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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처음 아크라시아에 발을 내디뎠던 그날을 기억해?
루테란 성 광장에서 모코코 씨앗을 줍던 꼬마 시절, 너랑 나는 같은 날 전학 온 ‘뉴비’였지.
아무도 아는 사람 없는 그 낯선 대륙에서 우리는 서로의 유일한 파티원이었어.
네가 내어준 ‘설탕 뿌린 토마토’ 요리.처음 너의 영지에 놀러 갔던 날,
내 요리 레벨이 낮아 허겁지겁 먹어치우다 네가 자기 몫까지 뺏어 먹는다고
붓을 휘두르며 울먹이던 그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해.
중등부까지는 같은 학교에 다녔는데,
전문 전직때 나는 슈샤이어의 전사로, 너는 림레이크의 환술사로 갈라지게 됐지.
야간 자율 학습이 끝나고 내가 교문 앞에서 기다리면,
넌 가방 가득 ‘장인의 찹쌀떡’ 같은 먹을 걸 챙겨와서
"이거 먹고 스퀘어홀 타자"며 웃곤 했어.
길드원들이 "둘이 언제 영지 공유하냐",
"약혼식은 언제 올리냐"며 놀릴 때, 내가 눈치 없이 "우리가 왜?"라고 대답했던 날.
너의 그 씁쓸했던 감정 표현 이모티콘... 이제야 그게 무슨 의미였는지 알 것 같아.
베른 남부에 가서 난 엉뚱한 레이드만 뛰며 첫 연애를 하고,
군대라는 긴 대규모 전쟁을 다녀온 뒤 두 번째 연애마저 실패했을 때...
주점에서 술이나 마시며 한탄하던 내 옆에서 네가 그랬지.
"왜 나는 안 봐줘? 18년을 네 뒤에서 힐만 줬는데... 나도 너 좋아한다고!"
울먹이며 붓을 꽉 쥐던 너의 고백.
그날 우리는 비로소 '친구'라는 파티를 해체하고
'연인'이라는 길드를 창설했어.
함께 지내보니 알겠더라. 그냥 루테란 들판만 뛰어다녀도 즐겁고,
맛있는 요리 재료만 보면 네 생각이 먼저 나고.
너와 함께한 모든 스크린샷 한 장 한 장이 내겐 그 어떤 수집품보다 소중했어.
내가 사람에 치여 길드를 탈퇴하고, 3년 동안 아이템 레벨도 못 올린 채
영지에서 나무나 베고 낚시나 하던 ‘쌀먹’ 인생을 살 때도...
넌 단 한 번도 "왜 강화 안 하냐"고 다그치지 않았지.
오히려 "천천히 해도 돼, 내가 옆에 있잖아"라며 내 빈 마음을 채워줬어.
그때 난 내가 너무 보잘것없는 '빈껍데기' 같은 놈이라,
네 응원을 그냥 지나가는 시스템 메시지처럼 치부하며
자기혐오라는 디버프에 걸려 있었나 봐.
대가 없는 너의 '성스러운 보호'가 너무 과분해서 그랬나 봐. 정말 미안해.
아빠가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덤덤히 전했을 때, 넌 말없이 다가와
‘포옹’ 이모티콘 대신 너의 따뜻한 온기로 나를 안아주었지.
그날 난 처음으로 네 품에서 내면의 칸다리안 주점보다 더 크게 울었던 것 같아.
드디어 지난달, 나도 번듯한 직장에 취업해서
이제야 너와의 미래라는 ‘엔드 콘텐츠’를 꿈꿀 수 있게 됐다고,
혼자 바보처럼 영지에서 웃으며 계획을 세우고 있었는데...
오늘 너에게서 귓속말이 아닌 전화가 왔네.
미안하다고, 정말 미안하다고. 이제는 나와의 미래가 보이지 않는다는 너의 ‘작별 고별사’.
머리를 둔기로 맞은 것보다 더 큰 기절 상태 이상에 걸린 기분이었어.
엊그제까지만 해도 같이 레이드 돌았잖아. 심지어 우리 어제도 만났었잖아
왜?
돌아온 대답은 나와의 미래가 이제 더 이상 그려지지 않다고 했었지
네가 없는 아크라시아를, 아니 이 세상을 내가 혼자서 버틸 수 있을까?
너무 무섭고 두려워. 만나서 이야기하자고 외쳐봤지만,
너는 차단 목록에 나를 올린 듯 아무런 대답이 없네.
18년의 짝사랑과 6년의 연애.
"24년 동안 너만 바라봤다"던 네 사랑이 얼마나 무거웠을지 이제야 가늠이 돼서,
나는 차마 너를 추하게 붙잡지도 못하겠어.
그 위대한 사랑을 내가 또 의심하며 너를 힘들게 할까 봐 무섭거든.
마지막으로 전하고 싶었던 말이 있었는데,
이젠 수신인 불명 우편이 되어버렸네.
너는 좋은 사람이야
좋은 친구야
좋은 사랑이야
나 같은 모자란 로붕이 말고,
너의 선율을 진심으로 아껴줄 멋진 딜러 만나서 행복해야 해.
넌 그럴 자격이 충분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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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가 많이 오네...
오늘 아크라시아의 날씨는 참 슬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