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장이 보이지 않는 까마득한 위에서 거대한 나무의 뿌리들이 내려와 있었다. 그 뿌리들은 원형의 제단을 두르고 벽에 박힌 카멘의 몸까지 옭아매었다.
그는 고개를 푹 숙인 채 늘어져 있었다. 가슴만이 호흡에 따라 미세하게 움직였다. 어둠의 검이 그의 가슴을 더 깊숙이 파고든 상태였다. 숨결에 맞춰 검날을 타고 검붉은 피가 다시 새어 나왔다. 뚝뚝 떨어진 피는 제단에 새겨진 홈을 따라 한가운데까지 흘러갔다.
피가 모인 중앙에는 성물이 자리했다. 검게 그을린 금속 위에 고대 문양이 새겨진, 잔과 같은 형태였다. 그 잔으로 피의 흐름을 따라 검은 기운도 함께 빨려들고 있었다.
알케스는 바닥까지 흘러내린 나무뿌리를 밟고 올라섰다. 벽에 박힌 존재보다 조금 아래, 얼추 시선이 맞았다. 카멘은 눈을 감고 있었다. 길게 늘어뜨린 은빛 머리카락이 어둠의 기운과 함께 흔들렸다.
“놀랍군. 아직도 의식이 남아있다니.”
안경을 지그시 누르는 알케스의 손등에는 여전히 붉은 룬이 새겨져 있었다.
그의 뒤에서 다른 목소리가 들렸다.
“그 정도에 의식을 놓을 정도였다면 우리가 이 고생을 하지도 않았겠지.”
쿠크세이튼이었다.
“잘 유지해라, 알케스. 그 명예의 룬이 네 생명줄이니까.”
“그래. 그림자에 그을린 룬을 더 이상 명예롭다 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알케스는 제 손등을 내려보고는 쿠크세이튼의 곁으로 다가갔다.
“그나저나 내 목숨뿐만은 아닐 텐데. 우리 모두의 존망이 걸린 문제가 아니었나.”
쿠크세이튼은 제단 한가운데의 잔을 들여다보며 웃었다.
“후후, 이 정도로 빨리 채워질 줄이야. 성물을 가득 채울 만큼 뽑아냈으니 제아무리 카멘이라도 기력이 떨어질 만도 하지 않겠어?”
“인간 꼬마의 숨이 붙어 있는 동안 더 빼놓는 게 좋을걸.”
“그래야겠지. 황혼 녀석들이 먼저 달라고 아우성치니 말이야.”
알케스의 시선이 어딘가를 향했다.
“귀찮은 손님들이 왔군. 그 황혼 녀석들.”
알케스가 엄지손가락으로 제단 반대편의 문을 가리켰다. 기묘한 무늬의 석재 벽이 좌우로 열려갔다. 후드 코트의 주교와 그를 수행하는 사제단, 그리고 신성 기사들이 모습을 보였다. 쿠크세이튼은 그들의 리더를 향해 몸을 돌렸다. 바실리오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바실리오는 안녕하신가? 내전 이후로 만신창이가 되었다던데.”
주교가 제단을 보며 답했다.
“우리는 단지 확인하러 왔을 뿐이오.”
알케스가 못마땅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성물을 두 개나 빌려줬으니, 생색을 내시겠다는 건가? 어차피 그것도 우리가 찾아낸 것들인데 말이야.”
비꼬는 말에도 주교는 피가 흘러나오는 제단 쪽으로 몇 걸음 옮겨갔다.
“저자가 정말 어둠의 주인이란 말이요? 우리가 알던 것과는 다른 모습이군.”
세이튼의 입꼬리가 길게 찢어졌다.
“너희 인간들은 눈에 보이는 걸로만 판단하지. 이 엄청난 힘을 보고도 믿지 못하겠나?”
세이튼은 제단 중앙의 잔을 가리켰다. 주교는 잔으로 다가서려다 멈칫했다. 흘러넘치는 어두운 안개가 본능적으로 두려움을 일으켰다.
“저, 저것이 벌써 다 채워졌다고? 대양의 물을 담고도 남을 성물에.”
“그래. 조금만 기다리면 가득 찰 거야. 그동안 자리를 좀 바꿀까? 우리가 떠드는 소리에 저 어둠의 주인이 깨어나면 곤란하거든.”
세이튼의 말에 주교는 당황했다. 이내 사제와 기사들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쿠크세이튼이 앞장을 서며 그들에게 따라오라 손짓했다. 주교와 일행은 그의 뒤를 따라 문밖으로 사라져갔다. 그들을 뒤따르던 알케스가 제단 쪽을 돌아보았다.
사제 하나가 남아 제단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알케스의 시선을 의식한 듯, 얼굴을 긁적거렸다.
“저 상태가 되어서도 아직 살아있다니, 왠지 좀 으스스하네요. 역시 카멘이 맞는 거겠죠?”
유약한 목소리에 알케스는 코웃음을 치며 돌아섰다. 그도 곧 문밖의 어둠으로 사라져갔다.
모두가 사라지고 숨 막히는 정적만이 남았다. 사제는 카멘이 박혀있는 벽으로 천천히 걸음을 옮겨갔다. 덥수룩한 붉은 머리 아래 실눈을 한 사제가 번쩍 눈을 떴다. 그의 눈이 붉게 빛났다.
어느새 사제가 서 있던 자리에 카마인이 섰다.
“이런, 이런. 설마 했는데 진짜일 줄이야.”
카마인은 나무뿌리를 밟고 올라섰다.
“그 힘을 가지고도 이 꼴이라니. 정말 한심하군. 카멘.”
카멘의 눈꺼풀이 작게 떨렸다. 카마인의 입꼬리가 비틀렸다.
“그래. 네가 이 정도에 정신을 놓아버렸다면 더 실망했을 거다.”
카마인은 스틱으로 카멘의 턱을 받쳐 올렸다. 흐트러진 은발 사이로 그의 눈이 천천히 떠졌다. 통증과 피로에 절어있었지만 억지로 붙잡은 의식이 금빛 눈에 서려 옅게 빛났다. 그는 한동안 카마인을 바라보다 겨우 입을 열었다.
“…너인가.”
“이거 눈뜨고는 못 봐주겠군. 오랜만에 만났는데 반갑다고 할 수도 없고.”
카마인은 그의 가슴에 박힌 검을 훑어보고는 작게 한숨을 쉬었다.
“어떤가? 네 하찮은 기준의 결과가.”
“…….”
“차라리 카제로스에게 휘둘리던 때가 나았겠군.”
스틱을 내리자 카멘의 머리가 슬쩍 아래로 떨어졌다. 그렇다고 완전히 의식을 놓지는 않았다. 그의 시선은 계속 카마인을 향했다.
카마인은 여전한 웃음으로 고개를 기울였다.
“루페온의 얄궂은 운명은 이보다 더 너를 비참하게 만들 수도 있다. 그러니까….”
잠시간의 침묵.
카마인이 다시 입을 열었다.
“내려와라.”
낮게 깔린 목소리였다.
“그 기준을 버려. 어차피 힘없는 가디언과 금방 죽을 인간 소녀일 뿐이다.”
한동안 답은 없었다.
다시 이어지는 침묵 속에서 카마인은 또 한 번 깊은 한숨을 쉬었다.
“카멘, 그만 포기하고 내려와.”
“…….”
“그 족쇄를 끊어라. 그러면 무한한 힘과 가능성은 우리의 것이다.”
카멘은 목을 울렁이며 숨을 삼켰다. 카마인이 건넨 독배 속에는 묘한 간절함마저 섞여 있었다. 그것이 걱정에서 비롯된 것인지, 완성에 대한 욕망에서 비롯된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카멘의 고개가 더 내려갔다. 그 작은 움직임에도 가슴에 박힌 검을 타고 통증과 함께 핏방울이 떨어져 내렸다.
카멘의 입이 작게 움직거렸다.
“…고통을.”
터울을 두고 그는 분명히 말했다.
“…아는가.”
카마인의 미간에 힘이 들어갔다.
“무슨…?”
카멘의 날숨이 거칠게 토해졌다. 칼날에 새로운 핏방울이 맺혔다. 몇 번이나 목을 울렁이며 피를 삼키고는 다시 입을 열었다.
“심연에서…최후의 순간….”
이번에는 카마인이 입을 닫았다. 카멘이 말하는 순간을 그는 잘 알고 있었다.
심연의 가장 깊고 음습한 공간에서 맞이했던 죽음의 순간을. 그 모욕적이고 참혹했던 기분은 지워지지 않았다. 하지만 고통과 분노는 카마인의 몫이 아니었다.
카멘의 머리가 점점 아래로 기울었다.
“그날의 기억은…네게 남아 있겠지…하지만….”
거친 날숨과 함께 그의 입을 타고 검붉은 핏줄기가 흘러내렸다.
“그 고통은…내 것이다.”
점점 작아지는 목소리가 카마인에겐 이상하리만치 또렷하게 들렸다.
카멘은 숨을 삼키며 억지로 고개를 들어 올렸다. 흐트러진 은발 사이로 겨우 초점을 잡은 금빛 눈이 카마인과 마주했다.
“…심연의 불꽃에, 타들어 가던…고통뿐일지라도….”
카멘의 눈꺼풀이 내려가며 다시 고개도 기울어갔다.
“그건…나만의 것…이다.”
이내 머리가 축 처지고 헝클어진 은발이 흘러내렸다.
카마인은 굳은 표정으로 한동안 멈춰 있었다. 핏방울이 떨어지는 소리만이 정적을 깨트렸다. 그는 잠시 눈을 감았다.
“그래…그렇군.”
카마인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내 발길을 돌리고는 나무뿌리에서 내려왔다. 옮기는 발걸음이 무거웠다. 저울은 기울었다. 어쩌면 카멘은 완전히 사라져야 할지도 모른다.
카마인이 어둠 속으로 사라지며 석재 문이 드르륵 닫혀갔다.
***
카멘, 카마인의 기억과 고통을 나눴다든가 하는 건 그냥 제 멋대로 설정입니다.
팬픽션을 쓰다 황금빛 노을 장면을 그리고 싶어 꺼낸 오일파스텔...
잘 다루지 못하는 재료라 사놓기만 하고 먼지만 쌓인 재료였고,
유투브와 참고 그림을 보며 얼레벌레 그리긴 했지만.
역시 그리는 재미는 있네요.


글씨는 악필이지만요.
자게에 올렸더니 무려 60추 받은...-3-;;
모두 좋은 하루되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