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스토브 리그' 대신 듣는 단장의 이야기 - 젠지 이지훈 단장

인터뷰 | 박범 기자 | 댓글: 17개 |


▲ 이지훈 단장이 직접 전해준 프로필 사진

스토브 리그, 즉 이적 시즌이 사실상 마무리됐다. 원하는 선수들을 잡거나 영입했던 팀들도 있었고 그러지 못해 차선책을 택했던 팀들도 있었다. 그 어떤 관계자들에게 물어봐도 이번 이적 시즌은 LCK 출범 이후 가장 긴박하게 휘몰아쳤다고 했다.

그 속에서 가장 성공적인 리빌딩에 성공했다는 평을 들었던 건 젠지 e스포츠였다. '라스칼' 김광희와 '클리드' 김태민, '비디디' 곽보성을 새롭게 영입했고 '룰러' 박재혁과 '라이프' 김정민을 잡았다. 그야말로 빵빵한 로스터를 완성했다. 여기엔 스카우터와 각 프론트 팀을 비롯한 이지훈 단장의 노력이 있었다.

설을 맞아 한창 인기를 끌고 있는 드라마 '스토브 리그'가 휴방을 한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많은 드라마 팬들이 아쉬움을 삼키고 있을 무렵, 젠지의 이지훈 단장을 직접 만났다. 스스로를 드라마 '스토브 리그'의 팬이라고 할 정도로 애정을 보였던 이지훈 단장. 그에게 드라마에서 볼 수 있었던, 그리고 드라마와는 완전 다른 실제 단장의 면모를 들을 수 있었다.


■ 근황

최근까지 쉬질 못했다. 사실 내가 LoL만 관여하는게 아니라서... 오버워치에도 관여하고 있고 PUBG도 이번에 리빌딩했고, 컨텐더스도 리빌딩을 했다. 제일 중요했던 건 LoL 리빌딩이었고 그 다음에 다른 종목들도 신경을 많이 썼다. 사실 지금 가장 바쁠 시기다. 쉴 시간은 1도 없었다. 지난 주 쯤 모든 팀 리빌딩이 끝나서 조금 여유가 생겼다. 이젠 언론 대응에 집중 중이다. 선수단 인터뷰 요청이 많이 들어온다.



▲ 새로 바뀐 젠지의 유니폼

개막이 얼마 남지 않았으니 유니폼 등 선수단 재정비와 관련된 다양한 업무도 보고 있다. 난 프론트는 쉬면 안된다고 생각한다. 시즌에도 비시즌에도 바빠야 한다. 젠지 코리아에만 e스포츠 관련 팀원이 약 30명 있는데 다들 바쁘다.

중국 부트캠프도 다녀왔다. 젠지 차이나가 있어서 그 곳에서 도움을 받을 수 있었다. 현재 LoL을 최근에 가장 잘했던 지역은 LPL이라고 할 수 밖에 없다. 롤드컵 우승을 두 번 연속으로 했으니. 젠지라는 팀이 새로운 걸 많이 시도하는 팀이긴 하다. 새로운 자극을 주고자 생각했다. 6박 7일 다녀왔다. 생각보다 선수들도 열심히 했고 중국 팀 성향도 많이 알아왔고, 살짝 김치국이긴 한데 이번 롤드컵이 중국 상하이에서 열리다 보니 미리 현지 적응도 해봤다.

나 같은 경우엔 다음에 또 가게 된다면 선수들을 위해 더 완벽하게 준비할 수 있는 적응기를 거친 셈이었다. 중국에선 한국 카드가 안되더라. 선수들 간식이나 식사 같은 것들은 카드 결제를 해야 하는데 그게 안돼서 당황했다. 다행히 젠지 차이나에서 많은 걸 도와줬다.

에피소드도 있었다. 우리 코치진이 커피를 워낙 좋아해서 사먹어야 하는데 애를 먹었다더라. 선수단 먼저 가고 내가 뒤따라 입국했는데 그 두 명이 나한테 "제발 커피 좀 사주세요"하고 애원했다(웃음). 사소한 것들이라도 선수단에게 완벽하게 해줄 수 있는 걸 경험하고 와서 프론트 입장에서도 좋은 경험이었다.

한국에서 중국 혹은 대만 팀들과 스크림을 하면 핑 차이도 있고 중간에 인터넷 연결이 원활하지 않을 경우도 잦다. 현지에 가니 아무래도 원활하게 진행됐다. 현지에 가니 원래 새벽 스크림을 거의 하지 않던 중국 팀들도 응해줬다. 먼저 연락도 오기도 하더라. 이야기가 잘 되어 강팀들과 스크림을 주로 했는데 그들도 적극적이었다. 우리가 한국에 돌아와서도 계속 스크림을 같이 하고 싶다는 말도 들었다. 얻었던 게 많았던 부트캠프였다.


■ 단장이 된 선수 출신 감독

내가 단장이 된 과정에 대해서는 처음 이야기하는 것 같다. kt 롤스터에서 성적 부진에 대한 책임을 지고 나왔지만 그동안 이룬 것도 참 많았다. T1 만큼은 아니었지만 나름대로 꾸준히 좋은 성적도 냈고 좋은 선수들도 많이 데려왔으니 외부 평가가 나쁘지 않았나보다. 오퍼도 많이 받았다. 심지어 오버워치나 PUBG 등 다른 종목 감독직에 대한 것도 있었다. 해외 쪽에서도 거액의 연봉 제안도 있었기에 고민이 많았다.



▲ 케빈 추 회장

그러다가 당시 KSV에게도 연락이 왔다. 케빈 추 회장님이 어떤 사람인지 궁금해서 만나봤다. 서로 바쁜 와중에도 5일 연속 면접을 봤다. 아내가 '대체 케빈 추가 누구길래 사람을 5일 연속 부르냐'고 볼멘소리를 했을 정도였다. 그래도 그 5일 간의 대화 동안 케빈 추라는 사람에 대한 매력을 많이 느꼈다.

KSV가 단장 자리에 앉을 사람을 물색 중이었기에 여기에 오려면 감독직을 내려놓아야 했다. 고민을 많이 했다. 아직 내 마음은 현장 쪽으로 더 기울어져 있었다. 인생의 절반 정도를 현장에서 보냈으니까. 항상 고민했던 게 내 나이 40에는 뭘하고 있을지에 대한 것이었다. 현장에서는 e스포츠 특성상 나보다 어린 친구들이 두뇌회전도 빠르고 체력도 좋다. 그래서 단장의 길을 걷는 것도 좋겠다 싶어 과감한 선택을 했다.

당시만 해도 KSV하면 작은 회사였다. 돈 많은 팀이라는 이미지 보단 궁금한 팀이라는 인식이 강했다. 건방져보일 수도 있겠지만, 당시 이런 말을 케빈 추 회장님에게 했다. 내가 입단하면 아무래도 e스포츠 업계 사람들에게 신뢰가 쌓일 거라고. 그래도 내가 그동안 e스포츠 업계에서 오랫동안 일하면서 쌓아왔던 것이 있으니까. 내가 맡았던 모든 종목에서 우승도 경험해봤고 여러 종목에 대한 자신감이 있기 때문에 그런 말을 했다. 회장님에게 좋은 어필이 됐던 것 같다. 나에 대한 호기심을 잘 자극했던 모양이다.

5일 간의 면접에서 나 자신의 가치관에 대한 질문을 참 많이 하셨다. 인성이나 평소의 생각, 가치관을 가장 중요시하는 분이다. 게임 이야기보다도 KSV의 성장 계획을 많이 들었다. 솔직히 그때 들었을 땐 허무맹랑한 이야기들이었다. 그런데 오히려 그런 말들을 듣고 KSV에 대한 궁금증이 더 많이 생겼다.

이렇게 젠지라는 이름으로 성장한 걸 보고 있으면 때론 무섭다. 실제로 회장님이 두 달 전쯤에 한국에 들어와서 만났을 때 어땠냐고 물어보시길래 무섭다고 답했다. 성장세도 너무 가파르고 해서 힘들어 죽겠다고 했다(웃음). 사업을 하시는 분들이라 그런지 의사결정도 빠르고 업무 프로세스도 원활하다. 나도 여기서 더 많은 것들을 배우고 있다.


■ '드림즈' 단장과 젠지 단장

(1) 이적 시장
내가 원래 드라마를 좋아하는 편은 아니다. 드라마를 봐도 중간에 끊기는 걸 싫어해서 다 끝나면 주변에서 그 드라마에 대한 평을 다 듣고 한 번에 시청하는 스타일이다. 내가 워낙 스포일러에 민감하지 않아 그런 방법이 좋더라. 그런데 이번 드라마는 좀 다르다. 전개가 빠르다. 그리고 이번 시즌을 앞두고 진행됐던 모든 종목 게임단의 이적 시장이 빠르고 긴박하게 진행됐는데 드라마 스토리와 딱 맞더라. 그런 부분에서 매력을 느꼈다.



▲ 드라마 '스토브 리그'

거기에 나오는 야구 기반 이적 시장 이야기가 e스포츠와 큰 차이가 없다. 물론, 야구단이 게임단보다 훨씬 규모가 크겠지만, e스포츠에도 운영팀과 스카우터팀, 전력 분석팀, 마케팅 팀도 있다. 그런 부서들이 서로 갈등도 겪고 화합도 하는 가운데 팀의 좋은 성적, 더 나아가 좋은 팀을 만드는 것에 궁극적인 목표를 두고 있다. 극중에서도 이런 부분이 많이 강조된다. 그런 점에 공감되는 부분이 많다.

우리도 이번 이적 시장을 앞두고 드라마와 비슷하게 팀 간 피드백이 진행됐던 적도 있었다. 이번엔 훨씬 공격적이었고 냉정해져야 했고 투자도 당연히 많이 들어가야 했다. 젠지가 올해 3년 차다. 이 팀에 들어올 때도 3년 차엔 모든 종목에서 승부를 봐야 한다는 계획이 있었다. 그래서 올 들어 회사에 어필도 많이 하고 선수단과 코치진에도 힘을 많이 줘야 한다고 말했다. 그 결과물이 바로 올해 젠지 모든 게임단의 로스터다.

이적 시장 동안 단장의 역할 중에 가장 중요한 건 의사결정이다. 우리나라의 기업 문화를 폄하하는 건 아니지만, 의사결정 프로세스가 너무 복잡하고 느리다. 맨 밑에서 가장 높은 곳까지 순서대로 올라갔다가 또 차례대로 밑으로 내려와야 한다. 우리는 아놀드 허 한국지사장과 내가 직접 소통한다. 내가 코치진이나 스카우터와 의견을 나눠서 어느정도 해당 건에 대한 결정이 났을 때 아놀드 허와 직접 이야기했다. 그 일련의 과정이 정말 빨랐다.

단장은 선수단의 의사결정권자라서 내가 자신이 없으면 경영진 설득도 하지 못한다. 그런 신뢰를 많이 쌓아둔 상태였고 아놀드 허와 공적이든 사적이든 친분도 많이 쌓았다. 오죽하면 아놀드 허에게 농담으로 "내 아내보다 아놀드에게 연락을 더 많이 한다"고 했다. 아놀드 허도 나보고 '와이프'라고 부르더라.

나도 극중 단장처럼 선수단 이적을 성사시키기 위해 직접 발로 뛰었다. '클리드' 김태민도 그랬고 '라스칼' 김광희와 '비디디' 곽보성도 직접 만나 대화를 했다. 그러고 이틀 뒤에 셋 다 계약서에 도장을 찍었다. 가서 그들이 원하는 걸 들었다. 그때 선수단에게 거짓말은 조금도 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 말에 속아 팀에 오면 나중에 느낄 실망감이 선수들에겐 매우 크다. 단장과 선수의 신뢰가 깨지는 건 절대 안된다. '룰러' 박재혁과의 3년 재계약에 있어서도 재혁이 부모님을 사옥으로 모시고 내가 직접 설명드렸다.

우리 팀의 경우에 스카우터가 평소 전력 분석과 타 팀 선수 체크를 꾸준히 한다. 그리고 이적 시장이 열릴 때 쯤 감독에게 필요한 선수를 물어본다. 이번에 물어봤더니 정글러로 '클리드'를 원한다더라. 그 말을 듣자마자 "말도 안되는 소리 하지 말아라"고 했었다. 현실 가능성이 없는 선수들을 요청하더라. 고민 끝에 "각 팀에 요청은 해보겠다, 이적료를 원하면 그것까지 맞춰보겠다"고 답해줬다. '라스칼-클리드-비디디'가 이적 시장에 나오자마자 바쁘게 움직였다. 그때부턴 모든 팀이 경쟁 상대가 되니까.

LoL 선수들 이적 관련해서 재미있는 에피소드가 있다. '클리드'가 나와 직접 만나 대화를 해보더니 결정을 위한 시간을 달라고 했다. '라스칼'과 '비디디'도 도장을 찍는다면 모두 같은 날에 찍고 싶다고 했다. 그런데 그 날이 PGC를 보기 위해 출국해야 하는 날이었다. 고민하다가 PGC 일정을 포기했다.

그런데 답을 주기로 했던 날보다 좀 이른 때에 '클리드'가 "손 한 번 잡아보시죠 단장님"이라고 메시지를 보냈다. 드라마나 영화를 너무 봤던 모양이다(웃음). 아무튼 그 이후로 좀 더 자세한 조건을 듣고 의견을 조율했고 팀에 세 명의 선수가 합류했다.

그래놓고 보니 PGC를 충분히 갈 수 있었더라. 심지어 우리 PUBG 게임단이 멋지게 우승도 했다. 나중에 PUBG 게임단 감독이 서운했다고 투정부리더라. 그래도 '클리드' 영입에 성공했다고 하니 이미 미국에서 소식을 듣고 깜짝 놀랐다고 좋아해줬다.

(2) 회사 내 단장의 역할
일단, 이 회사에서 냉정히 얘기해서 나만큼 e스포츠 경험을 가진 사람은 없다. 내가 워낙 경력이 오래됐다 보니 말이다. 물론, 나도 당연히 잘못된 선택을 할 때가 있지만 좀 더 올바른 방향으로 가려고 노력 중이다. 그걸 많은 분들이 존중해준다. 행복하게 회사 생활 하고 있다. 같이 일하고 있는 이원민 차장에게 항상 말한다. "내가 꼰대처럼 행동하거나 말하면 바로 알려달라고." 그럼 그걸 또 실제로 해준다. "단장님, 지금 좀 꼰대"라면서.

난 개인적으로 e스포츠에서 일하려면 절대 꼰대가 되면 안된다고 생각한다. 어린 선수들과 호흡을 해야 해서 꼰대가 되어 버리면 그들이 나에게 거리감을 느낄 수도 있다. 그걸 항상 경계 중이다. 회사 내 다른 팀들과 협업할 때도 마찬가지다. 이들은 모두 선수단을 위해 존재하는 팀이다. 그런데 나 때문에 불이익을 받으면 안된다.



▲ 아놀드 허 한국지사장

아놀드 허 한국지사장과는 워낙 대화가 잘된다. 오히려 아놀드 허가 선수단에게 더 많은 걸 요청하고 요구하고 아이디어를 제공하려 노력한다. 내가 e스포츠 업계와 관련된 정보와 경험을 공유하고 있고 스포츠나 비지니스 부분에서는 아놀드 허가 나를 정말 많이 도와주고 있다. 시너지가 잘 난다.

일단, 올해 같은 경우엔 성적이 가장 중요하다. 아무래도 힘을 많이 줬으니까. 그래도 난 그 성적이라는 것에 너무 일희일비 하지 말아달라 했고 위에서도 동의했다. 피드백을 할 때도 좀 더 분석적인 접근을 해서 더 나은 방향을 제시하는 쪽으로 입을 맞췄다.

누군가를 상대할 때 내 진심을 그대로 드러내는 것이 내 장점이라고 생각한다. 지금까지 모두를 대할 때 그랬다. 이런 걸 보면 감독보단 단장직이 나에게 더 맞지 않나 싶기도 하다. 저런 내 장점들이 단장을 맡고 더 잘 드러난다고 생각한다.

내 성격 자체가 사람들과 어울리는 걸 좋아하고 좋은 게 좋은 거라는 마인드다. 오히려 내 주변에서 나보고 좀 더 냉정해지라고 조언해준다. 난 아직도 내 인생의 절반을 차지하고 있는 선수나 감독 생활에 익숙하고 마음이 간다. 그러다 보니 그들을 조금이라도 더 챙겨주고 싶다. 그럼 어쩔 수 없이 회사와 불편해질 수도 있다. 실제로 '너무 선수단만 위하는 것 아니냐'는 불만도 들었던 적이 있다.

단장은 회사와 선수단의 다리 역할인데 양쪽 다 만족시키려면 차가움이나 냉정함 보다는 웃으며 즐겁게 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런 면에서 따지면 난 극중 단장과는 정반대의 성향이 아닐까.

내 생각에 극중 단장의 성격은 철저하게 성적이 잘 나왔을 때만 인정받는 스타일이라고 본다. 성적이 좋지 않다면 불신이나 주변 사람들의 원망이 조금씩 쌓일 것 같다. 극중에선 왜 그 단장이 그렇게 일을 하는지 공개되어서 시청자들이 이해를 하지만, 실제론 모르기 때문에 리스크가 크다. 그리고 극중에선 그 팀이 꼴찌팀이다 보니 단장이 강하게 나가지 않으면 변화가 없을거란 일념으로 움직인다고 생각한다.

피드백 과정에는 솔직히 종목마다 편차가 조금 있다. LoL 팀은 이제 경험을 많이 했다 보니 최대한 하고 싶은 대로 놔두는 편이다. 그런데 PUBG는 그런 면에서 부족함이 있어 강한 피드백을 자주 했다. 컨텐더스 팀도 그랬다. 창단한 지 얼마 되지 않아 경험이 없는 게임단은 그동안 쌓았던 내 경험을 토대로 꾸준히 가르쳤다.

팀을 운영하고 의사결정을 내렸을 때 감독이 모든 걸 책임져야 한다. 그런데 그게 잘못됐을 땐 내가 크게 개입했다. 그런 부분에 있어서는 주변과 상의를 더 하거나 도움을 요청해야 한다고 말해줬다. 단독으로 뭔가 결정했을 때 결과가 좋지 않았을 땐 화도 많이 냈다. 우리 프론트와 나를 허수아비로 만들지 말아달라고 했다. 우린 선수단을 위해 존재하는 사람들이고 선수단이 힘들 때 방패도 되어 줄 건데 감독 혼자서 모든 걸 결정하고 짊어지려 하는 건 옳지 않다고 말했던 적이 있다.

그런 말을 할 때 난 내 모든 생각과 그 생각을 하게 된 근거를 설명해준다. 관련해서 재밌는 일화가 있다. 난 지금까지 아내와 연예 포함해서 10년을 넘게 같이 있는데 싸워본 적이 없다. 대신, 의견 충돌이 있고 이틀 정도 지난 뒤에 대화를 시도한다. 얼굴을 마주하고 앉아서 일목요연하게 싸우게 된 원인과 과정, 내가 했던 생각과 그 이유를 설명한다. 그런 싸움이 일어날 일이 없더라. 아무래도 서로 감정이 상한 상태에서 대화를 더 길게 끌면 서로 화만 돋우는 셈이다.

각 게임단 감독들과도 마찬가지다. 내 아내를 대하는 것처럼 코치진도 대하고 있다. 그런 노하우도 단장직을 수행하면서 더 쌓았다. 그걸 가능하게 해주는 건 내 성격도 있다. 난 워낙 내 주변 사람들과 형제처럼 지내는 걸 좋아하고 잘한다. 그런 관계가 형성되면 서로 어려운 일이 있거나 고민이 생겼을 때 더 진심으로 도와주고 싶지 않나.


■ 3년 차 단장

단장이 되고 나서 스카우터 시스템을 국내에서 가장 빠르게 도입했고 아카데미 시스템을 온라인과 오프라인으로 구분해서 따로 관리하는 것도 추진했다. 온라인과 오프라인 팀에 각각 코치진도 있다. 스카우터와 온라인 코치, 오프라인 코치가 서로 정보를 시시각각 공유해 선수들의 팀 내 이동을 결정한다.

원래 2018년부터 이를 위한 감독님의 요청이 있었고 시작하려 했다. 1년 정도 미뤄졌다. 중간에 팀도 새로 창단했고 회사도 정착시키다 보니 우선순위에서 조금씩 뒤로 밀렸던 게 사실이다. 그때 이미 LoL팀에는 경험 많은 코치진과 좋은 선수들이 있었기에 스카우터나 아카데미 시스템에 큰 매력을 느끼지 못했다. 그런데 그리핀과 담원게이밍, 샌드박스 게이밍이 유망주들을 데리고 확 떠오르면서 생각이 많이 달라졌다. 조금 늦은 감은 있었는데 그나마 빨리 시작했다고 생각한다.



▲ 당시 유망주였던 선수들

지금도 최우범 감독과 자주 이야기하는 게 있다. 삼성 갤럭시라는 이름으로 완전 새 판을 짰을 때. 그때가 최근 이전에 마지막 유망주들이었다. '큐베' 이성진과 '룰러' 박재혁, '크라운' 이민호. 그 이후로 18년도까지 기존 선수들이 서로 돌아가며 자신의 전성기를 달렸다. 19년엔 유망주 시스템을 미리 준비했던 당시 챌린저스 코리아의 그리핀과 담원게이밍, 샌드박스 게이밍이 LCK에 입성도 하고 좋은 성적도 거뒀다. 여기에 3년 정도의 주기가 있다고 생각한다.

아카데미 소속 선수 두 명을 해외 팀으로 각각 임대, 이적시켰다. 원거리 딜러 '쌈디'라는 선수가 쑤닝 게이밍으로 이적했다. 물론, 라이엇 게임즈 승인도 받았고 부모님과 선수의 동의도 얻었다. 한 명은 '포커스'라는 원거리 딜러고 멕시코로 임대를 보냈다.

물론, 우리 아카데미 팀 소속 선수들이라 우리가 육성해서 1군 선수로 기용하면 좋다. 이들이 현재 다년 계약을 한 1군 선수들을 뛰어넘으면 오히려 좋다. 현 1군 선수들도 물론 잘해야 하지만, 세월이 흐르면서 그들도 부진할 수도 있고 나이를 먹으며 기량이 저하될 가능성도 있다. 그런 측면에서 보면 어린 친구들을 성장시켜서 백업 혹은 그 이상으로 기용하게 되면 좋은 거다.

그래도 도중에 좋은 오퍼나 기회가 온다면 어린 선수들을 위해서라도 이적이나 임대를 보내고자 한다. 사실 이적보단 임대가 우리에게 더 좋다. 임대는 가서 경험치를 많이 쌓고 돌아오는 것 아닌가. 대회에 나가지 못한다면 솔직히 어린 선수들은 소속 팀에서 소위 썩는거다. 당연히 아카데미의 1차 목표이자 궁극적인 목표는 좋은 선수로 키워서 우리와 계약해 대회에 내보내는 거지만, 여의치 않은 경우엔 선수들에게 좀 더 다양한 경우의 수를 열어주고 싶다.

LCK 선수들끼리 트레이드 시장도 열렸으면 좋겠다. 시즌이 끝나거나 중간 정도 지났을 때 보면 밖에서 봐도 팀마다 취약 포지션이 발생하게 마련이다. 그럼 트레이드도 해결 방안 중 하나가 된다. 젠지는 그런 쪽에 항상 열려있다. 트레이드에 대해 우리 경영진은 오히려 "왜 LCK에 그런 시장이 열리지 않느냐"고 물어볼 정도다. 그만큼 얼어붙어 있긴 하다.

우린 실제로 LCK 선수 간 트레이드를 성사 직전까지 갔었다. 19년 스프링 때였다. 그런데 라이엇 게임즈에서 규정에 명시했던 기한을 우리와 모 팀이 지키지 못해 아쉽게 무산됐다. 라운드 별로 트레이드 기간이 있는데 트레이드가 처음이다 보니 그걸 놓쳤다. 실제로 성사됐다면 정말 재밌었을 것 같다.

시장이 더 커지면 전통 스포츠처럼 해외 팀 선수와 우리나라 팀 선수들 간 트레이드도 성사될 수 있을 것 같다. 지금도 되면 좋겠지만, 비자 문제가 걸린다더라. 이는 아카데미 소속 선수들 간 트레이드 및 이적도 마찬가지다. 예를 들어 베트남이나 중국에 실력 좋은 유망주가 있다고 해서 영입하려 하면 비자 때문에 입국에 애를 많이 먹는다. 이런 현실적인 어려움 때문에 당장은 어려운 게 사실이다.

이런 부분이 해결된다면 재미있을 것 같다. 회사에 난 장난식으로 항상 '캡스'를 데려오자고 말한다. 그러면 또 비자 문제가 걸려서 안된다고 하더라. 물론, G2에서도 '캡스'를 우리한테 줄 리도 없고(웃음).


■ 지금까지, 그리고 앞으로

팀 내 모든 게임단이 딱히 문제를 일으키거나 구설수에 휘말리지 않고 잘 돌아갔다. 부임 첫 해엔 성적이 아쉽긴 했지만 롤드컵 진출도 했다. LoL 팀이야 워낙 감독과 코치진의 경험이 풍부하고 노하우가 많다 보니 만족스럽다. PUBG는 명실공히 세계 최고 팀이 된 것에 자부심을 느낀다. 아쉽게 해체의 길을 걷게 됐던 히어로즈 오브 더 스톰 팀도 잘 나가던 선수들이 들어와서 더 잘하게 된 것 같아 뿌듯하다. 컨텐더스와 오버워치 아카데미 팀도 오버워치 리그 팀들로 선수들을 진출시켜 기분 좋다.



▲ PUBG 젠지는 우승도 했다

정말 바쁘고 정신 없었다. 그래도 원했던 그림대로 굴러가는 것 같아 좋다. 아직 많이 부족하지만 우리 게임단과 회사가 3년 동안 이만큼 성장했다는 자부심이 든다. 처음 KSV로 나왔을 때 '코리아 실리콘 밸리'라고 불렸다거나 젠지로 이름을 바꿨을 때 오버워치 영웅 겐지라고 했던 때와 비교하면, 지금은 젠지라고 하면 세계적으로 알아준다. 그러다 보니 이래저래 만족스럽다. 올해 LoL팀이나 서울 다이너스티가 힘내서 성적을 잘 내주면 올해는 내 할 일을 다 했다는 생각이 들 것 같다.

지금까지 우리나라 단장이라고 하면 대기업 팀들의 높으신 분들이라는 이미지가 강했다. 선수 출신 단장은 내가 국내 e스포츠에서 최초다. 직접 해보니 너무 많은 일들과 의사 결정을 해야 하는 위치다. NBA나 전통 스포츠 단장들을 보면 대부분 선수 출신이다. 모든 코치진과 선수들의 생각을 읽고 그걸 토대로 회사와 싸우고 대화하는 역할을 잘하더라.

물론, 중간에서 일하는 보직이라 힘들다. 서로의 갈등을 최소화시키는 것이 단장의 역할이라고 생각한다. 그런 의미에서 보면 단장은 다리 역할이다. '마포대교는 무너졌냐'할 때 그 마포대교 정도?(웃음) 단장은 그 마포대교가 무너지지 않게 지탱하는 자리다. 단장은 선수들에게 신뢰를 잃는 순간 힘을 잃는다고 생각한다. 그들에게 좀 더 인정을 받고 싶다.

팀 내 모든 구성원이 나를 불편하게 생각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친한 형이나 아저씨, 아버지 정도로 생각했으면 한다. 단장이라고 무게잡고 있는 사람은 절대 아니니 언제든 편하게 대화하고 즐겁게 일했으면 좋겠다. e스포츠에는 즐거움이라는 게 항상 들어가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요즘 우리 회사 사람들을 보면 엄청난 업무량에 시달리고 있어 즐거움을 예전만큼 많이 느끼지 못하고 있더라. 나를 포함해 선수단과 코치진, 프론트가 열심히 노력해서 좋은 성적을 낼테니 다들 즐겁게 일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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