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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담] 여러분 1월 27일은...

대한독립군
조회: 1562
추천: 27
2022-01-27 21:19:36


독립운동가 손양섭 (1921.01.27 ~ 1945.01.03) 출생


손양섭은 충청남도 대전군(대전시)에서 태어났다.

1942년 5월. 그는 태평양 전쟁 중이던 일본에 의해 3천 여명의 한인 청년들과 함께 강제 징용되어 육군부산서면임시군속교육대에서 2개월간 훈련을 받았다.

1942년 8월. 동남아시아로 출발한 손양섭은 9월 14일 인도네시아 자바 섬의 딴중 쁘리옥 항구에 도착한다. 그는 그 곳에서 일본군의 지시에 따라 연합군 포로들을 감시하는 임무를 수행한다.

자바섬에는 강제 징용된 1,400명의 한인 포로감시원들은 일본군에게 멸시와 학대, 차별을 받으면서 연합군 포로 감시 임무를 수행해야했다.

1944년 6월 2년의 계약기간이 만료되었다. 그러나 일본군은 강제 징용한 한인들을 돌려보내지 않았다.

1944년 12월 24일. 조선 청년 10여명은 인근 필리핀과 미얀마의 독립선언을 목격하고 지도적 역할을 하던 이활을 중심으로 자바 섬 세마랑 주 스모워노 고원지대에서 항일단체인 고려독립청년당을 결성했다.

손양섭은 민영학, 노병한, 조규홍과 함께 여기에 참여했다. 이들은 자바 섬 중부 암바라와에서 고려독립청년당원으로서 지하 공작을 수행했다. 이들은 비밀리에 연합군 포로와 접선해 반일운동 및 무장 봉기를 준비하는 등의 활동을 했다.

1945년 1월 3일. 손양섭과 여섯 명의 동지들은 일본군으로부터 말레이 포로수용소로 전속 명령을 받았다. 손양섭은 갑작스런 전출 명령에 고려독립청년당 조직의 정보가 일본군들에게 누설된 것으로 판단하고 노병한, 민영학과 사후책을 강구했지만 별다른 방안을 찾지 못했다.

1945년 1월 4일. 손양섭과 동지들은 세마랑분소로 출발하는 차에 올라탔다. 이후 세마랑으로 가던 중 이대로 갔다간 차후에 모든 것이 밝혀져서 처형을 면치 못할 것으로 판단한 세 사람은 차량을 탈취하기로 결심했다.

그들은 자동차를 탈취한 뒤 암바라와의 분견소로 가서 무기고에 들어갔다. 손양섭은 부켄기관총을 들고, 노병한과 민영학은 탄환 3천발을 가지고 사무실 앞에 세워진 차를 타고 소장 관사로 가서 억류소장을 향해 기관총을 발사했다.

이후 일본군 어용상인을 사살하고 형무소에 이르러 형무소장을 사살했다. 이후 숲에 숨은 그들은 암바라와 억류소장이 긴급히 요청하여 급파된 일본군 수십 명을 상대로 총격전을 벌였다. 이들은 군인·군속 12명을 사살하였다.

그러나 하복부와 좌태퇴부에 총탄을 맞은 민영학은 자신이 치명상을 입었음을 직감하고 수수밭에 들어가 소총의 방아쇠를 구두끈에 매어 가슴에 대고 방아쇠를 당겨 자살했다.

손양섭과 노병한 역시 일본군과 총격전을 벌이다가 위생재료 창고 안으로 들어갔고, 창고가 완전히 포위되어 빠져나올 곳이 없게 되자 서로 방아쇠를 당겨 자결했다.

이들의 유해는 광복 이후 같은 고려독립청년당원이었던 이상문 애국지사가 수습하였다.


2008년. 독립운동가 손양섭에게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 이상문 애국지사는 고려독립청년당원들의 독립유공자 청원을 30년간 16번이 넘게 했으나 국가보훈처로부터 객관적인 증거가 부족하다는 이유로 매번 거절당했다. 그는 그럼에도 포기하지 않고 인도네시아와 일본을 오가며 관련 자료들을 찾았다.

그러던 2011년. 당시 고려독립청년당의 유일한 생존자였던 이상문 애국지사는 세상을 먼저 떠난 동지들과 해방 66년만에 독립유공자로 인정을 받아 이들의 명예를 회복시켰다. >


이니수집가

Lv58 대한독립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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