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서의 요람, 압구른테
"스으읍-하...시벌, 쉬운 일이 없구만"
홀로 서있던 카제로스의 입에서 한숨과 함께 진득한 욕지거리가 새어나왔다.
오른손엔 반쯤 마시고 남은 소주 한병.
비속어도 술도 나름 사장으로서 부하직원들에게 모범을 보이기 위해 자제해왔지만 잔소리하던 비서도 없는 지금에와서는 상관없겠지.
마찬가지 이유로 수천년전에 끊었던 담배가 오늘따라 마려워진다. 장소가 장소이니 어쩔수 없나.
여기는 페트라니아 건설의 시작. 카제로스의 손이 닿지 않은곳이 없다.
기억도 나지 않을만큼 오래 전, 메가코프 아크라시아 홀딩스에 근무하다가 '외부 혼돈 제거 및 질서 설립'이라는 급작스런 회장의 지시로 현장 책임자라는 허울좋은 명찰 하나 달고 황무지에 홀로 던져진 애송이.
밑바닥부터 시작해 원주민들의 적대적 태도, (주)혼돈 이라는 현지 기업 사장이 적대적 인수합병을 걸어오는 등의 수많은 난관을 겪으면서도
끝끝내 이를 악물고 태초의 어둠을 봉인한 위에 세웠던 질서라는 이름의 작은 건물의 모습은 아직도 어제일같이 생생하게 떠오른다.
정문 위에 넘어온 대륙의 이름을 딴 번듯한 회사의 간판을 걸었을 때는 눈시울이 살짝 붉어지기도 했었다.
그렇게 열심히 회사를 키워나가던 중, 한통의 전화가 걸려왔다. 발신자는 혼돈의 마녀.
대체로 회사를 적대시하던 원주민들 중에서도 이쪽에 호의를 보인 믿음직한 인물이다. 지금 당장 옆에서 큰 일을 해주고 있는 비서도 이쪽의 추천으로 데려올수 있었지.
내용은 충격적이었다. 회장인 루페온은 사실 질서고 혼돈이고 다 집어삼켜서 자신의 은행잔고를 채울 생각밖에 없으며, 그 과정에는 자회사인 패트라니아 건설의 강제적인 흡수 합병도 있다는 것이었다.
이건 안된다.
페트라니아가 무슨 수백억씩 태워놓은 결과물로 계열사 얼굴에 똥칠하는 불량기업도 아니고
그 오랜 세월동안 티끌만큼의 지원도 없이 내팽겨쳐놓고 자리비움한 주제에 이제와서?
그렇게 패트라니아 건설이 흡수되면 임직원들은? 우리가 애써 지켜왔던 가치는?
비록 머리에 든 것 없는 소대가리라던가, 능력도 부족한게 정치질만 한다던가, 심지어 적대기업의 산업 스파이같은 놈도 있지만...
그래도 수많은 직원들의 밥줄이 걸려있는 회사다. 이대로 내줄수는 없지.
그렇게 페트라니아 건설은 아크라시아 홀딩스에서 독립해 홀로서기를 선언했다.
하지만 독립이란 그리 쉽지많은 않은 일이었다.
아크라시아 홀딩스는 자회사의 독립을 좌시하지 않았고 자회사인 세이크리아 교단의 일부와 민간인들을 이용해 혼돈을 퍼트려 패트라니아에까지 영향을 끼치는 음습한 방식의 견제를 취했고, 이를 계속 좌시할수만은 없었던 카제로스는 아크라시아와의 대립을 선언, 그는 곧 양 회사의 분쟁을 일으켰다.
그 분쟁 지역에 갑자기 나타난 신생 용역 회사 '에스더 인력'.
그들이 사실 루페온 회장 직속의 용역깡패들이란것을 꿈에도 알지 못한 카제로스가 맞이한 것은
아크라시아 본사 및 각 지사 깊숙한 곳에 쪼개져 보관되어 있어야 할 방사능 병기 아크였다.
사용자의 운명마저 피폭시켜 인생을 조지게 만든다는 악마의 무기에 직격당한 카제로스는 반쯤 식물인간 상태로 쿠르잔의 안타레스 요양병원에 갇혀있어야했다.
요양을 빙자한 구금 중 그는 고민에 휩싸였다.
저쪽이 비대칭 병기를 쓴다면 이쪽도 태초의 어둠이고 혼돈이고 다 가져다 써야되는거 아닌가?
그 수백년의 고민의 결과는 '아니오'였다.
황무지에 던져진 애송이 때부터 대기업의 사장이 된 지금까지 그의 원칙은 바뀌지 않았다.
이제와서 지금까지 쌓아온 질서를 무너트려 세상을 망가뜨리기엔 그는 너무 오래도록 그것을 지켜온 것이었다.
500년만에 가까스로 요양병원에서 탈출한 카제로스는 결단을 내렸다.
우리는 원칙을 지키며 투쟁한다!
하지만 그 결과는 썩 좋지 못했다.
평소 중립을 지키던 메가코프 '가디언 코퍼레이션'의 개입, 그들을 등에 업고 날뛰는 에스더 인력.
가디언의 회장 에버그레이스의 독단에 자리를 박차고 일어난 이사 바르칸을 포함한 몇몇 이들의 협력을 얻긴했으나 그들의 힘만으로 극복하기엔 상황이 너무 좋지 않았다.
머리는 나쁘지만 충성을 다했던 임원들은 분투끝에 쓰러졌고
제일 오래동안 함께 일하며 신뢰했던 비서는 (주)혼돈의 후신인 (주)태존자의 산업스파이들에게 납치,
결국 그들과 직접 대치한 카제로스 본인도 끝내 에버그레이스의 갑작스런 몸통박치기에 치여 페트라니아 깊은 곳까지 밀려나게 되었다.
아, 저 멀리 통로 밖에서 500년 전에 봤던 익숙한 빛이 반짝인다.
모든 질서를 재로 만들어버릴 존재해서는 안될 물건, 그를 수백년동안 병원신세를 지게만든 죽음의 병기.
벌써부터 통로 안으로 쏟아져 들어온 빛에 닿아 피폭된 구조물들이 붕괴한다. 열심히 쌓아올려 지켜온 질서가 무너지고 애써 눌러왔던 혼돈이 날뛰기 시작한다.
카제로스는 이전의 트라우마에 저도 모르게 팔을 들어 빛을 가리려 했지만 소용이 없다는것을 금세 깨달았다.
그래. 자신은 분명 패배할것이다. 이번에는 중태로 끝날일은 아니겠지.
허나 한 회사의 장, 그리고 이 세계의 수호자로서 침입자들에 맞서 싸워야할 의무가 그의 등을 단단히 받쳐 뒷걸음치지 않고 앞으로 나아갈수 있게 만든다.
이제 곧 자신의 목숨을 가져갈 사신이 찾아온다.
마지막에 부릴 작은 사치. 손에 들린 소주 반병을 갑옷 깊은 곳에 조심히 보관한다.
가는 길 술 한잔 올려줄 이가 없을테니 먼길 가기 전에 한잔 정돈 해야하지 않겠는가?
"태초의 빛을 밝혔군"
청년의 눈은 맑았다. 예상대로 회장의 손아귀에서 벗어났구나.
저 저주받을 무기의 발사대로 쓰고 버려지기엔 아까운 인물이다.
뒤돌아선 채 그에게 넘길 심연의 불꽃이 담긴 금고의 카드키를 다시금 확인한다.
마지막으로 이 모든것의 원흉, 회장 루페온에게 거하게 한방 먹일 기회가 온것이다.
"내가 바로 카제로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