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라인드 된 글입니다. [내용보기]메이플을 켰습니다.
켰는데요, 캐릭터 선택창에서부터 이미 피곤해졌습니다.
분명 어제도 봤던 캐릭터들인데 오늘 보니까 또 처음 보는 것처럼 낯설더군요.
“아 이 캐릭 왜 만들었지?”
“이 닉네임은 대체 무슨 생각으로 지은 거지?”
같은 질문을 스스로에게 수차례 던지다가 아무 캐릭이나 접속했습니다.
접속하자마자 인벤을 열었습니다.
인벤을 열었는데 정리가 안 돼 있었습니다.
정리를 하려다가 생각했습니다.
‘어차피 내일 또 어질러질 텐데 굳이?’
그래서 닫았습니다.
닫고 나니 마음은 편안해졌는데, 퀘스트 창을 보니 또 마음이 불편해졌습니다.
퀘스트가 많았습니다.
너무 많아서 하나하나 읽을 의욕이 사라졌습니다.
그래서 자동 이동을 눌렀습니다.
자동 이동을 눌렀는데 가는 동안 아무 생각을 안 하게 되더군요.
이게 명상인가 싶었습니다.
사냥터에 도착했습니다.
몬스터를 때렸습니다.
숫자가 뜹니다.
숫자를 보다가 문득 생각했습니다.
이 숫자가 의미가 있나?
있겠죠.
근데 지금의 저는 그 의미를 굳이 알고 싶지 않았습니다.
드롭 아이템이 바닥에 떨어졌습니다.
줍기 귀찮아서 잠깐 보고만 있었습니다.
그러다 사라졌습니다.
괜히 아쉬웠습니다.
내가 안 줍고 싶었던 건지, 줍기 귀찮았던 건지 헷갈렸습니다.
사냥을 하다가 갑자기 물을 마셨습니다.
현실에서요.
게임 속 캐릭은 포션 마시는데 저는 물 마셨습니다.
묘하게 동기화된 느낌이 들었습니다.
이래서 몰입도가 중요하구나 싶었습니다.
채팅창을 봤습니다.
아무도 말을 안 했습니다.
조용해서 좋았습니다.
조용한데 외롭지는 않았습니다.
이상하게 메이플에서는 그런 순간이 있습니다.
그러다 갑자기 강화가 하고 싶어졌습니다.
이유는 없습니다.
그냥 하고 싶어졌습니다.
결과는 예상하시는 그 결과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습니다.
굳이 밝히지는 않겠습니다.
왜냐면 이 글은 쓸모가 없어야 하니까요.
강화 후 멍하니 캐릭터를 회전시켜봤습니다.
이리저리 돌려보다가
“그래, 옷은 잘 입혔다”
라는 결론에 도달했습니다.
스펙은 모르겠고, 패션은 합격입니다.
이쯤 되니 게임을 왜 켰는지 잊어버렸습니다.
그래서 그냥 마을에 서 있었습니다.
다른 유저들이 왔다 갔다 했습니다.
각자 자기 할 일 하는 모습이 인상적이었습니다.
저만 아무것도 안 하고 있더군요.
그래서 인벤에 글을 써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왜냐면 인벤은
정보글도 있고
질문글도 있고
싸움글도 있고
그리고 이런 글도 있어야 균형이 맞는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이 글을 여기까지 읽으신 분이 있다면
그분은 아마
사냥하다가 손이 심심했거나
강화 터지고 멘탈 회복 중이거나
아니면 그냥 심심한 분일 겁니다.
어쨌든 이 글은 여기서도 끝나지 않습니다.
그래서 한 줄 더 씁니다.
그리고 또 씁니다.
이 줄은 아무 의미 없습니다.
이 줄도 없습니다.
지금 이 문단 전체가 없습니다.
혹시 중간에
“이걸 왜 읽고 있지?”
라는 생각이 드셨다면 정상입니다.
저도 쓰면서 같은 생각을 했습니다.
이제 정말 마무리를 향해 가겠습니다.
하지만 갑자기 끝내면 섭섭하니까
한 줄만 더 씁니다.
메이플은 오늘도 평화롭고
인벤은 오늘도 돌아가며
이 글은 오늘도 쓸모없습니다.
끝.
끝난 줄 알았겠지만 끝나지 않은 글, 다시 이어갑니다.
왜냐하면 이 글의 정체성은 쓸모없음이고, 쓸모없는 건 잘 안 끝나거든요.
아까 마을에 가만히 서 있다고 했는데요,
그 상태로 진짜 한참을 서 있었습니다.
캐릭터는 숨 쉬는 모션만 반복하고
저는 화면을 보다가 폰을 보다가
다시 화면을 보다가
결국 아무것도 안 했습니다.
그러다 갑자기
“오늘 출석은 했나?”
라는 생각이 스쳤습니다.
했는지 안 했는지 기억이 안 났습니다.
그래서 출석 버튼을 눌렀습니다.
이미 했다고 나왔습니다.
괜히 눌렀습니다.
이어서 이벤트 창을 열었습니다.
이벤트가 많았습니다.
하나하나 읽기에는 너무 많고
안 읽기에는 뭔가 손해 보는 기분이었습니다.
그래서 읽는 척만 했습니다.
눈은 글자를 보고 있었는데
뇌는 딴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사냥을 다시 나갈까 고민했습니다.
근데 “귀찮다”가 이겼습니다.
그래서 그냥 마을에서 점프만 했습니다.
의미 없는 점프를 몇십 번 하다 보니
이게 과연 게임인지 스트레칭인지 헷갈렸습니다.
갑자기 누군가 확성기를 쐈습니다.
내용은 기억 안 납니다.
왜냐면 늘 보던 내용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한 번 읽었습니다.
그리고 잊어버렸습니다.
길드를 열어봤습니다.
접속한 사람은 몇 명 없었습니다.
아무 말도 안 했습니다.
말을 걸까 하다가
“굳이?”
라는 생각이 들어서 닫았습니다.
이쯤 되면
게임을 즐기는 건지
게임에 접속만 해놓은 건지
모르겠는 상태가 됩니다.
그래서 다시 인벤을 켰습니다.
인벤에는 정보가 넘쳐납니다.
근데 저는 정보를 찾으러 온 게 아니었습니다.
그냥 스크롤을 내리고 싶었습니다.
스크롤을 내리다 보니
제목만 읽고 지나가는 글이 수십 개였습니다.
그 사이에
이 글이 떠올랐습니다.
“아, 아직도 안 끝났지.”
그래서 다시 쓰고 있습니다.
지금 이 문단도
읽어도 아무 도움 안 됩니다.
빌드도 없고
스펙도 없고
공략도 없습니다.
심지어 웃기지도 않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
이런 글은 끝까지 읽게 됩니다.
왜냐면
중간에 멈춰도 손해가 없고
끝까지 읽어도 얻는 게 없기 때문입니다.
잠깐 창을 내려놓고
물 한 잔 더 마셨습니다.
현실의 저는 수분 보충 중인데
캐릭터는 여전히 서 있었습니다.
이 차이가 묘하게 웃겼습니다.
이제 슬슬
이 글을 어디까지 이어야 하나
고민이 됩니다.
근데 고민만 하고
결론은 안 냅니다.
왜냐면 이 글의 목적은
결론을 내지 않는 것이니까요.
여기까지 읽은 분은
아마도 지금
사냥 중이거나
대기 중이거나
아니면 정말 심심한 분일 겁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 한 문단 더 씁니다.
이 문단은
아무 말의 집합입니다.
앞 문단과 연결도 없습니다.
뒤 문단과도 연결 안 될 겁니다.
이제 정말로
끝날 것 같은 분위기를 풍기면서
하지만 끝내지 않는
그런 글의 마무리를 향해 갑니다.
다음 문단에서 끝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습니다.
이 글을 쓴 저도 모릅니다.
일단 여기까지 또 이어졌습니다.
다음에 또 이어질 수도 있습니다.
왜냐면 쓸모없는 건
언제든 이어지니까요.