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숱한 사지(死地)와 핏빛 전장을 함께 헤쳐나왔소. 비록 서로 쥐고 있는 무구가 같고 같은 유파(流派)의 기술을 사용해 전술적(戰術的)인 이점이 형편없이 바스러지는 척박한 형국이었을지언정, 우리는 결코 서로를 탓하지 않았소이다. 칠흑 같은 절망 속에서도 오직 내 등 뒤를 지켜주는 전우의 체온만을 등불 삼아, 오직 서로를 향한 절대적인 신뢰(信賴)와 의지 하나만으로 이 끔찍한 전장의 아가리를 찢으며 무식하게 앞으로 나아갔소.
수백 번의 쓰라린 고배(苦杯)를 마시고, 수도 없이 전멸의 잿더미 위에 지독한 좌절이 우리의 목을 졸라매어도 감히 우리네 흉중(胸中)에 패배(敗北)라는 두 글자를 품은 적은 단 한 번도 없었소.
한 명의 전우가 칠흑 같은 무력감에 주저앉을 적이면 남은 세 명의 동지가 기꺼이 찬연한 희망을 불어넣어 주었고, 두 명의 투사가 절망의 무게에 짓눌려 무릎을 꿇을 적이면 남은 두 명의 벗이 기어코 꺾이지 않는 불씨를 지펴내어 어둠을 밝혔소이다.
세 명의 지음(知音)마저 기력을 다해 쓰러진 절체절명(絶體絶命)의 순간에는 홀로 버틴 단 한 명의, 최후의 수호자가 기적과도 같은 신위(神威)를 뿜어내며 기필코 반격의 서막을 열어내었소.
허나 억겁(億劫)의 혈투를 거듭하는 동안, 본인의 숭고했던 영혼과 육신(肉身)은 무참히 깎여나가고야 말았소. 전신(全身)은 성한 곳 하나 없는 만신창이가 되었고, 영혼마저 짓누르는 아득한 피로감이 숨통을 짓누르는구려.
거악 앞에서도 한 치의 망설임 없이 검을 빼어 들고 죽음 앞에서도 태연자약(泰然自若)하며 찬연한 투지를 불사르던 과거의 오만(傲慢)은 온데간데없이 바스러졌소. 한때 사방을 호령하며 사선을 베어 넘기던 찬란한 나는 이제 그저 초라하고 비루한 껍데기만이 남아, 묵묵히 앞장서 나아가는 전우들의 눈부신 뒷모습만을 무력하게 바라보고 있을 뿐이오.
고백하건대, 본인은 더 이상 그대들의 등 뒤를 지켜낼 영광스런 자신(自信)을 잃어버리고 말았소이다. 심연의 밑바닥에서 기어 올라온 끔찍한 무력감(無力感)이 내면을 완전히 잠식해 버려 본인은 더 이상 그대들의 곁에 설 용기(勇氣)조차 낼 수 없는 몸이 되어버렸소이다.
나는 두렵소. 나의 허망한 죽음이 그대들의 끓어오르는 투지(鬪志)를 차갑게 식혀버릴까 두렵소.
나는 두렵소. 나의 덧없는 쓰러짐이 그대들의 단단한 결속에 치명적인 균열을 낼까 두렵소.
나는 두렵소. 나의 찰나의 실책(失策)이, 빗나간 나의 검궤(劍軌) 하나가 전우들이 피땀으로 쌓아 올린 공든 탑을 무너뜨릴까 두렵소.
나는 두렵소. 빛을 잃고 썩어가는 나의 잿빛 절망이, 끝내 그대들의 눈부신 광명마저 시커멓게 전염시킬까 두렵소.
나는 미치도록 두렵소이다. 기어이 내가 저 거악보다 더 끔찍한 재앙(災殃)의 씨앗이 되어, 사랑하는 벗들을 내 손으로 나락에 밀어 넣게 될까 두렵소이다.
나는 다시 녹슨 비수(匕首)를 쥐고, 또다시 절망의 아가리 속으로 걸어 들어가려고 하오. 버림받은 그림자, 내가 기댈 곳은 쿨타임 도는 디스토션 뿐일 것이오.
여명은 쫓아가는 자에게 허락되는 것이 아니라,
끝내 포기하지 않은 자의 곁에 어느새 도달해 있는 법이니.
그러니 나는 다시 이 칠흑 같은 수라장(修羅場)으로 묵묵히 발걸음을 옮기겠소.
언젠가 우리의 피투성이 어깨 위로 조용히 내려앉을 그 눈부신 아침을 고대하며,
오늘도 기꺼이 그대들의 곁에서 이 빗나간 칼춤을 다시 한번 추어보겠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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