의 문화와 전통에 담긴 가치를 대변하지 않는다. 게임 속 한국의 모습이 낙후된 시골의 모습으로 그려져도, 왜색 짙은 모습의 `이름만 한국`이 등장해도 항의 외에 할 수 있는 것은 없다. `발로란트`의 `제트`는 누가 봐도 일본식 수리검을 던지지만, 라이엇은 이것이 `은장도`에서 따온 거라 주장했다. 제대로 된 `장도(粧刀)`를 알릴 문화 콘텐츠의 부족 때문일 거다.

영향력은 우리가 만들어야 한다. 한국의 신화, 전설, 역사 속 사실들과 전통적인 가치를 뒤져 모두가 좋아할 코드를 찾아내고, 그 코드를 바탕으로 조금씩 영향력을 늘려나가야 한다. 중요한 건 완성도다. 코드를 심되, 코드에 기대지 않아도 충분히 어필할 만큼의 완성도를 갖추는 노력이 함께해야 `억지`가 아닌 `어필`이 될 수 있다. 지금처럼 `K-`뒤에 단어만 가져다 붙인다고 영향력이 생기는 것은 아니지 않나?

실탄과 폭약이 날아다니는 전쟁은 줄어들었지만, 문화의 헤게모니를 노리는 전쟁은 지금 이 순간에도 치열하게 벌어지고 있다. 문화가 만들어내는 영향력이 곧 힘이며 국가 브랜드인 시대. 문화 영향력의 함양은 무분별한 `국뽕`을 위한 것이 아니다. 세계 곳곳의 문화가 코드가 되어 난립하는 지금, 문화적 자주성을 지키고, 차후 만들어질 콘텐츠들을 위한 텃밭을 조성하며, 나아가 `국격`을 높이기 위한 백년지대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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