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와재의 WoW 이야기 1편 : 오리지널 베타 초기의 기억

게임뉴스 | 김경범 기자 | 댓글: 51개 |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이하 WoW)가 서비스를 시작한지 어느덧 14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다. 출시 당시에 태어난 아이가 어느새 흑염룡에 눈을 뜰 나이가 될 정도로 정말 오랜 기간 서비스를 이어오고 있는 WoW. 비록 전성기 시절에는 못 미치지만 현존하는 MMORPG 중에서 가장 유명하고 잘 만들어진 게임으로 이것을 꼽는데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기자 역시 마찬가지다. WoW가 나오기 전부터 이미 워크래프트 시리즈와 디아블로 시리즈, 스타크래프트 등을 즐기며 블리자드 때문에 학창시절을 망친 ― 이른바 "골수 블빠" 코스를 착착 밟았고, 특히 워크래프트 3는 낭만 오크 이중헌, 외계인 장재호 등 스타 플레이어의 환상적인 컨트롤에 매료되어 게임과 e스포츠, 그리고 스토리에 푹 빠져 있기도 했었다.

그래서 워크래프트 3 이후의 이야기를 MMORPG로 만든다는 소식이 들려오자 엄청난 기대를 한게 사실이다. 그 전에는 리니지나 라그나로크 온라인, 마비노기 등을 플레이했지만, 베타를 플레이할 수 있게 되자 곧바로 WoW에 뛰어들게 되면서 지금까지 인연을 이어오고 있다.

7번째 확장팩인 "격전의 아제로스"를 앞둔 지금, 그 시절의 이야기를 하면서 초기부터 WoW를 즐긴 사람과 나중에 뛰어든 사람 모두 각자의 추억을 떠올릴 수 있는 과거의 이야기를 한 번 풀어볼까 한다.

그렇다. 이것은 WoW의 초창기부터 인생을 갈아 넣었던 "와재" 중 한 명의 이야기이다.




▲ 일리단만 잡고 효도하겠다던 청년은 10년이 지나 불효자 아재로 진화했다.




■ 첫 시작은 얼라이언스로

처음 베타를 시작했을 때, 가장 먼저 고민한 것은 "어느 종족의 어떤 직업을 하느냐"였다. 워크래프트 3를 할 때의 주종족은 오크 호드였지만, 당시만 해도 WoW의 오크 캐릭터는 그리 멋지지 않았다. 그나마 요새야 모델링도 개선되고 텍스쳐도 세밀하게 바뀌었다지만 그때만 해도 그냥 울퉁불퉁한 괴물이나 다름없는 느낌이었으니 말이다. 사실 트레일러로 공개된 캐릭터와 실제 게임에서의 캐릭터가 이질감이 드는 경우가 워낙 많기도 했었고...

그래서 다음으로 선택한 것은 인간, 그중에서도 속칭 "깻잎 머리"라고 불리는 여 캐릭터였다. 평소 MMORPG에서 힐러 직업군을 선호했던 기자는 치유 능력이 강력한 사제를 할 것인가, 아니면 치유 능력은 좀 떨어져도 생존이 좋은 성기사를 할 것인가 사이에서 한참을 고민했다.

그리고 이런 고민을 해결해 준 것은 워크래프트 3의 휴먼 플레이어들의 가슴에 불을 지피는 명언 한 문장이었다. "남자라면 선팔라(先Paladin)"라는...




▲ 남자라면 선팔라!


캐릭터를 생성하고 맨 처음 떨어진 곳은 노스샤이어 수도원이었다. 당시만 해도 WoW 내 대다수의 지역명이 영문을 그대로 음차한 경우가 많았다. 북녘골은 노스샤이어, 남녘해안 마을은 사우스쇼어 같은 식이었고, 타렌 제분소 같은 경우 "타렌 밀 농장"이라는 이름으로 잘못 번역되어 오랜 기간 유지되었다. 그래도 파이어볼을 화염구로 바꾸는 등 현지화에 신경 썼던 블리자드의 모습은 기존에 외래어 범벅이던 국산 게임보다 신선함을 줬던 게 사실이다.

몬스터의 경험치 분배와 관련된 부분도 독특한 편이었다. 기존 게임들은 몬스터에게 막타를 날린 플레이어가 경험치와 아이템을 독식하거나, 몬스터의 생명력을 얼마나 깎았는지의 비율에 따라 보상이 나뉘었지만, 와우에서는 먼저 공격한 사람에게 권한이 귀속되는 방식이었기 때문이다.

물론 지금이야 대부분의 필드 몬스터가 선공과 상관없이 퀘스트 카운트가 되고 루팅 할 수 있게 바뀌었지만, 당시만 해도 다른 사람에게 귀속된 몬스터(회색 이름이 된 몬스터)는 같이 잡더라도 퀘스트 카운트가 되지 않았고, 수집 아이템도 얻을 수 없어서 불편했다. 몬스터가 부족한 지역에서는 사냥꾼처럼 먼 거리에서 선공을 날릴 수 있는 직업들이 우선권을 가져가는 것 때문에 매너 시비가 붙기도 하던 시절이다.

아무튼 변변한 퀘스트가 없이 닥사만 하던 기존 MMORPG와 달리, 주어진 퀘스트를 따라가면서 워크래프트 세계의 이야기를 볼 수 있었던 구조는 여러모로 신기한 경험이었다. 골드샤이어(지금의 황금골)에서 스톰윈드, 동쪽계곡 벌목지를 왔다 갔다 해야 하는 동선은 여러모로 짜증을 불러일으키는 요소였지만, 매클루어 가문과 스톤필드 가문 간의 막장 드라마를 다룬 "젊은 연인들" 같은 퀘스트는 인간과 오크가 치고받던 워크래프트의 세계관을 좀 더 풍성하게 만들어줬다. 스톰윈드를 방문해 전문 기술도 배우고, 그리폰을 타고 이동하면서 "오오오"하고 감탄하던 것도 초기 시절의 소소한 추억이다.

다만, 몬스터를 잡고도 루팅이 제대로 되지 않아 한참 동안(때로는 재접속을 하지 않으면 절대로 풀리지 않을 정도로) 캐릭터가 웅크리고 있는 "모내기 랙"은 다시는 겪고 싶지 않은 경험이기도 하다.




▲ WoW 미녀(?) 전대의 한 축을 담당하는 '공주'도 엘윈 숲에서 만날 수 있다.




■ 엘윈숲의 악몽을 만나다

엘윈 숲을 바쁘게 뛰어다니면서 10레벨을 막 넘긴 기자는 엘윈 숲 서쪽에 위치한 "서쪽시내 주둔지"에 다다르게 되었다. 여기에서는 일반적인 NPC가 아닌 현상수배 공고로 퀘스트를 받는 게 있었으니, 바로 "들창코 현상 수배"다.

사실 그때까지의 퀘스트는 길을 헤매는 것 말고는 큰 어려움이 없어서, 이 퀘스트도 그리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목표 지역 자체도 바로 밑에 있었기에 곧바로 들창코가 있다는 위치로 갔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뭔가 잘못되었다는 걸 깨닫게 된 기자였다.

일단 들창코가 있는 들창코 언덕(이 이름은 나중에 붙게 된다)은 엘윈 숲의 다른 지역보다 몬스터의 밀도가 높았다. 다른 곳은 곰이나 늑대 정도가 드문드문 배치된 구성이지만, 이 지역은 인간형 몬스터인 "놀"이 한 곳에 몇 마리씩 모여 있는 식이었고, 그런 무리가 꽤 가까운 거리에 배치된 구조였다. 그리고 퀘스트 목표인 들창코는 이러한 놀 무리 사이를 로밍 다니는 "정예" 몬스터였다.




▲ 하스스톤에선 귀요미가 된 들창코지만...


들창코를 잡기 전에 주변에 있는 놀 무리를 정리하다 보면 체력이 떨어진 놀 한 마리가 도망치면서 다른 무리를 애드시켰고, 그것들을 처리하던 중 어느새 슬그머니 뒤에 접근한 들창코에게 맞아 죽는 상황이 계속됐다. 그렇다고 들창코만 따로 빼서 잡을 수도 없었던 것이, 변변한 원거리 공격 수단이 없는 성기사의 특성상 몸으로 부딪혀야 하는 경우가 많았고 그러다 보면 주변에 있던 놀 무리가 애드나기 십상이었다.

혼자서 시도하면서 죽고, 유령으로 달려와서 시체를 찾았더니 주변에 있던 놀 무리에게 두들겨 맞아 다시 무덤으로 날아가는 일이 반복되자, "이건 혼자서 하라고 만들어 둔 게 아니구나"를 깨닫게 되었다. 사실 그 주변엔 기자 외에도 많은 솔플 유저들이 들창코에게 도전하다가 각개격파 당하는 일이 많았고, 이런 사람들을 모아서 들창코에 도전했던 것이 WoW에서 경험한 첫 파티 플레이였다.

물론 파티로 도전을 해도 들창코와 많은 수의 놀은 쉽지 않은 상대였다. 퀘스트 보상으로 받은 치유 물약과 리넨 옷감으로 만든 붕대까지 동원한 끝에야 우리는 들창코를 쓰러트릴 수 있었다. 처음으로 만난 정예 몬스터였기에 다른 게임의 희귀한 몬스터처럼 좋은 아이템을 주지 않을까 하고 기대했다가 잔돈푼이나 주는 것에 실망하기도 했지만, 그래도 강력한 몬스터를 잡기 위해 파티를 맺고 도전에 성공한 경험은 생각 이상으로 짜릿했다.




▲ 게임 내 통계에 들창코에게 죽은 횟수가 따로 있을 정도다.


임시로 맺었던 파티원들과 작별 후, 기자는 엘윈 숲을 벗어나 서쪽에 있는 새로운 지역으로 이동을 하게 되는데, 여기가 바로 매년 12월 31일 자정 즈음이 되면 호드와 얼라이언스가 모여서 해가 뜨는 것을 보며 새해를 축하하는 "와돋이"의 명소 ― 서부 몰락지대이다.



■ 첫 던전이던 죽음의 페광. 하지만 보스보다 무서웠던 건...

사실 서부 몰락지대에 대한 추억은 그다지 많지 않다. 묘하게 복붙느낌이 나던 허수아비 골렘들과 "서부 멀록지대"가 진짜 이름이라는 우스갯소리가 나올 정도로 해안가를 따라서 빼곡하게 있었던 멀록정도가 이 지역에 대한 기억 대부분이기 때문이다.(그리고 진짜진짜진짜 드랍이 안되던 멀록 눈알도)

오히려 지역 자체보다는 "죽음의 폐광"이라는, 얼라이언스가 가장 먼저 접할 수 있었던 인스턴스 던전과 그것이 있는 문브룩(현 달빛시내 마을)이 더 기억에 남는다. 파티를 맺고 몰려다니면서 속칭 “다구리”를 놓으면 대부분의 적을 상대할 수 있었던 필드와 달리, 던전에서는 탱커와 딜러, 힐러가 각각 역할을 맞춰서 플레이해야 했기 때문이다.




▲ 붉은 복면으로 유명한 데피아즈단의 수장 에드윈 밴클리프


지금처럼 파티를 자동으로 매칭시켜서 입구까지 이동시켜주고, 던전 내부 맵이 자세하게 나오며, 직업별로 역할과 기술들이 제대로 구현된 시절도 아니었다. 그래서 고작 첫 던전인데도 어려움을 겪는 일이 많았다. 안정적인 진행을 위해 메인 탱커와 서브 탱커의 2탱커 체제를 쓴다거나 힐러가 어그로를 먹고 몰매 맞는 상황을 막기 위해(당시엔 오버힐에도 위협 수준이 적용되어 힐러가 공격당하는 일이 많았다) 2힐러를 쓰기도 하던 시절이다.

그래도 필드에서 운 좋게 드랍 아이템을 얻는 게 아니라면 거의 처음으로 파템(붉은 석탄 지팡이나 섬뜩한 갈고리검 등)을 얻을 수 있는 곳이고, 관련 퀘스트의 보상도 엄청나서 서부 몰락지대의 거점인 감시의 언덕은 항상 파티를 찾는 사람들로 북적였다.

문제는 여기까지 가는 길이었다. 죽음의 폐광은 문브룩 안쪽에 자리했고, 던전 입구까지는 꼬불꼬불한 동굴을 지나가야 하는 구조로 되어 있다. 그러다 보니 좁은 길목에서 데피아즈단과 마주치면 전투를 벌여야 하는 상황이 되고, 파티원이 따로 이동하다가 이런 몬스터에 걸려서 유령이 되는 일도 허다했다.

무엇보다도 가장 끔찍했던 것은 문브룩 곳곳에 두세 마리씩 링크가 되어 있는 "데피아즈단 강탈자"였다. 데피아즈단 강탈자는 화염구를 날려 플레이어를 공격하는 몬스터로, 이 화염구의 피해량이 10레벨을 막 넘긴 플레이어가 맞으면 몇 방 만에 죽어버릴 정도로 강력한 데다가 인간형 몬스터답게 애드가 발생할 확률도 높아서 아차 하는 사이에 무덤으로 날려가는 경우가 많았다. 게다가 보통 2~3마리가 뭉쳐 있는 편이라 혼자서 이들을 사냥하기 위해선 건물과 같이 시야가 가리는 구조물을 이용하는 게 필수일 정도였다.



▲ 혼자 사냥할 때 멀리서 날아오는 화염구는 공포 그 자체였다.(Rustsandstuffs 유튜브)


덕분에 폐광 던전을 가기 위해서는 감시의 언덕에서 미리 모이는 게 반쯤 필수였고, 각자 따로 오다가 몬스터가 많은 위치에서 한 명이 죽으면 파티원들이 구조를 위해 가야 하는 일도 있었다. 데피아즈단 강탈자의 악명은 오리지널 후반까지도 이어졌는데, 사람들이 많이 죽어 나가는 공격대 던전이나 알터랙 계곡 같은 대규모 전장의 NPC들을 제치고 "하루에 가장 많이 플레이어를 죽이는 NPC 1위"를 오래 유지할 정도였다. 아마 당시 오리지널을 플레이한 얼라이언스 플레이어에게 지긋지긋한 몬스터일 것이다.

어쨌든 데피아즈단 강탈자에게 시달리며 죽음의 폐광에서 얻을 만한 아이템을 다 얻어갈 때 즈음, 새로운 지역으로 이동할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다. 초반 엘윈 숲에서 한창 퀘스트를 하던 때, 동쪽계곡 벌목지에서 조금 더 갔다가 "분쟁지역"이라는 붉은 글씨에 위협을 느끼고 돌아서야 했던 "붉은마루 산맥"으로 말이다.



(2부에서 계속됩니다)



▲ WoW를 계속 하느냐 마느냐의 분기점이 된 붉은마루 산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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